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에 비해 느리게 진행되는 미국의 대선에도 '바람'은 존재한다. 그 바람이 반드시 돌풍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그 바람의 '방향'이다. 카멀라 해리스는 두 달 전만 해도 그저 인기도, 존재감도 없는 부통령에 불과했다. 나이 많은 바이든이 재선에 도전하겠다고 하고 끝까지 버텼던 것도 해리스가 트럼프를 상대로 승산이 없다는, 실제 조사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관심했던 유권자들이 갑자기 해리스에 열광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가히 돌풍이라고 할 만큼 강한 바람이다. (한 기자는 이런 변화를 결혼 상대를 찾는 사람의 생각 변화에 비유했다. 해리스가 인기 없었던 이유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바이든 외의 다른 후보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바이든이 더 이상 후보가 아니게 되자 갑자기 해리스가 매력적인 "결혼 상대" 즉,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대통령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유세장의 카멀라 해리스 (이미지 출처: NC Newsline)

해리스의 인기—혹은 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한 이유를 분석한 사람들은 바이든이 끌어내지 못하고 있던 두 그룹, 30세 이하의 유권자와 흑인 유권자들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도 20대 남성이 보수화한다는 얘기가 많지만, 미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어서 지난 7월에 나온 퓨 리서치 조사 결과에 따르면 30대 이하의 유권자들이 공화당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카멀라 해리스가 후보로 나온 직후 이들의 여론이 바뀌면서 해리스가 거의 20퍼센트 포인트 차이로 트럼프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흑인 유권자들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왔지만, 바이든에 대한 지지가 점점 줄어드는 게 민주당의 고민이었는데 해리스와 월즈가 등장한 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뉴요커의 에반 오스노스(Evan Osnos)는 정치 전문기자다. 그는 취재하러 정치인의 유세장에 가서 어떤 부분을 보느냐는 질문에 "후보가 하는 연설은 별로 듣지 않는다"라고 답한다. (실제로 정치인들은 준비한 연설을 곳곳에서 반복하기 때문에 수행 취재를 하는 기자들에게는 맨날 들었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제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건 청중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왜 이 집회에 왔는지 이해하려고 하고, 그들이 유세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를 그들의 바디랭귀지를 통해 파악합니다. 기자가 유권자들과 국민의 기분(mood)을 이해하기에 그만큼 좋은 지표도 없어요. 가령, 얼마나 먼 거리를 운전해서 그 집회에 왔는지를 물어보는 것처럼 간단한 겁니다."

그러면서 오스노스 기자는 카멀라 해리스의 디트로이트 유세장에 갔던 일을 이야기했다. "몹시 더운 날이었습니다. 유세장에 있던 사람들 중에 더위를 먹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었죠. 한 30분에 한 번 정도는 의료진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달려가 물을 건네고, 주저앉았던 사람은 숨을 돌리고는 다시 일어나서 연설을 듣더라고요. 그날 제 눈에 띈 건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런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의지와 열정은 TV 화면을 통해서는 전달되지 않아요. 현장에 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격전지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카멀라 해리스 유세에서 70대의 흑인 여성을 만났다. 한쪽 발이 부러져서 깁스를 한 그 여성은 아침 9시에 행사장에 도착해서 줄을 서서 들어왔다면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에, 카멀라 해리스를 직접 볼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습니다."

카멀라 해리스 유세장의 지지자들 (이미지 출처: Facebook)

엉뚱한 곳에서 온 '변화'

카멀라 해리스의 인기는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를 놀라게 했다. 두 당 모두 해리스가 이번에 후보가 되지 못할 이유를 알고 있었고, 그 이유는 해리스의 지지율, 특히 트럼프와 가상 대결에서 이길 수 없는 낮은 지지율이었다. 그럼 지금처럼 치솟는 인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장 흥미로운 분석은 폴리티코의 제프 그린필드(Jeff Greenfield)가 내놨다. 그린필드는 "트럼프의 가장 결정적인 파워가 무력화되었다(Trump’s Crucial Power Has Been Neutralized)"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트럼프가 2016년에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그가 "변화를 상징하는 후보(change candidate)"였기 때문인데, 이번 선거에서는 그 자리를 해리스에게 내어줬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린필드는 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현 부통령이 "변화를 상징하는 후보"가 된다는 게 얼마나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head-spinning, gob-smacking)" 일인지부터 설명한다. 원래 부통령은 대통령의 공과를 모두 물려받는 걸 피할 수 없다. 같은 정권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변화를 상징하는 후보는 현 정권과 완전히 다른 곳에서 온다. 트럼프가 오바마 정권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힐러리 클린턴을 누른 것은 워싱턴 정치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이 평생을 정치만 했던 후보(클린턴)와 완전히 다른 후보(트럼프)를 선택했기 때문이고, 오바마는 아예 인종부터 다른, 그야말로 변화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바이든과 함께 일한 부통령 해리스가 사람들에게 변화의 상징으로 보일 수 있을까?

