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니를 오래 추적한 끝에 만나게 된 조피월트 기자는 제일 먼저 10년 전에 필드스톤 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있었던 일을 물어봤다. 바로 그 일에 관한 궁금증이 긴 취재 과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라니는 그 일에 바로 답하지 않고 자신이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일을 먼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멜라니가 필드스톤에서 일으킨 소동을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멜라니는 아주 "똑똑한(smart)" 학생이었다. 그냥 학교 성적만 좋았던 게 아니라 학교를 좋아하는 아이였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만 가면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고, 글도 더 잘 쓰게 되고, 학교 댄스팀에도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다.

이게 고등학교야?

하지만 그런 멜라니의 기대는 고등학교에 등교한 첫날 산산조각 났다. 첫 번째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교내에 구내식당도 없는 학교였을 뿐 아니라, 제공하는 과목도 수준이 낮았다. 이 부분은 한국과 많이 달라서 설명이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가 수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커리큘럼이 다를 수 있다. 똑똑한 아이들이 많고 대학에 가려는 아이들이 많은 고등학교에서는 어려운 과목을 개설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교에서는 아예 어려운 수준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표적인 과목이 수학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아이들이 대학을 포기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어려운 수준의 수학을 개설해봤자 들을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기초 수준의 수학만 가르친다. 물론 낮은 수준의 수학을 공부하고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아주 어렵다. 또 웬만한 수준의 고등학교들에서는 대개 AP(Advanced Placement) 수업이 많이 개설된다. 진도가 빠른 아이들은 고등학교 수준의 과목을 1, 2년 먼저 이수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대학교 수준의 과목을 미리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흔하다 보니 좋은 대학교에서는 AP 수업을 듣고 시험을 통과한 아이들이 지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 (이미지 출처: InsideSchools)

어릴 때부터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공부해온 멜라니가 자신이 입학한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에 AP 수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절망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수학은 더 어처구니없었다. 멜라니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성적에 따라 배정된 수학 수업에는 졸업반 학생들이 있었다. (이는 멜라니의 실력이 우수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학교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런데 학교에는 그다음 단계인 Math B(멜라니의 설명에 따르면 통계나 삼각함수를 배우기 전 단계에 배우는 수업)도 개설되지 않았다. 멜라니는 '농담하자는 건가'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날 필드스톤에서

그런 멜라니가 인근에 있는 사립학교와 펜팔 프로그램에 참여한 건 10학년(미국 4년제 고등학교에서 2년 차에 해당) 때였다. 영어 선생님의 제안에 흔쾌히 참여했고 그곳의 친구들에게 편지로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필드스톤을 방문하는 버스에도 그렇게 올라탔다.

하지만 필드스톤의 아름다운 캠퍼스에 도착하는 순간 멜라니는 충격을 받았다. 우선 입은 옷이 달랐다. 자신은 (당시 유행하던 여성 래퍼인 Charli Baltimore처럼) 빨간색으로 물들인 머리에, 긴 손톱에는 20개가 넘는 색을 칠하고 있었고, 자신을 포함한 유니버시티 하이츠 친구들은 역시 당시에 유행하던 나이키 조던 운동화에 후드티를 입고 있었는데, 필드스톤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차림이었다.

그 차이가 단순히 서로 다른 문화로만 느껴졌을 리는 없다. 두 학교 아이들 모두 누가 돈이 있는 아이들이고 누가 없는 아이들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멜라니는 자신이 "가난한 동네에서 온, 없어 보이는 여자애(a ratchet ass girl from the hood)"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히스패닉과 흑인이 대부분인 자신들과 달리 필드스톤은 백인 아이들로 가득했다.

Charli Baltimore (이미지 출처: Last.fm)

유니버시티 하이츠에서 온 아이들이 전부 비슷한 문화충격을 느꼈겠지만 멜라니가 느낀 감정은 조금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의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 아이들은 그저 놀라움을 느꼈다. 그런 곳을 상상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라니에게 그곳은 자신이 꿈꾸던 학교, 아니 당연히 가게 될 거라 생각했던 그런 학교였다. 멜라니는 자라면서 모든 고등학교가 그런 줄 알았다. TV에서 보던 고등학교는 도서관이 있고, 댄스 스튜디오가 있고, 풋볼 경기가 열리고,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가게 된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는 가난하고 형편없는 학교였다.

멜라니는 필드스톤에서 완전히 다른 세상, 자신이 가고 싶었던 세상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을,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이 그곳을 거니는 장면을 본 것이다. 그 순간 멜라니는 유니버시티 하이츠 고등학교 아이들은 자라서 버거킹과 맥도널드에서 버거를 굽고, 필드스톤 아이들이 자라서 살게 될 고급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주민들이 들어올 때마다 문을 열어서 통과할 때까지 문을 잡고 있을 운명임을 알았다. 이게 자연계의 질서(natural order)이고, 엄연한 현실이며, 자신의 미래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멜라니가 필드스톤에 들어가자마자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 "이건 불공평해! 나는 여기에서 나갈래!"라고 소리를 질렀다.

