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OC의 브랜딩 전략
• 댓글 남기기미국 민주당에서 가장 진보적인 진영에 속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AOC)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지지자들이 각종 굿즈(merchandise)를 구매할 수 있는 온라인 매장을 갖추고 있다. 보수 언론에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정치인이 비싼 셔츠를 판다"고 비난하지만,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매장에서 얻어지는 수익은 전액 기부금으로 활용된다. 그렇게 팔리는 제품 중 하나인 아래의 셔츠에는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자(Tax the rich)"는 문구가 적혀있고, 그 아래에는 기울여 그려진 말풍선 안에 'AOC'라는 글자가 적힌 작은 로고가 눈에 띈다.
1989년생으로 현재 31세인 오카시오 코르테즈는 2018년, 뉴욕 14번 선거구에서 민주당 경선에서 10선의 의원을 물리치고 승리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정치인이다. 당선 후에는 대중적 인기와 설득력, 특히 소셜미디어의 활용이 크게 두드러지지만, 무명의 정치인이 10선 의원의 텃밭에서 경선 승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그의 미디어 전략이었다. 특히 'The Courage to Change(바꾸려는 용기)'라는 홍보영상은 그의 선거구를 넘어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영상의 썸네일, 그리고 영상 속 등장하는 캠페인 포스터를 보면 티셔츠에 붙어있는 AOC 로고의 원형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을 비롯해 모든 텍스트가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사선으로 등장하고 있고, 텍스트 색의 반전은 모두 말풍선 형태의 박스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셔츠 속 로고는 포스터의 간결한 버전인 셈이다.
이를 보면서 어떤 디자인 회사가 이 작업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다가 최근 뉴욕타임즈에서 AOC의 포스터와 로고 스타일이 의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약간의 해설과 함께 소개해보려 한다.
하지만 먼저 간략한 배경을 이야기해보면 이렇다. 미국에서 정치인의 아주 기초적인 브랜딩이라 할 수 있는 로고는 대개 비슷하게 생겼다. 기본적으로 국기 색인 빨강과 파랑이 들어가야 하고, 그 외에 국기를 연상시키는 선(바이든-해리스)이나, 별(트럼프-펜스)을 넣는다. 뻔하고 지루해 보이지만 원래 미국의 정치 캠페인은 독창성보다는 안전을 선택해야 한다. 로고가 진부하다고 비난하는 유권자는 없지만 "미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공격은 언제든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2007년에 오바마가 (언젠가부터 미국 정치인들이 항상 가슴에 달고 다니는) 국기 핀을 달지 않았다고 구설수에 오른 일이다. 가뜩이나 미들네임이 "후세인"이라 무슬림이라는 공격을 받았던 오바마는 다른 어떤 정치인보다 이런 공격에 취약했다.
그나마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새롭고 강한, 현대적인 디자인 요소를 실험한 후보가 2008년의 오바마와 2016년의 힐러리 클린턴이다. 오바마의 경우 후보 이름의 머리글자인 O를 이용해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을 모사했는데, 강한 개성과 상징성으로 큰 사랑을 받았고, 힐러리의 경우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비판도 많았지만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다양한 활용일 가능해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최초의 대선 후보 로고"라는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디자인적으로 우수한 이 로고들 역시 빨강과 파랑이라는 국기 요소를 사용하는 안전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AOC 로고의 개성은 바로 이런 전통에서 벗어난 데 있다. 강렬한 노란색을 배경으로 보라색의 텍스트가 튀는 이 포스터를 두고 뉴욕타임즈는 "진보주의의 그래픽 언어"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우선 색을 보자. AOC의 포스터 제작진은 이 색 조합을 유명한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으로 인해 공장의 남성 인력이 부족해지자 여성들이 그 자리를 채워 군수물자의 생산을 담당했는데, 이때 여성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취업을 독려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리벳공 로지'라는 별명이 붙은 포스터다. 팔근육을 자랑하며 "우린 할 수 있어!"를 외치는 이 포스터는 훗날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AOC 선거운동본부는 이 전통을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로지와 달리 AOC는 미소를 머금고 포스터 바깥쪽 상단을 응시하고 있다. 제작진은 이 표정을 미국의 농장 노동운동가 시저 차베즈César Chávez가 등장하는 기념 우표 속 차베즈의 얼굴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차베즈는 멕시코계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일하다가 미국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며 착취당하는 남미계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고, 이제는 초등학생의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큼 전설적인 존재다. 노동자와 빈민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남미계 정치인인 AOC에게 차베즈의 이미지는 아주 적절한 오마주.
AOC는 정치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지인들 사이에서 '샌디(Sand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샌디는 알렉산드리아의 영어식 줄임 표현으로, 미국에 사는 많은 소수인종이 이렇게 영어화(Anglicized)된 이름을 쓴다. 게다가 그가 출마를 결정하고 선거운동을 계획할 때만 해도 디자이너는 남미계 느낌이 강한 풀네임을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단다. 하지만 AOC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남미계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디자인을 요구했다. 위의 포스터에서 Ocasio라는 이름 앞에 뒤집힌 느낌표, 뒤에 느낌표가 들어간 것이 바로 스페인어 문법으로 남미계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느낌표를 넣음으로써 지지자들이 AOC의 이름을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대각선 구도로 등장하는 텍스트와 맞물려 20세기 초 정치 포스터들의 느낌을 살리면서 진보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그런데 AOC의 진보정치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면서 그의 로고와 포스터는 진보계 정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는 것이 뉴욕타임즈의 설명이다. 그리고 다른 정치인들이 재빨리 이 문법을 자신의 로고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AOC의 로고를 가장 적극적으로 따라 하는 사람들은 진보정치인들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AOC의 의석에 도전했던 정치인(미셸 카루소 카브레라)은 패한 후 새로운 자리에 도전하면서 AOC 로고처럼 기울어진 텍스트를 사용했고, 프랑스의 정치인은 아예 AOC 포스터의 모든 요소를 그대로 가져다가 노란색-보라색만 반전해서 자신의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단순히 다른 후보들이 AOC의 로고를 흉내 내는 현상이 아니라, AOC 로고가 미국 정치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법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AOC의 진보 정치가 미국에서 주류로 떠올랐다고 볼 수는 없지만, 너도나도 AOC의 포스터를 흉내 낸다는 것은 미국의 새로운 세대가 과거의 정치 포스터와 완전히 다른 시각언어를 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증(傍證, circumstantial evidence)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미국 정치에서는 금기어가 되다시피 한 사회주의(Socialism)지만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게는 자본주의 보다 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기 시작했다는 보도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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