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해석 ②
• 댓글 남기기데이먼 링커는 이번 선거에서 카멀라 해리스가 채택한 전략은 상식적(reasonable)이었다고 평가한다. 그 전략은 1930년대 파시즘의 봉기에 맞서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진영이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방식이었고, 근래 들어 비슷한 위기에 직면한 이스라엘, 헝가리 등의 국가에서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데 있다. 이번 선거에서 그 전략이 먹힐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민주당과 해리스는 보수가 되었다. 트럼프에 맞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여성 후보가 보수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트럼프의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와 미국의 정부, 제도를 지키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순간, 해리스는 문자적인 의미대로 보수(保守)가 된다. 해리스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 트럼프는 파시즘이 휩쓸던 과거로 회귀하려는 반동(反動)으로 보이지만,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들의 눈에 트럼프는 개혁을 원하는 후보이고, 그런 그로부터 미국의 시스템을 지키려는 해리스는 보수 후보였다.
지난 선거운동 기간 중 미국 언론에는 'change candidate(변화를 가져올 후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이 표현은 미국 정치에서 누구나 탐내는 성배다. 평등하지 않은 세상에서는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현 상태를 유지하고픈 사람들보다 더 많다. 따라서 후보들은 누구나—심지어 레이건 같은 보수 정치인도—변화를 외친다. 두 후보가 모두 변화를 외칠 때는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느냐가 중요한데, 여름을 지나면서 진보적인 언론에서도 "트럼프가 결국 change agent라는 타이틀을 가져간 것 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트 히어는 지난 10월,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지적하는 칼럼을 썼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해리스 선거운동 측에서 리즈 체니를 비롯해 ""부시와 존 매케인, 밋 롬니와 함께 일했던" 200명의 공화당 사람들이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한다고 발표한 것을 보며 놀랐다. 해리스가 자랑스럽게 발표한 지지자들 중에는 부시 행정부에서 검찰총장을 지내며 테러 용의자에 고문을 해도 좋다는 문서를 작성해서 악명 높은 알베르토 곤잘레스(Alberto Gonzales)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곤잘레스처럼 국민적 지탄을 받는 쓸모없는 인물에게서 지지 선언을 받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효용이 있으냐고 개탄했다.
틀린 계산
생각하기에 따라—혹은 어떤 가설을 세우느냐에 따라—공화당원들의 지지를 받는 건 좋은 선택일 수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모두 해리스에게 표를 주고, 한때 공화당의 주류였다가 지금은 주변으로 밀려난 전통적인 공화당원들이 해리스를 지지하면 과반의 득표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지트 히어는 그 계산은 이미 2016년에 틀린 것으로 증명이 되었음을 지적한다. 민주당의 상원 원내대표인 척 슈머(Chuck Schumer)는 당시 선거 때 그 전략을 사용하면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를 한 명 잃는 대신 (펜실베이니아의 대도시) 필라델피아에서 (트럼프에 반대하는) 온건 공화당원 두 명을 얻을 것이다. 같은 방법을 오하이오, 일리노이, 위스컨신주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유권자들이 64%로, 대학졸업자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은 미국에서 작동할 리 만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힐러리 클린턴은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위스컨신주에서 트럼프에 밀렸고, 이 세 곳에서의 패배가 클린턴이 패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런 역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다시 똑같은 셈법을 가져와서 온건 공화당원이 해리스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과거의 패배 공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2016년 트럼프의 승리는 요행(fluke)이고, 아웃라이어일 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0월에 쓴 칼럼에서 지트 히어는 "(조지 부시의 부통령) 딕 체니의 팬클럽으로는 이번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라고 단언하며, 지금이라도 경제적 포퓰리즘을 강하게 내세워야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왜 포퓰리즘일까?
