장관이 꺼낸 무기
• 댓글 남기기요즘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미국의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은 팬데믹 기간 동안 심각한 공급망 차질을 경험한 미국이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을 확보하려는 방법일 뿐 아니라, 중국과의 경쟁이 냉전의 양상으로 발전하면서 아시아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 기지를 자국 내로 가져오려는 일종의 안보 정책의 성격도 있다. 하지만 세계 유수의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미국 내에 공장을 세우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보니 보호무역의 성격이 강하고, 보조금을 받는 대신 상당한 정보를 요구하고. 중국 비즈니스 제한 등의 까다로운 조건 따라붙기 때문에 불만도 많다.
기업들로서는 요구 조건이 싫다고 무작정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고, 한국 정부 1년 예산의 1/10이 넘는 527억 달러(약 69조 원)라는 엄청난 돈을 사용하게 되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국민의 세금으로 기업 좋은 일만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렇게 큰돈이 풀리는 일에는 다양한 이해 당사자들(stakeholders)이 참여하고, 이들은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런 잡음 없이 진행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이번 글에서는 반도체법과 관련한 이해 당사자들 중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번 사업의 주무 기관인 미국 상무부(Department of Commerce)의 장관 지나 레이몬도(Gina Raimondo)다. 재닛 옐런(Janet Yellen) 재무장관과 함께 바이든 내각(총 25명 중 13명이 여성이다)을 대표하는 여성 장관인 레이몬도는 사실 내가 2020년에 로드아일랜드주로 이사하면서 '로드아일랜드 주지사'로 처음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과 함께 2021년부터 상무부 장관이 되었다.
레이몬도가 반도체법에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법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 도움이 된다. 이 법은 바이든 행정부가 "Chips for America (미국에 반도체를)"라는 프로그램을 위해 만든 것으로 반도체 연구, 개발과 생산에 거액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법적 근거에 해당한다. 특히 전체 예산의 4/5가 미국 내 반도체 생산 공장을 세우는 데 투입되고, 이를 통해 최소 2개 이상의 대규모 생산 단지가 만들어질 예정이다.
이런 단지에 공장을 짓기로 하는 기업에는 설비 투자액의 5~15%를 보조금으로 지원하고, 설비투자 세액 공제(최대 25%) 혜택도 준다. 물론 앞서 언급한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기 때문에 대만의 TSMC, 한국의 삼성, 미국의 마이크론, 인텔처럼 참여가 예상되는 기업들로서는 고민이 크지만, 참여하지 않아서 생길 손해를 생각하면 다른 옵션이 없다. 각국 정부가 나서서 미국과 협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레이몬도 상무부 장관은 지난 달 말, 이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반드시 "노동자들에게 양질의 직장보육시설을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해야 한다"라는 조건을 추가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동자'에는 공장을 짓는 건설직 노동자와 완성된 공장에서 일하게 되는 생산직 노동자가 모두 포함된다. 한 마디로 어린 아이를 키우는 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기공 시점부터 제공하라는 얘기다.
'돌봄 경제'의 문제
미국에서는 팬데믹을 거치면서 돌봄 경제(care economy)가 큰 타격을 입었다. 보육시설이 문을 닫았고, 장애인과 노인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가정에 엄청난 부담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런 경우 직접 돌봐야 하는 사람은 여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미국은 선진국임에도 양육에서 성차별이 큰 나라에 속하기 때문에 아이를 맡길 곳이 없으면 부부 중에 일을 포기하고 육아를 전담하거나, 임금에서 손해를 보면서 시간제(파트타임)로 전환하는 사람은 압도적으로 여성이다. 게다가 돌봄 노동자들이 대부분 여성인데 힘든 육체노동을 해야 하면서도 저임금으로 빈곤선을 오가는 경우가 흔하다.
레이몬도 장관은 미국이 2023년에도 국가 차원에 유치원 무상 교육이 이뤄지지 않아 여성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게 되는 문제를 지적하곤 했다. 문제가 많은 미국의 건강보험처럼 직장보육시설도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주는 '혜택'이다 보니 소수의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만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거다. 그는 나라가 나서서 안전망을 만들면 국가 경제 전체가 그 이득을 누린다고 주장한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사회주의를 하자는 거냐'라는 비난을 듣기 딱 좋은 얘기고,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런 같은 급진적인 정치인들의 어젠다처럼 들리지만, 사실 레이몬도는 월스트리트에서 일했던 사람이고, 민주당 내에서는 중도파로 분류되는 정치인이다. 게다가 그 근거로 대통령 직속 경제자문위원회에서 발간한 보고서(여기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를 든다. 2014년에 나온 이 보고서에 따르면 보육과 조기 교육에 투자한 비용은 8.6 배의 사회적 효과를 낼 뿐 아니라, 돌봄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면 고스란히 경제로 되돌아온다.
반도체공장이 지어지고 있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경우 어린아이 보육 비용이 건설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의 18%를 차지한다. 이를 나라가 보조해주거나 기업이 보조해줄 경우 건설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는 효과가 생기고, 더 많은 노동자를 유인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미국(혹은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기업과 그들의 후원을 받는 정치인들로부터 '사회주의'라고 공격받고, 무엇보다 이를 위한 법을 만들어야 하는 의회가 움직이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주장만 반복되고 진전이 없는 이유다.
장관이 꺼낸 무기
그런데 위와 같은 주장을 하던 레이몬도 장관에게 반도체법의 엄청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며칠 전 발행한 '세상을 바꾼 여름 캠프'에서도 비슷한 방법이 등장하지만, 미국 정부는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그 돈을 받는 기업, 단체에 조건을 내거는 방법으로 정책을 이행하는 일이 흔하다. 1990년에 포괄적인 미국장애인법이 통과되기 전에도 (주디 휴먼의 투쟁으로)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들은 장애인의 접근성을 보장하도록 강제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따르기 싫으면 돈을 받지 않으면 된다는 논리다.
레이몬도의 방법도 다르지 않다. 정부의 돈을 받고 싶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직장보육시설을 작업장 근처에 마련하고, 싫으면 받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주디 휴먼의 1977년 점거 농성 때는 이미 통과된 법의 집행을 장관이 거부하고 있었지만, 반도체법의 경우는 장관이 직장보육시설 제공을 조건으로 넣었다는 점이다. 레이몬도는 "의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보조금의) 집행 과정에서 하겠다"라고 했다. 이런 방법이 이상적인 건 아니다. 하지만 의회가 극한 대립으로 일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의회가 막아도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는 이런 정신은 바이든 행정부의 특징이기도 하다.
짐작하는 대로 미국의 보수층에서는 레이몬도가 내건 조건에 분노하고 있다. 기업과 부자들의 입장만 대변하는 칼럼으로 악명높은 월스트리트저널(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매체다)에서는 반도체법이 사회정책으로 변했다면서 "어린아이들에게 급진사상을 일찍부터 주입시키려 한다"라며 흥분했다. 영국의 파이내셜타임즈는 이런 바이든 행정부의 방법론을 두고 프랑스 뺨치는 지도주의(dirigisme, 국가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지시, 명령을 내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경제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평했다.
다만 파이낸셜타임즈는 진보적인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의 말을 함께 전했다. "노동력 부족은 미국 경제, 특히 첨단기술 부문에서 심각한 문제인데, 반도체법으로 지원금을 받는 기업이 보육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레이몬도 장관은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없었으면 자신은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걸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압박하는 조항을 삽입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기업과 경제가) 성공하려면 여성들을 끌어들이고,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일을 맡기고, 그들이 떠나지 않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육아에 대한 지원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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