장학금의 희망

하지만 그런 충격으로 멜라니가 자신이 다니던 학교를 떠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다른 사연이 있었다. 지난 글(두 학교 이야기 ② 멜라니)에서 멜라니가 미들베리 칼리지에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진학하게 되어 있었다는 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기억할 거다. 바로 그 얘기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선생님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멜라니는 그 장학금을 받지 못했고, 그 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다. (미국에는 외부의 기관이 주는 장학금을 받는 것과 특정 대학교의 입학이 연계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선생님이 왜 잘못 기억하고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 조피월트는 흥미로운 설명을 한다. 하지만 그건 마지막 편에서 자세하게 듣기로 하고 우선 멜라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미국의 수많은 장학재단 중에서 포시 재단(Posse Foundation)이라는 곳이 있다. 가난한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장학금을 운영하는 단체다. 그 재단의 웹사이트에 가보면 금방 눈치채겠지만 이런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대개 흑인과 히스패닉계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 중에는 멜라니처럼 대학 진학을 원하지만 단지 고등학교가 좋지 않아서 좋은 대학교들이 요구하는 수업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포시에서는 특정 대학들과 연계해서 이런 아이들에게 전액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재단 웹사이트에 따르면 "뛰어난 리더십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선발해서 훈련시킨다"라고 설명한다.) 포시 재단이 선정한 열 개의 도시에서 아이들이 그렇게 포시 장학금으로 코넬, 다트머스, 미들베리 같은 좋은 사립 대학교에 진학한다.

그런데 포시(posse)라는 이름이 중요하다. 흔히 '패거리'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치안이 빈약하던 서부 개척시대에 범인을 추적하러 떠나는 보안관을 돕기 위해 주민들이 구성한 일종의 자경단(自警團)을 의미한다. 이 장학재단은 특정 대학교에 이런 장학생 여러명을 한 번에 "패거리"로 보낸다. 유복한 아이들로 가득한 사립 대학교의 낯선 캠퍼스 환경에 홀로 떨어져 고군분투하다가 학업을 그만두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여러 명을 함께 보내면 서로 도우며 공부할 수 있고, 필요할 경우 재단의 지원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멜라니는 고등학교에서 바로 이 장학금에 지원했다.

경쟁률은 엄청났고, 여러 차례의 면접이 치러지는 치열한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첫 면접에서 절반이 탈락하고, 두 번째 면접에서 다시 절반이 탈락하는,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과 같은 절차다. 멜라니는 이런 면접을 거치고 최종면접까지 가는 동안 미들베리 칼리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는 바로 그 미들베리 칼리지에서 온 입학사정관들이었다. 25명의 아이들이 이 최종 면접에 참여했고, 그중 10명 만이 선택이 될 것이었다.

멜라니는 그 10명 안에 들지 못했다.

멜라니는 지금도 그때 받은 불합격 통지서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멜라니는 조피 월트 기자에게 자신이 차라리 장학금에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일을 설명하는 멜라니의 말은 번역해서 옮길 수 있지만 울음 섞인 그의 목소리는 (여기에서 30:45 지점)직접 들어봐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차례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이 대목에서 목이 메이고 눈물이 흐른다.

"받으면 너무나 좋은(beautiful) 어떤 것인 건 맞아요. 적어도 그렇게 보였어요. 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 아이들은 정말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죠. 그걸 다 겪은 후에 탈락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왜 못 받았지?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그런 후에 멜라니는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똑똑하다는 게 도대체 뭐지? 다들 내가 똑똑하다고 하는데, 그게 결국 내 환경이 이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똑똑하게 보이는 거 아닌가? 주위에서는 다들 내가 좋은 대학에 갈 거고, 큰 일을 할 거라고 하지만 이 고등학교에서는 통계도 가르치지 않고, AP 수업도 없는데, 도대체 내가 좋은 학교에 간다는 게 현실적인 얘기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멜라니는 더 이상 학교에 남아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사라지기로 한 것이다. 자신에게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하지만 다른 대학교에도 지원할 수 있었을 텐데 아예 학업을 포기하는 멜라니는 너무 성급한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또 다른 생각은 만약 멜라니가 포시 장학금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다. 포시 장학금은 멜라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을까?

이런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학생이 있다. 같은 학교를 나온 조너선(Jonathan)이라는 아이다. 이 아이는 멜라니가 놓친 포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 이 아이의 이야기를 꼭 들어봐야 한다. 내일 발행될 4편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