놓친 기회
트럼프의 승리가 분명해진 시점인 지난 6일 새벽, 밤을 새워가며 개표 상황을 보도하던 뉴욕타임즈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2016년의 민주당 경선은 진정한 경쟁이 아니라 그저 힐러리 클린턴을 후보로 만들기 위한 절차였을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리사 레러(Lisa Lerer)기자는 "힐러리 클린턴은 다른 후보를 차단했고, 기부자들을 확보했다"고 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지금은 뉴욕타임즈에서 활동하는 에즈라 클라인(Ezra Klein)이 복스에 있던 시절 2016년 민주당 경선의 문제점을 설명한 기사를 보면 이번 해리스의 패배가 유령처럼 떠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기사에서 클라인은 그해의 경선의 룰이 클린턴에 유리하도록 바뀌었고, 그 결과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후보가 될 수 있었다는 주장을 꼼꼼하게 살펴본다. 민주당은 적자 상태에 있었고, 선거 기부금을 많이 모은 클린턴은 민주당의 적자를 보전해 주는 조건으로 요직 인선을 할 수 있게 요구했다. 게다가 친 클린턴 성향의 민주당 의장인 데비 와서먼 슐츠(Debbie Wasserman Schultz) 의원은 그해 경선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버니 샌더스가 거짓말을 한다고 비판하며 클린턴이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는 내부 이메일을 썼다가 위키리크스(WikiLeaks)에 공개되어 결국 의장에서 사임했다.
클라인 기자는 경선에 부정은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힐러리의 당직자 인선이나, 내부에서 벌어지는 편 가르기는 정당 내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논란이 빚어지는 과정에서 민주당 지지자들과 일반 유권자들은 힐러리 클린턴이 당당하게 경쟁하지 않고, 남편의 대통령 시절부터 만들어진 민주당 엘리트 인맥을 이용해서 후보가 될 수 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특히 그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던 젊은 남성들이 크게 실망했고, 샌더스와 지지층이 제법 많이 겹치는 트럼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힐러리 클린턴이 경선의 룰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바람에 버니 샌더스를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클라인도 지적하듯, 힐러리 클린턴은 어쨌거나 민주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후보였다. 사실 클린턴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경선의 룰을 바꿨다면 그 덕을 가장 크게 본 건 다름 아닌 샌더스였다. 경선 토론회에 참여할 수 있는 후보의 자격 조건(어느 당이나 이 룰은 매 선거마다 달라지고, 당의 필요에 따라 조율된다)를 제한하는 바람에 샌더스의 발언 시간이 길어질 수 있었고, 중앙에 있는 클린턴 옆에서 대립 구도를 통해 유권자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된 거다.
바로 아래와 같은 모습이었다.
위와 같은 장면이 미국의 정치사에서 가지는 함의는 적지 않다.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경선이 깔끔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공화당은 질서정연하게 후보를 선출한 후에는 빠르게 그 후보 뒤에 줄을 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두 당의 스타일이 바뀌고 있다"는 말이 자주 들리기 시작했고, 이를 확인시켜 준 해가 바로 2016년이었다.
민주당 경선 토론회 사진과 공화당 토론회 사진(아래)을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도대체 공화당은 경선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저렇게 많은 후보가 난립하도록 방치했느냐는 조롱이 나왔다. 그런데 실제 토론은 더 가관이었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당시 트럼프는 미국 정치판에서는 들어 본 적 없는 개인 공격—신체 비하, 경멸적인 별명 붙이기 등—을 사용하면서 경선 토론회를 막말 잔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트럼프가 후보가 되었지만, 경선으로 인한 갈등은 심각했다. 패한 후보들은 분노해서 트럼프에 등을 돌리며 공화당은 분열했다. 그에 비하면 힐러리가 승리한 민주당 경선은 그야말로 질서정연했고, 후보가 선출된 즉시 당이 합심해서 클린턴 대통령 만들기에 돌입했다. 20세기 민주당, 공화당의 스타일이 뒤바뀐 것이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 우리는 잘 안다. 소란스럽고 지저분한 경선을 통과한 트럼프가 질서정연한 과정으로 후보가 된 힐러리 클린턴을 누른 것이다. 그런데 2024년 카멀라 해리스는 그렇게 연출된 듯한 경선조차 거치지 않고 바이든에게서 후보직을 물려받았다. 트럼프는 그 과정이 부정이고 불법이라고 요란을 떨었지만, 후보 선출은 당에서 필요에 따라 합의를 통해 하는 것이지, 그걸 다루는 법이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유권자, 지지자들이 '모든 것은 당이 결정한다'는 인상을 받는 걸 피할 수 없었다. 트럼프 시절 하원 민주당을 이끌며 그와 대결했던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은 바이든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일찍 후보직을 사퇴하고 민주당이 제대로 된 열린 경선을 할 수 있었으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라고 아쉬워한다.
마지막 글 '패배의 해석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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