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학교 이야기 ④ 라켈과 조너선
• 댓글 15개 보기그렇게 학교를 나온 멜라니는 그동안 뭘 하면서 지냈을까?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일하면서 뉴욕시에 있는 지역의 작은 칼리지에서 파트타임으로 수업을 듣다가 돈이 떨어지거나 너무 피곤하면 몇 학기를 쉬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생각하면서.
멜라니는 포시 장학금과 미들베리 칼리지 입학에 실패한 후 다른 사립 대학교에 전혀 지원하지 않은 것을 한탄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모든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도 자신이 고등학교를 뛰쳐나오지 않았으면 가령 뉴욕시립대(CUNY)에서 무료로 수업을 들을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기는 힘든 듯했다.
만약 멜라니가 그렇게 모든 기회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아니, 멜라니가 포시 장학금을 받고 좋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미 일어난 일에 이런 가정은 별 의미가 없지만, 포시 장학금을 받는 아이들이 멜라니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아이들이기 때문에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조피월트 기자는 조너선 곤잘레스(Jonathan Gonzales)라는 학생을 찾아냈다. 멜라니가 학교를 떠난 이듬해 멜라니가 그렇게도 원하던 포시 장학금을 받은 남학생이다. 멜라니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멜라니처럼 필드스톤 고등학교와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는 것도 똑같은데, 단지 멜라니와 달리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만 다르다.
그렇다면 조너선은 멜라니가 꿈꾸던 대학생활을 했을까?
라켈과 조너선
조너선의 대학생활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조너선이 어떤 학생이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조피월트 기자를 만난 조너선은 "저는 대학교에 진학하려는 의지가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똑똑하고 대학 진학을 간절히 원하던 멜라니는 실패한 장학금을 받은 학생의 말치고는 너무나 어이가 없지만 조너선의 사연도 간단하지는 않다.
조너선은 브롱스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전형적인 학생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미래는 주말 아침에도 일하러 가는 청소부였다. 바닥을 닦고, 천장의 팬의 먼지를 제거하고, 접시를 닦고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는 삶은 조너선 주변에 익숙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문화에서 부모는 자신이 막노동을 해도 자식만은 대학에 보낸다는 내러티브가 일반적이다. 미국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가난한 집의 부모들, 특히 친척 중에 대학교에 진학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의 부모들이 대학에 진학하려는 아이들에게 "너 같은 애가 무슨 대학이냐? 고등학교 졸업하면 취직해서 돈이나 벌어야지"라고 말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조너선의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었다. 조너선은 신생아 때 친부모가 양육을 포기하면서 위탁가정(foster care, 이렇게 아이들을 길러주는 위탁 서비스를 할 경우 정부의 보조금을 지원받기 때문에 이를 생계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일이 흔하다)에 입양되었다. 어린 조너선을 그렇게 키우던 위탁모는 조너선을 정식으로 입양하면서 양어머니가 되었지만, 그리고 조너선은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조너선에게 잔인한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조너선이 학업을 계속하는데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조너선은 청소년기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곧잘 싸움에 휘말렸다. 이런 조너선을 바꿔놓은 건 그의 여자 친구 라켈 하디(Raquel Hardy)였다. 둘은 열두 살 때부터 친한 친구였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둘은 이성친구로 발전했다. 라켈 역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조너선과 달리 라켈은 공부에서 탈출구를 발견했다. 똑똑한 아이였고, 대학 진학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 라켈은 남자 친구인 조너선에게 대학 진학의 의지를 불어넣었다.
1년 선배인 멜라니가 그랬던 것처럼 라켈과 조너선도 필드스톤 사립고등학교와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라켈에게 필드스톤 방문은 눈이 열리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맥북이 든 가방을 바닥에 팽개쳐두고 다니는 모습에서 '아, 이 아이들은 자유롭구나'라고 생각했고 이는 자신들이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를 깨닫게 해 줬다. 라켈은 멜라니와 같은 캠퍼스를 봤지만 멜라니와 달리 그걸 보게 된 것이 행운이라 생각했다. 자라면서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장면을 보니 큰 동기부여(motivation)가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두 학교 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계획한 교사들이 기대했던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가 라켈이었던 것이다.
조너선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랐고,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부자들은 이렇게 사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았다고 한다. 라켈은 조너선의 그런 태도가 그의 양어머니의 태도를 물려받은 거라 생각했고, 남자 친구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애썼다. 라켈은 조너선이 훌륭한 아이고 훌륭하게 될 사람이라 굳게 믿었다.
조피월트 기자는 커서 청소부가 될 거라고 생각하던 조너선이 대학을 갈 생각을 한 것은 라켈의 덕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필드스톤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니라 여자 친구가 영감을 얻었고, 그 영감을 조너선에게 전해줬기 때문이다. 그 결과, 둘은 함께 포시 장학금에 도전하게 된다. 라켈은 첫 번째 인터뷰에서 탈락했지만 굴하지 않고 많은 대학교에 지원했고 바드 칼리지(Bard College)에 합격했다. 조너선은 포시 장학금을 따냈고,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에 입학했다.
