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나운 로펌 ③
• 댓글 남기기ACLU의 앤서니 로메로는 현재 진행 중인 모든 사건의 승리를 장담하지는 않는다. 트럼프가 내린 행정명령 중에서는 재판을 거치고 살아남을 것들이 있을 거다. 하지만 로메로는 적어도 출생시민권을 폐지하려는 트럼프의 시도는 반드시 꺾을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이와 관련해 로메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앞으로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보여준다.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서 만에 하나 ACLU가 패해 트럼프의 행정명령을 무효화하지 못할 경우, ACLU는 이 사건을 상급 법원인 연방 항소법원(Federal Court of Appeals)에 가져가고, 거기에서도 패할 경우 연방 대법원에 가져갈 것이다. 그런데 현재 미국의 대법원은 보수 대법관과 진보 대법관의 비율이 6대3이다. 이런 구도가 이 사건에 불리하지 않을까?
로메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편파적인 보수 대법관이라고 해도 수정 헌법 14조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의 손을 들어줄 사람은 기껏해야 새뮤얼 알리토와 클래런스 토머스 정도에 불과하다. 세 명의 진보 대법관은 물론이고, 나머지 네 명의 보수 대법관들은 지금 연방 대법원에 대해 아주 조금 남은 국민의 신뢰마저 완전히 없애버릴 판결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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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제는 그다음이다. 대법원이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을 내린 후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말을 듣지 않고 트럼프의 행정명령을 계속 이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미국은 헌법적 위기(constitutional crisis)에 빠지게 된다. 이건 기우가 아니다. 현재 ACLU가 내는 소송들은 그가 미국의 헌법과 관행에 위배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리는 명령을 막으려는 것이다. 위법인지 알면서도 그런 명령을 내린다면, 대법원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을 때 트럼프가 그걸 수용한다는 보장이 없다.
법률가에 따라서는 미국이 이미 헌법적 위기에 빠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트럼프가 법원의 판결을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밴스 부통령이 "법원은 행정부의 권력을 통제할 수 없다"라며 삼권분립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위기 신호다.
그렇게 대법원의 판결마저 무시하면 어떤 방법이 남을까? 법원이 내린 결정을 이행하게 만드는 새로운 소송을 하는 것이다. 앤서니 로메로는 ACLU가 그런 방법을 사용했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애리조나주 보안관 조 아파이오(Joe Arpaio)의 경우다. 아파이오 보안관은 애리조나주 매리코파 카운티에서 20년 넘게 보안관으로 활동하면서 히스패닉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단속하고 불법 이민자를 대형 텐트 수용소에 전쟁 포로처럼 감금하는 인권 침해를 저지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특히 남성 수용자들에게 수치심을 일으킬 목적으로 분홍색 내의를 입게 했는데, 이 사실이 화제가 되자 아예 웹사이트까지 만들어 기념품처럼 팔았다.)
이에 ACLU가 나서서 아파이오를 고발했고, 그 결과 2013년에 연방 판사가 아파이오의 가혹한 정책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ACLU의 승리였지만 아파이오는 법원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러자 ACLU는 법원의 결정이 강제적으로 이행되도록 또 다른 소송을 냈고, 아파이오가 법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하게 한 것이다. 로메로는 이 방법을 트럼프 행정부에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대법원이 위헌으로 판결을 내린 후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불법 행위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부통령이든, 대통령이든 상관하지 않고 체포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이 대목에서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을 체포하던 모습을 떠올리는 걸 피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아파이오 보안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법원의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법정 모독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고 선고를 기다리던 2017년, 그해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사면했다. 반이민 정책을 원하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된 트럼프가 지지층에 보내는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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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로메로는 지금은 법정 싸움을 통해 트럼프에 저항해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미국 헌법이 파괴되는 것을 막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한 사람들의 양심(conscience of good people)'이지만, 지금 당장 헌법을 최전방에서 방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선 시위대가 아니라 법원의 판사들이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어떨까? 현재 민주당은 너무나 조용하다. 많은 의원들이 나서서 시위에 동참하고, 일부 의원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국의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현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도, 인물도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가 적법한 절차로 과반의 득표를 해서 대통령이 된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트럼프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그가 선거 운동 중에 이미 예고했던 일이고, 그렇지 않았어도 언론이 예견했던 것들이다. 유권자들이 그걸 알고 트럼프를 선택했고, 그가 공약을 이행한다면,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한 민주당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정치인의 숙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ACLU는 다르다는 게 로메로의 자신감이다. "저는 선거에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대다수의 지지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소송을 제기하는 근거는 국민의 51%가 그 권리를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헌법이 그 권리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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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로메로도 트럼프가 법원의 명령을 무시할 경우 시민의 힘을 동원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력한 여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지금 당장은 트럼프가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수사관들을 동원해 범죄나 불법행위를 저지른 적이 있는 이민자들을 단속, 체포하고 있지만, 그가 약속한대로 "수백만 명의"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려면 결국 평범한 노동자, 이웃을 체포해서 수용, 추방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로메로는 지금 당장 미국인들이 트럼프의 불법 이민자 단속을 환영해도, 자기 이웃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수만 명씩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면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ACLU는 그런 미국인들의 분노를 활용할 생각이다.
로메로는 이미 비슷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다. 그가 ACLU의 디렉터가 된 직후에 일어난 9/11 테러 때다. 당시 미국의 여론은 대테러 전쟁을 지지하고 있었다. 21세기 미국이 인권을 유린한 사례로 크게 비판받는 쿠바 섬의 관타나모만(灣) 수용소는 그런 미국 여론의 용인하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왜 자국 영토가 아닌 쿠바섬에 테러 용의자들을 수용하기로 했을까? 미국은 1903년, 쿠바에게서 관타나모만의 일부를 영구조차해서 해군기지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곳은 미국법 상의 영토(sovereign territory)가 아니다. 미국의 영토라면 미국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용의자를 재판 없이 무한정 구금할 수 없지만, 법적 영토가 아닌 관타나모라면 그런 구금이 미국의 인권법에 저촉되지 않을 뿐 아니라, 미국인 시위대의 접근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 즉, 엄연한 인권 침해임에도 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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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부시 정권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ACLU는 비판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고, 그런 불리한 환경 속에서도 앤서니 로메로는 ACLU의 규모를 두 배 이상 키우고, 활동 범위도 넓혔다. 그는 9/11 이후로 온 국민이 분노한 시절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트럼프 행정부에 반대하는 여론도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고 믿는다.
트럼프는 취임 후 미국인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던 관타나모만의 수용소를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에서 체포한 불법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전에 그곳에 수용하겠다며 텐트촌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178명의 불법 이민자를 수용했다. 이 조치가 알려지자 ACLU는 재빨리 소송을 준비해서 트럼프 행정부를 저지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이 변호사와 접촉이 쉽지 않은 등, 이민자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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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준비하는 중에 트럼프 행정부가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이민자들을 모두 빼내어 베네수엘라로 이송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베네수엘라에 어떤 대가를 약속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ACLU의 소송이 트럼프 행정부에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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