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이 뉴욕타임즈에 흥미로운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America, Again the Arsenal of Democracy (미국, 다시 민주주의의 무기고가 되다).' 크루그먼이 칼럼에서 설명하듯 '민주주의의 무기고'는 2차 세계대전 초,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는 유럽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다.

"우리(미국)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무기고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호소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의회의 도움으로 그 유명한 '무기대여법(Lend-Lease Act)'를 통과시켜 영국이 나치의 침공을 버텨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크루그먼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지금과 비교해 설명한다.

1940년의 영국은 2022년의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게 아무도 막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적을 상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영국 공군(Royal Air Force)은 본격적인 영국 침공에 앞서 제공권을 장악하려는 독일 공군(Luftwaffe)의 시도를 무찔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 말, 영국의 상황은 크게 나빠졌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기와 식량, 석유와 같은 필수품을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는데, 국고는 빠르게 바닥나고 있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무기대여법으로 이를 해결했다. 이 법을 통해 미국은 허덕이고 있는 영국에 많은 양의 무기와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다. 전세를 바꿀 만한 원조는 아니었지만 윈스턴 처칠이 버틸 수 있는 자원을 제공했고, 궁극적으로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크루그먼의 칼럼을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 미국과 서방세계, 좀 더 정확하게는 민주주의 진영의 태도 변화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사건

서구, 특히 미국은 민주주의를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민주주의의 전도사, 자유진영의 수호자를 자처해왔지만 자신들의 국익에 적합할 때만 민주주의를 내세웠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의 군사정권들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군사독재를 이어가도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를 막을 수만 있다면 손을 잡고 지원하는 데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인권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막대한 양의 석유와 지정학적 중요성을 갖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의 정권을 지지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나라가 미국이다.

민주주의를 경제적 이해에 따라 선별적으로 적용하는 미국의 태도를 비꼬는 키 앤드 필(Key & Peele)의 에피소드

그런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진보 진영은 자유 민주주의를 이유로 세계 분쟁지역에 미군을 보내고 무기를 수출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물론 매파(Hawks)라 불리는 보수 강경론자들은 양심에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못했지만, 진보적인 정치인들은 끝까지 외교적 해결책을 주장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가령 버락 오바마는 상원시절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며 "나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멍청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이런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고, 대통령이 되어 무력을 사용해야 할 때도 군대를 보내는 ("boots on the ground") 대신 드론을 보내는 쪽을 선호했다.

그랬던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최근 태도를 바꾸게 된 것은 두 가지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올해 2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고, 다른 하나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를 습격한 2021년 1월 6일의 사건이다. 이 두 위협은 푸틴과 트럼프라는 두 인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21세기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외부적 위협과 내부적 위협을 대표하는 존재로, 세계 곳곳에 제2, 제3의 푸틴이 다른 주권국을 침공할 기회를 노리고 있고, 제2, 제3의 트럼프가 자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진보진영이 더 이상 과거처럼 무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꾼 것은 이런 위기의식에서 출발한다.

푸틴과 시진핑이 증명한 오류

최근에 나온 애틀랜틱의 기사 'There Is No Liberal World Order(자유민주주의 세계질서는 없다)'가 대표적인 예다. 애틀랜틱(The Atlantic)은 뉴요커(The New Yorker)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시사주간지인 동시에, 주류 인쇄 매체로서는 최근 가장 강하게 권위주의(authoritarian)를 비판하는 미디어. 트럼프 집권 기간 동안 뉴요커가 특유의 침착함(coolness)을 유지하며 정권을 비판했다면 애틀랜틱의 비판은 열정적이었다.

게다가 애틀랜틱은 트럼프주의(Trumpism)를 단순한 미국적 상황을 넘어선 국제적인 현상으로 해석하고, 이를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틀로 보는 데 다른 진보성향의 매체들(트럼프와 지지자들은 이들을 '주류 미디어'라고 싸잡아 말한다)보다 더 적극적이다. 이런 논조의 글을 애틀랜틱에 싣는 대표적인 사람이 앤 애플바움(Anne Applebaum)이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폴란드계 유대인 집안 출신이고, 폴란드 정치인이자 유럽의회 의원인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와 결혼해 현재 폴란드에 거주하며 애틀랜틱 등에 기고하는 언론인이다. (이런 개인적 배경을 소개하는 것은 애플바움의 정치적 성향을 알고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매체들이 애플바움을 소개할 때도 이런 배경이 언급된다.)

애플바움의 글의 요지는 이거다:

자유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인류가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룰은 누군가 지키도록 요구(enforce, 지키지 않을 경우 제재하는 것을 가리킨다. 경찰을 흔히 law enforcement라고 부른다)하지 않으면 저절로 지켜지는 게 아니고, 끊임없는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기와 병력이 필요하다.

이 글은 1994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있었던 한 장면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당시 에스토니아의 대통령이던 레나르트 메리(Lennart Meri)는 귀빈들이 모인 한 저녁 모임에서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그는 "개개인의 자유, 경제와 교역의 자유, 사상의 자유, 그리고 문화와 과학의 자유는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 연결되어 있다"면서 이런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며, "에스토니아인들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전체주의의 압박 속에서도 이런 자유에 대한 믿음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과거 소련의 일부로 존재해온 발트3국의 하나인 에스토니아가 러시아의 날개 아래에서 벗어나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앤 애플바움과 그의 남편 (출처: 애플바움의 홈페이지)

애플바움에 따르면 메리 대통령의 이 연설을 듣던 귀빈들 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행사가 진행되던 홀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상페테르부르크의 시장이었던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 푸틴은 장황한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나라가 아니며, 단지 러시아의 일부로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푸틴의 이런 생각은 우크라이나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재 서구 유럽 국가들이 나토를 중심으로 단결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돕는 이유는 푸틴의 영토 확장에 대한 야심이 우크라이나에 국한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푸틴은 한 도시의 시장이었을 뿐이고, 서구 국가들은 러시아의 위협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 아니 2000년의 러시아 상황을 기억한다면 서구의 이런 착각이 반드시 실수라고 볼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경제가 석유와 천연가스를 통해 살아나고 푸틴의 권위주의 통치로 '위대한 러시아의 꿈'이 다시 꿈틀거리기 전까지 러시아는 길고 긴 겨울을 겪었다. 그런 러시아의 겨울 동안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안일한 자세로 미래를 낙관했다. 러시아는 결국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돈이 국가경제에 흘러 들어가고,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맛을 보게 되면 시민들은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은 20세기 내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굳게 믿고 있던 명제였다. 서구는 왜 이런 명제를 믿었을까? 애플바움은 서유럽의 성공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유럽의 국가들은 서로를 없애버리려는 전쟁과 영토 확장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고 이를 협상과 협력, 교역과 통상으로 대체했다. 지금의 유럽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이러한 성공 공식은 세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명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애플바움이 한 얘기는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한국과 일본에서 성공한 것도 미국에 비슷한 착시현상을 일으켰다는 지적이 있다. 사담 후세인과 같은 독재정권이 무너지면 그 국가는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로 이행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미국 정부 내에 있었다고 한다.

('무장한 민주주의 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