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교보문고 북뉴스 인터뷰입니다.

앞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출판사의 도움으로 오터레터 독자들께 책 10권을 선물하기로 했어요!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로 의사를 표해주시면 한국 시간으로 6월 26일 자정까지 댓글을 적어주신 분들 중에서 추첨을 하겠습니다.


여러 주요 신문에서 화제의 칼럼니스트라 사회학자로 생각하는 독자도 많을 것 같습니다. 『도시는 다정한 미술관』 출간 후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저를 잘 아시는 분들이나, 혹은 페이스북을 통해 알고 계신 분들 중에는 제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을 거예요. 제가 종종 그 얘기를 하고 미술 이야기를 쓰곤 했거든요. 그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언제 미술 얘기를 책으로 내나 하고 기다렸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한 편으로는 제가 페이스북이나 다른 곳에서 미술 이야기를 할 때 글 투나 접근 방식이 다른 (아마도 사회학적인?) 글을 쓸 때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미술만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편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대학에서 사회학 전공 후, 미술사로 바꾼 계기가 있으신가요? 대단한 계기는 아니었어요. 어릴 때는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를 좀 들었지만 실기로 미술을 할 마음은 없었고, 대신 뛰어난 작품들을 보고 그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걸 좋아했죠. 그래도 가장 직접적인 계기라면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45일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게 아닐까 싶어요.

지금은 흔한 여행처럼 여겨지지만 그 때만 해도 막 해외여행 자유화가 실시된 때였고, 인터넷도 없었던 때라 다들 부족한 정보로 무작정 떠나던 시절이었어요. 게다가 쓸 수 있는 돈도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지금처럼 맛집 기행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고, 대부분 무료거나 아주 적은 입장료만 받는 유럽의 미술관이 제게는 천국이었습니다. 그 때 정말 원 없이 미술관을 돌아다니면서 미술사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싹텄습니다.

한국도 아트페어, 인테리어 등 미적 관심이 높은데, 앞선 나라들을 보면 어떤 전망이 있을까요?많은 것들이 그렇지만 특히 (전통적인 개념의) 시각예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 사회의 경제적 수준과 비례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것과 요즘 중산층 사람들 중에 예술작품을 작게나마 수집하는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고,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자신의 기호를 알고 거기에 솔직해진다는 거니까요.

그런 추세가 이제 막 퍼지기 시작한 한국에서 그걸 이미 오래 해온 다른 나라들을 보면서 차이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앞선 나라들에서는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그런 그룹을 통해 행사, 전시, 연구물 같은 다양한 산출물이 나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서양 미술사라는 게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거죠. 가령 미국과 유럽에서 현대 미술사를 공부할 때 한 번쯤 읽게 되는 거트루드 스타인 같은 사람은 저술가, 수집가이기 이전에 파리에 모인 예술가들의 친구였거든요.

우리가 그들의 방식을 흉내내거나 따라가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예술작품은 감상과 수집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그걸 둘러싼 대화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특정 작품을 두고 의견이 갈리고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작품을 분석하게 되고 진정한 가치를 파악하게 되는 거죠. 그런 뜨거운 대화/담론을 모아 시간 순으로 배열한 게 미술사이고요.

책을 보면, ‘피에타’ 조각상에서 성모 마리아가 아들 예수보다 젊게 묘사되는 것을 콕 짚어냅니다. 교회에서 처음부터 앉았던 것은 아니라는 내용도 참신했고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특이점을 잘 알아보게 되나요?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첫 학기 세미나 수업 때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공부하는 분야의 작품을 하나 골라서 ‘formal analysis(형태/형식 분석)’를 해오라”는 학기말 과제를 내주셨어요. 저는 하필 미국 현대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었던 터였고, 작품도 별 생각 없이 앤디 워홀의 판화를 고르는 바람에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을 하는 데 무척 고생을 했어요.

