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의 습격 ③ 코너의 증언
• 댓글 2개 보기미국은 둘리틀 공습 때 일본 군수공장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16대의 폭격기를 보내어 폭탄을 떨어뜨렸지만 일본에 심각한 타격은 주지 못했다. 그런데 폭격기도 아닌 풍선 몇백 개가 거대한 미국 영토에 줄 수 있는 피해는 처음부터 크지 않다는 것을 일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에도 감행한 이유는 미국인들에게 "우리도 안전하지 않다"라는 불안감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정체 불명의 풍선들이 여기저기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미국 정부가 정보 통제를 한 이유는 일본이 노리는 대국민 심리전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폭탄이 미국에 떨어졌다는 보도가 나오게 되면 일본에서는 작전이 성공했다고 판단하고 (결과적으로 성공율은 3%가 넘은 셈이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이를 지속할 것이었고, 무엇보다 언론에서 미국 어디 어디에 떨어졌는지 보도하게 되면 그 자료를 바탕으로 투하 위치를 정교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전국의 언론사에 공문을 보내 풍선 폭탄과 관련한 보도를 하려면 미 육군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상 보도를 금지한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있는 지금은 불가능한 수준의 통제였다. 게다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였지만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1917년에 제정된 간첩법(Espionage Act) 때문이었다. 일본이 보낸 풍선의 도착 위치를 보도하고, 그 결과 일본이 미국의 군사시설을 폭격하게 되면 이는 이적행위이자 간첩행위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2차 대전 중 미국의 언론은 상당히 애국적인 자세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이런 방침에 적극 협조했고, 신문과 방송사는 관련 제보를 받아도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상한 풍선이 목격되거나 폭발음을 들어도 그 소문은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고, 전국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미국 정부의 정보 통제 조치는 성공적이었다.
유일한 사망 사고
하늘에서 폭탄 약 300개가 북미 대륙에 도착했는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다면 기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부 오레건주 작은 마을에 떨어진 풍선 폭탄이 터져 영문도 모른 채 접근한 6명의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있었다.
오레건주 남부에 있는 블라이(Bly)는 현재 인구가 200명을 조금 넘지만, 1940년대에도 주민이 약 7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인 아치 미첼은 1945년 5월 5일, 날씨 좋은 토요일에 주일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피크닉을 가기로 했다. 11살부터 14살 사이의 아이들은 미첼 목사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고 숲으로 향했다. 미첼 목사의 임신한 아내 엘시(당시 26세)도 함께였다.
피크닉 장소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아이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낙하산처럼 보이는 커다란 천과 이상한 장치를 발견했다. 일본이 보낸 풍선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정보통제의 부작용이 있었다. 만약 그들이 "일본이 풍선 폭탄을 보내고 있으니 이를 보게 되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라는 정부의 공식 발표나 언론 보도를 봤다면 아이들은 조심했을 것이고, 최소한 어른이 제지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는 아이들은 풍선 주변에 둘러섰고, 목사의 아내 엘시도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중 한 아이가 폭탄에 손을 댄 듯하다) 그렇게 주변에 모여있는 동안에 폭탄이 터졌다. 트렁크에서 물건을 내리느라 떨어져 있었던 미첼 목사가 폭음에 놀라 뛰어갔을 때 아이들 다섯 명과 엘시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고, 그저 쓰러진 아내의 옷에 붙은 불을 끄기에 바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일하고 있던 산림청 직원들이 달려왔고, 사고 소식은 곧바로 마을에 퍼졌다.
그런데 그날 피크닉에 가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코라 코너(Cora Connor, 당시 16세). 토요일은 코너가 마을의 전화국(이라기보다는 사무실)에서 교환원 일을 하는 날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화는 자동으로 원하는 번호로 연결되지 않고 교환원이 수작업으로 교환기를 연결해줘야 했다. 그 마을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모든 전화는 그 사무실을 거치게 되기 때문에 교환일을 하는 사람은 모든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코너가 일하고 있던 사무실로 산림청 직원이 들어왔다. 끔찍한 사고를 목격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들어온 그 직원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군부대로 전화했고, 30분 만에 군인들이 마을에 도착했다고 한다.
사태를 파악한 군인들은 상황을 그 사무실에서 전화로 보고했기 때문에 그날 교환원 당직을 하고 있던 코너는 이들이 하는 얘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교로 보이는 남자가 코너에게 "네가 오늘 들은 얘기는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가족에도 발설하면 안 된다"라고 엄하게 경고했다.
코너가 겁에 질려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교환원은 모든 소식을 듣게 되기 때문에 상황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거다. 영문을 모르는 유족들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코너에게 당장 나와서 상황을 설명할 것을 요구했지만 군부대의 경고를 들은 코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하루 종일 사무실을 떠나지 못했다.
코라 코너의 눈물
다행히 하루 이틀 뒤 군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설명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코너에게 한 것과 비슷한 경고를 하고 들려줬겠지만, 블라이 사람들은 아이들이 왜 죽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민간인에게, 자기 아이들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일본에 대한 적개심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미군 트럭이 블라이를 지나다가 잠시 정차했다고 한다. 하필 그 트럭이 선 곳이 코너의 집 바로 앞이었기 때문에 코너는 창밖을 내다봤다. 블라이 같은 작은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했다고 한다. 그 후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는 코너는 지금도 (이 인터뷰는 2017년에 방송되었다) 목소리가 떨린다.
"어떤 여성과 어린아이가 군용 트럭 뒤에서 내렸는데, 일본계였어요. 그 트럭은 (일본인 강제 수용소가 있는) 툴리 호수로 가는 트럭이었죠. 그런데 그 여성은 큰 소리로 울면서 '제발 저희에게 물 좀 주세요, 물 좀 주세요'라고 사정하더라고요. 그날은 엄청 더운 날이었거든요. 그런 날 캔바스천을 씌운 군용트럭 짐칸에 많은 사람들 빽빽하게 타고 있었으니 오죽 더웠겠어요."
"제가 부엌에서 닥치는 대로 그릇을 하나 꺼내서 물을 받아 문을 나서려는데,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서 그 여성과 아이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엄청나게 분노한 상태였죠. 엄마는 제가 나가지 못하게 막았어요. 제가 나가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울자 엄마는 지금 나가면 너도 돌을 맞는다고 절대 안 된다고 하셨죠.
지금도 그날의 장면이 기억에 선해요. 저는 그런 행동을 한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떤 일이 있었어도 그건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어요. 저는 그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여자와 아이가 폭탄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요?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럴까요?"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정부는 풍선 폭탄과 관련한 증거들을 모두 파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폭탄 잔해와 사진 등이 남아서 이제는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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