그린필드에 따르면 이게 이번 선거가 가진 가장 독특한 점이다. 바이든이 후보직을 사퇴할 때까지 이번 선거는 두 명의 대통령이 대결하는, 희한한 선거였다. 둘 다 든든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승패를 가를 중도 유권자들은 트럼프와 바이든, 둘 다를 싫어하는 상황이었고, 고령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이는 후보와 민주주의를 끝내겠다고 다짐하는 후보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끔찍한 선거였다. 이 상황에서 60세의 젊은(!) 카멀라 해리스가 등장한 거다. 게다가 해리스가 당선되면 첫 여성 대통령, 첫 인도계 대통령이기 때문에 변화의 상징이 되는 데 손색이 없다.

2016년의 트럼프는 변화의 상징이었지만, 2020년에는 더 이상 아니었다. 그 사실이 두 선거의 승패를 갈랐다. 그렇다면 2024년 선거에는? 그가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의 눈길을 끄는 유일한 조건은 상대가 자기보다 더 나이 많고, 현직 대통령인 바이든일 경우다. 그래서 7월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민주당 주자가 해리스로 바뀐 후에는 트럼프를 차별화할 수 있는 요소가 사라진 거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는 지난 몇 년 동안 바이든을 꺾기 위한 준비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해서 전략을 완성했고, 그게 먹히고 있었는데, 완전히 못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세장에서 트럼프를 기다리는 지지자들 (이미지 출처: Reuters)

트럼프 선거운동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진단이 "트럼프가 갑자기 바뀐 상황에서 카멀라 해리스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뉴요커의 오스노스 기자는 트럼프가 "얼어붙은(frozen) 것처럼 보인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그가 해리스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표현인 "부패한(crooked)," "지능이 낮은(low-IQ)" 등의 표현은 바이든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걸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트럼프의 화법에 익숙해진 유권자들에게는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뿐더러, 충격값(shock value)도 떨어져서 언론에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트럼프가 애용하는 중학생 수준의 별명 붙이기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2015년 공화당 경선에서 젭 부시(Jeb Bush) "Low Energy Jeb(에너지 떨어지는 젭)"이라는 별명을 붙인 이후로 자신과 경쟁하는 정치인들에게 우스운 별명을 붙여서 화제가 되었고, 그걸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법으로 사용해 왔다. (그가 붙인 별명들만 모아둔 위키피디아 페이지까지 있다.) 트럼프는 카멀라 해리스가 후보가 된 직후 "Laughing Kamala(웃는 카멀라)"라는 별명을 붙였다. 해리스가 큰 소리로 웃는 영상들을 모아 놓고 그가 고음으로 깔깔 웃는 소리가 괴상하다며 붙인, 다소 여성 비하적인 별명이었다. 결과는? 트럼프가 지난 8년 동안 해온 장난에 지친 사람들은 관심을 주지 않았고, 카멀라 해리스의 지지자들은 해리스의 웃는 모습이 좋다며 홍보에 활용하는 바람에 완전한 역효과였다.

반대로 팀 월즈가 트럼프와 주변 인물들이 "이상하다(weird)"고 했던 말은 큰 바이럴을 일으키며 월즈를 카멀라 해리스의 러닝메이트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민주당 지지자들이 트럼프를 조롱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놀리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 이에 반응하면 효과가 커지는데, 트럼프는 과거와 달리 자기를 놀리는 말에 "내가 왜 이상하냐"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러닝메이트) J.D. 밴스"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서 2016년과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흔들리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는 아마도 그가 바이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일 거다. 많은 언론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트럼프는 연설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나는 바이든을 좋아하지 않지만" "카멀라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바이든에게서 후보직을 빼앗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는 어제도 자신의 트루스 소셜에 같은 주장을 했다.

처음 그 말을 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듣고 말았지만, 트럼프가 자기 선거운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걸 보면서 트럼프가 해리스를 상대로 대결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트럼프 백악관의 홍보실 디렉터였던 알리사 파라 그리핀(Alyssa Farah Griffin)은 그런 트럼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는 예전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조 바이든을 상대로 했을 때는 가능했을 수 있다. 바이든에 비하면 더 힘이 있고 생동감 있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카말라 해리스를 상대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