그런데 그 그림을 두고 한 학기를 씨름하면서 배운 건, 작품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사실들이 그런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흔해요.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보기 때문에 그렇죠. 사실은 이미 들어서, 배워서 알고 있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건 자발적인 관찰과 거리가 멀고, 자발적인 관찰을 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나를 고생시켰던 앤디 워홀의 1975년 작품, '레오 카스텔리' 

내가 외계에서 와서 문화적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이 이 물건(작품)을 처음 보는 거라면 뭐가 이상하게 보일까를 생각해보면 쉬워집니다. 그리고 그걸 말이나 글로 옮겨보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에 갈 때는 혼자 가도 좋지만 말이 잘 통하고 대화를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가는 게 좋아요.

‘카메라 없이 스냅숏을 찍은 마네’ 편을 보면, 마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사실 마네는 제가 미술사를 공부하기 전에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화가였어요. 앵그르처럼 전통적인 화법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도 아니고, 인상파 화가들처럼 전통의 속박을 벗어 던진 사람도 아닌데 후배 화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은 전부 그 사람을 유럽 현대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 꼽거든요. ‘내가 보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걸까?’하고 항상 궁금했죠.

그런데 미술사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 마네의 현대성이었어요. 제가 책에서 마네를 이야기하면서 사진작가 개리 위노그랜드 얘기를 하지만, 그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그냥 현대 도시에서 보는 익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죠. 그렇게 현대에 익숙한 눈으로 마네가 이룩한 업적이 눈에 띄지 않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글을 읽을 때 혁명적이라고 느끼기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태어나 살고 있으니, 당시에는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과거와 얼마나 무자비하게 단절을 해야 했는지 깨닫기 쉽지 않죠.

게릴라걸스나 홍콩 시위대는 저항의 무기로 미술을 이용했어요. 우리 사회에서 누가 이런 이미지의 정치력을 가장 잘 활용했으면 하나요? 과거에는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계에서 미술을 저항의 무기로 많이 사용했죠. 판화와 걸개그림으로 대표되는 이런 저항의 이미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현대미술사의 일부로 편입되었죠.

2020년대에는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페미니스트 단체에서 이미지를 잘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가령 닷페이스에서 만든 퀴어퍼레이드 관련 이미지들이 이런 커뮤니티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단결된 목소리를 내는 데 좋은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이미지는 구호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힘이 있으니까요. 그런 이미지들이 ‘굿즈’로 팔리는 일이 많아서 과거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그건 시대의 변화일 뿐이고, 운동을 하는 단체에 기부금으로 사용되는 방식이라면 오히려 좋은 변화라고 생각해요.

닷페이스가 만들어낸 퀴어퍼레이드 온라인 포스터 이미지

마크 로스코 그림 앞에서 어느새 울음이 터졌다고 썼습니다. 위로 받고 싶을 때 바라보는 그림이나 이미지가 있나요? 특별히 위로 받고 싶을 때 찾아보는 그림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지쳤을 때는 니나 시몬, 빌리 할리데이 같은 사람들의 음악을 듣곤 합니다.) 하지만 보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복잡한 생각이 빠르게 사라지는 그림들은 있어요. 가령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의 작품들이 그래요.

20대 때는 바로크 회화가 좋은 줄 몰랐고 고전주의 풍의 회화가 진부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뀌더라고요. 오래 전 일이지만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푸생 특별전을 할 때 별 생각 없이 찾아갔다가 거대한 푸생의 그림들 앞에서 큰 감동을 받았어요. 나중에 푸생 그림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좋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봤죠. 17세기는 유럽이 현대 세계로 변화하는 일종의 태동기였지만 당대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런 현대 세상이 탄생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사회가 근본부터 변화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 같은 걸 갖고 있었을 거예요.

저는 푸생 같은 화가들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황금기를 그린 건 그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나이를 먹으면서 푸생을 좋아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비슷한 불안감을 저도 느끼기 때문일 수 있죠. ‘전설과 같은 과거를 생각하며 이런 위대한 작품을 남긴 푸생도 이미 수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가 남긴 대형 유화작품 앞에 서있는 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경험입니다. 인생에서 하찮은 게 뭐고, 중요한 게 뭔지를 생각하게 도와주죠.

