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조금 다른 버전이 '세계 공용 백신여권 합의하기 어려운 3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코로나19 백신의 보급이 더디게나마 진행되면서 ‘백신 여권’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들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유럽연합(EU)은 회원국들 사이에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백신 증명서를 개발하지 않으면 구글이나 애플 같은 미국 기업들이 만든 백신 여권을 이용하게 될 것으로 경고하면서 자체 개발을 촉구하고 있다. 하루빨리 여행이 자유로워져야 팬데믹으로 침체된 경제가 살아난다는 생각에 많은 나라가 백신 여권을 만들려고 하지만 이스라엘이나 아이슬란드 같은 작은 국가나 하와이, 뉴욕 같은 개별 주 단위에서만 성과를 낼 뿐 진정한 의미의 ‘백신 여권’의 탄생은 요원한 상황이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높은 신뢰도와 호환성, 그리고 개인 정보 보호 기술을 요구하지만 핀테크(FinTech)가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온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 백신 여권을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현재 코로나19를 앓지 않고 있고, 백신 접종을 완료했다는(언뜻 단순해 보이는) 증명서를 현재 사용되는 여권 수준으로 표준화하는 데 여러 나라가 동의하게 만드는 데 있다.

전문가들은 백신 여권이 반드시 갖춰야 할 요건을 세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첫째, 호환성이다. 공항과 항구, 컨벤션 센터나 극장 등에서 디지털 단말기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데, 표준 체계 없이 여러 디지털 증명서가 존재한다면 이를 백신 ‘여권’이라고 부를 수 없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할 때 사용하는 여권도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들 간의 합의를 통해 지금처럼 동일한 크기와 요소를 갖고 기계 판독이 가능한 형태가 될 수 있었다. 가장 최신 형태인 컴퓨터 칩이 들어간 생체 인증(바이오메트릭) 여권은 처음 등장해서 150국이 사용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을 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다음은 신뢰 가능성이다. 정부 기관 등에 의해 의료 기록이 철저하게 관리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지역도 많다. 의료진을 매수하거나 허술하게 정보를 조작, 입력할 수 있다면 아무리 첨단 기술이 들어간 여권도 쓸모가 없어진다. 감염자 한 사람으로 큰 구멍이 뚫릴 수 있는 바이러스의 경우 더더욱 그렇다.

마지막으로 개인 정보 보호 문제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이름만 가린 확진자의 나이와 성별, 동선 등의 정보가 공공기관의 웹사이트에 올라가지만 백신 여권이라는 말만 나와도 펄쩍 뛰며 반대할 만큼 개인 정보 공유에 민감한 나라들도 있다. 이렇게 전혀 다른 기대 수준을 가진 나라들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정보가 남지 않고 삭제되도록 강제하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각국 국내 정치의 이해관계가 있다. 지난달 미국에서는 백악관 대변인이 “미국 정부는 국민이 (백신 관련)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게 하는 시스템을 지지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백신 여권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이유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정부의 개입을 더 싫어하는 미국의 친트럼프 유권자들 때문이다. 가뜩이나 백신 접종을 싫어하는 이들이 미국 정부가 백신 여권을 준비한다고 하면 각종 가짜 뉴스와 루머로 대규모 접종 거부 사태가 벌어질 것을 염려한 발언이었다.

문제는 미국인들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비행기와 항공 여행 자체가 미국에서 탄생했다. 그런 나라의 정부가 백신 여권 세계 표준화 작업에 손을 대지 않겠다면 그것만으로도 국제적으로 합의된 백신 여권이 탄생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하지만 백신 접종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면 전 세계가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이는 우리가 현재 겪는 고통을 지속시킬 것이다. 따라서 결국 어떤 형태로든 백신 접종과 감염 여부를 보여줄 수 있는 증명서는 탄생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 공공장소에 가득한 CCTV가 아무리 사생활 침해와 감시라는 논란을 일으켜도 일상에서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표준이 만들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어떤 형태의 증명서가 탄생하게 될까? 궁극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백신 ‘여권’이 아닌 백신 ‘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여권은 사용하는 모든 국가가 합의한 조건에 맞춰 필수적인 요소가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하지만 비자는 다르다. 발급 조건과 절차가 몹시 까다로운 나라가 있고 허술한 나라가 있을 뿐 아니라, 모양도 정교한 스티커부터 대충 찍은 스탬프까지 제각각이다. 무엇보다 호스트 국가에서 범죄 경력, 재산, 결혼 여부 등 원하는 정보를 마음대로 요구할 수 있다. 즉,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싫으면 오지 말라”는 것이 비자다.

백신이나 감염 여부의 증명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비자 형태로 작동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방문하려는 목적지, 사용하려는 항공사, 참여하려는 행사가 요구하는 각각의 기준에 맞춰 앱을 깔고 정보를 입력해야 하는 거다. 뉴욕에서 대형 행사장에 들어가고 싶다면 ‘엑셀시어 패스’를 폰에 다운로드해서 보여줘야 하고, 일부 항공사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만든 ‘트래블 패스’를 설치해야 하는 것이 결국 비자 형태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 존재해도 사회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각 지역과 조직이 각자 방어하는 방식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