조너선의 악몽
대학 진학을 간절하게 바라던 멜라니와 라켈이 실패한 장학금(과 대학 합격증)을 받은 조너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조너선은 그때 처음 든 생각이 '나 같은 애가 어떻게 이걸 받았지?'였다고 고백했다. 합격 통지를 받은 후부터 대학교 캠퍼스에 도착할 때까지도 스스로 대학에 다닐 자격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에서 첫 학기가 시작되자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서 강의계획서(syllabus)를 받아 든 순간 조너선은 패닉에 빠졌다. 게다가 책을 살 돈도 없었다. 장학금에 따라서는 책값과 생활비의 일부도 지원하는 경우가 있지만 포시 장학금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의 많은 제도와 기관은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경우가 많다. 요구하지 않으면 필요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거나, 굳이 제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지원금이 많다. 이 경우 필요한 사람이 요청하고 요구하면 제공될 가능성이 높다. 돈이 없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고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조너선의 대응이었다.
수업에 대한 공포는 더 심각했다. 조너선의 표현을 빌자면 "필드스톤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조너선이 입학한 것 같은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 문리과 대학)들은 대개 학생 대 교수의 비율이 낮다. 교수 한 명이 12명의 학생과 진행하는 수업에서 발표를 하지 않고 숨을 방법은 없다. 게다가 많은 경우 조너선은 교실에서 유일한 흑인 학생이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수업을 들으면서 '숙제도 해오지 못하는 유일한 학생은 흑인 학생'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되기 싫었고, 그래서 수업에 가지 않았다.
조너선은 그 결과 자신이 '수업에 불참하는 흑인 학생'이라는 또 다른 흑인 스테레오타입이 되었다고 자조한다.
그럼 조너선처럼 좋은 리버럴 아츠 칼리지에 진학한 조너선의 여자 친구 라켈은 어땠을까? 라켈도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다르게 대응했다. 그에게도 수업은 벅찼다. 고등학교 때 A+를 받던 학생에게 B-, C+의 학점을 받게 된 상황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간 아이들은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고 조언을 들을 가족도 없다.
하지만 라켈은 책을 살 수 없으면 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었다. 학교 도서관에도 없으면 도서관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도서관에서 책을 주문해서 읽는 방법도 찾아냈다. 이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라켈은 교내 학생센터(student center)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고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방법을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 친구(라켈의 학교는 뉴욕주, 조너선의 학교는 중서부 일리노이에 있었다)에게 설명해줬다.
그러나 조너선은 몇 달이 지나도록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기숙사에만 머물렀다. 수업에 가서 창피하게 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여자 친구에게는 수업에 참여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결국 조너선은 여러 차례의 학사 경고를 받고 퇴학당한다. 라켈과도 헤어졌다.
그는 "네까짓 게 뭐라고 대학에 가려느냐"라고 했던 자신의 양어머니의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명의 졸업생
조너선은 자신이 자란 브롱스로 돌아와서 다시 양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체육관 프론트 데스크 일을 하며 돈을 번다. 하지만 조너선 같은 아이들은 흔하다. 브롱스의 공립 고등학교를 졸업해 어렵게 좋은 대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줄줄이 학업을 중단하고 나온다. 그나마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이 그렇고, 멜라니처럼 애초에 진학을 포기한 아이들을 포함하면 브롱스의 공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대학을 온전히 마치고 졸업하는 경우는 드물다.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의 교사인 파블로 뮤리엘(멜라니가 찾아갔던 그 선생님)은 자기네 학교 졸업생들에게 이런 좋은 대학교들은 모두 필드스톤 같은 이질적인 환경이라고 설명한다. 필드스톤을 졸업한 학생들은 이런 대학교에 가도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 익숙한 커리큘럼에서 마음껏 공부를 하게 되지만 유니버시티 하이츠 졸업생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라켈은 아주 특별한 경우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브롱스 아이들의 꿈인 중산층 진입에 가장 유리한 고지에 들어간 것이다. 라켈에게도 대학교 졸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이스북에서 보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줄줄이 대학을 중퇴하는 것을 보면서 그 역시 대학을 졸업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에게 "너는 자격이 있어, 너는 자격이 있어"를 되뇌었다고 한다.
문제는 라켈이 특별한 경우라는 바로 그 사실이다. 필드스톤의 아이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중상류층의 위치에서 밀려나지 않지만, 유니버시티 하이츠의 졸업생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중산층 진입에 실패하는 것이다.
조피월트 기자는 보도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처음 소개했던 멜라니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필드스톤 고등학교에 교환학생으로 방문했다가 울부짖는 소동을 벌인, 간절하게 장학금을 원했지만 못 받게 되자 학업을 포기하고 사라져버린 그 학생은 조너선처럼 이런저런 시급을 받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멜라니가 일하는 슈퍼마켓 위에는 럭셔리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한다. 멜라니는 그 아파트 입주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급 노동자인 것이다. 자신이 필드스톤에 가서 부유한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나중에 저 아이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을 하고 살 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기자는 앤젤라 바소스 선생님이 "멜라니는 장학금과 입학허가를 받았다"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며 기사를 마친다:
"앤젤라 선생님이 그렇게 잘못된 기억을 갖게 된 것은 '설마 멜라니처럼 뛰어난 애가 그 장학금을 못 받았을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멜라니와 처음 만나 인터뷰를 한 이후로 종종 전화를 해서 별 일이 없는지 묻는다. 치과에 간 일, 동네 대학(일종의 지역 전문대학에 해당)에서 수업 듣는 얘기 등을 하면서 멜라니에게 다시 큰 기회가 오는 걸 기대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멜라니에게는 10년 동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특유의 병적인 낙관주의로 멜라니의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멜라니에게 다시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특별한 사정이 생겼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멜라니의 상황, 아무런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은 흔한 일이다. (멜라니가 일하는) 슈퍼마켓은 멜라니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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