니콜라 푸생, '팬과 바쿠스 신화에 나오는 아카디아 풍경' (1625년 경)

『도시는 다정한 미술관』을 통해,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근엄함을 내던진 파격적인 건축물이란 걸 알 수 있었어요. 최근 한국에서 그런 상징성을 띤 건축물이 있다면요? 국제주의 양식과 같은 거대한 사조가 한국에서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지난 약 10년 동안 한국인들이 건축을 보는 태도가 바뀐 건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무조건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한국이 아직 “잘 사는 나라"가 되기 전에 지어진 어설픈 건축물에 대한 멸시의 시선이 강했는데 지난 몇 년 동안에 그런 태도가 많이 사라졌죠. 물론 여기에는 ‘노포(老鋪)'와 관련한 이미지 소비처럼 지나치게 상업적인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오랜 열등감 혹은 자의식 비슷한 걸 극복하는 모습은 좋아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우연히 알게 되어서 기뻤던 건축물은 ‘구산동 도서관마을’입니다. 제가 번역한 책을 두고 북토크를 하게 되어서 초대받아 갔는데, 깜짝 놀랐어요.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지방자치단체가 그냥 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건물을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하는 선입견을 갖고 갔거든요. 그런데 그 건물은 주위 건물과 확연히 다르면서도 거슬리지 않았고, 새로운 건물을 지으면서 그 자리에 있던 건물의 외벽을 창의적으로 품고 있죠.

구산동 도서관마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도서관 구석구석에 사람들이 앉아서 책을 읽고 모임을 갖고 있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북토크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건물이 살아서 꿈틀대는 듯했어요. 보여주기 위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건물로 만들었다는 얘기죠.

혹시 모두가 대단하다고 하는데, 가보니까 지루했던 미술관이 있나요? 실망스러운 미술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망스러운 전시가 있죠. 아마 금방 떠오르시는 것들이 있을 거예요. 큐레이터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작품, 작가를 모아 여는 전시회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유명해서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금방 아는 해외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죠. 하지만 그런 유명 작가들의 핵심적인 작품은 들여오기 쉽지 않으니 그들의 소품만 가져다 놓고 손님을 끌죠.

그런 전시회장에는 대개 숙제하러 온 아이들이 작품이 아닌 작품설명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요. 전시장은 좁고 소란스러운데, 겨우 다 보고 나오면 도떼기 시장 같은 분위기에서 기념품을 파는데 열심인 그런 전시를 하는 곳은 오히려 미술에 대한 대중적 무관심을 키운다고 생각해요.

이 책의 주제인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자”의 평소 실천법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문학이론 중에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게 있다는 걸 아마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제가 사용하는 방법은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자동화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건 나쁜 행동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도 아닙니다. 매일 같은 길로 출퇴근을 하다 보면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이는 뇌가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를 피하기 위해서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거죠. 낯설게 하기는 그런 두뇌의 습관을 의식적으로 막아서 사물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인식해보는 활동입니다.

한남대로 육교를 건너다가 선원근법이 멋지게 살아나는 풍경을 보고 멈춰 서서 구경한 적이 있다.

익숙한 물건이나 풍경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 모르던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저 같은 X세대는 1980년대에 지어진 주택을 보면 그냥 낡고 답답했던 기억이 떠오르지만 그런 곳에 살아본 적이 없는 밀레니얼 세대, Z세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그 건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래서 힙한 커피숍으로 활용될 수 있는 거죠.

물론 그 반대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들 좋다고 하는 작품이 과연 좋은 것인지 의문을 던져보는 거죠. 그냥 주류와 반대로 가려고 객기를 부리는 건 별 가치가 없겠지만 그게 정말로 진지한 질문이고 그런 반론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거나, 남들과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 생각이 정말로 ‘나의' 생각인지,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느끼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보는 눈'이 길러지죠.

이 사진은 이 책의 첫 독자이신 장성환 디자이너께서 찍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