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은 대법원 ③ 약점의 공략
• 댓글 남기기선을 넘은 대법원 ①에서 미국의 연방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한 이유가 49년 전의 그 판결이 '실체적 적법절차'를 근거로 하고 있었는데, 실체적 적법절차라는 것이 "명백한 오류를 가진" 논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선을 넘은 대법원 ②에서는 미국법에서 프라이버시란 단순히 개인의 사생활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을' 권리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와 결정에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럼 이 두 가지는 어떻게 로 대 웨이드 판결과 엮이게 되었을까? 이를 가장 잘, 그리고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영상이 있다. 바로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Federalist Society)에서 만든 'Roe v. Wade: A Legal History'다.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
이 영상에서 하는 주장을 인용하기 전에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가 어떤 단체인지 간략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 단체는 1982년에 만들어진 법률단체로 보수주의자와 리버태리언(Libertarian, 여기에 좋은 설명이 있다)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고, 이들은 미국의 헌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 그대로 원전주의적(originalist), 원문주의적(textualist) 해석만이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미국 내 200여 개 법대에 지부를 갖고 있으면서 이런 원칙에 충실한 법조인들을 양성하고 있다. 한 보도에 따르면 이렇게 길러진 법률가만 미국 내에 7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더 중요한 건 현재 연방 대법관 아홉 명 중에서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 출신, 혹은 멤버가 무려 여섯 명이라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짐작했겠지만 그 여섯 명이 바로 최근 들어 보수적인 판결을 쏟아내고 있는 보수 대법관들이다. 공화당은 30년 넘게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 출신 판사들만을 집중적으로 대법원에 밀어 넣었다. 트럼프는 2016년 대통령 선거운동 중에 "내가 대통령이 되면 대법관으로 임명할 판사들의 리스트를 갖고 있다"라고 자랑했는데, 그 리스트는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 출신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비밀도 아니었다. 언론에서는 대법원에 공석이 생기면 누가 후보로 지명될지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예측이 빗나가지도 않았다.
그럼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는 보수 기독교인들과 관련이 있을까? 흥미로운 질문이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두 집단이 공식적으로 함께 일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들이 로 대 웨이드 무효화와 관련해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특정 대법관들이 독실한 신자인 것과 별개로) 우연한 협업에 가깝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둘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보수 기독교인들은 항상 성경의 "어느 책 몇 장, 몇 절에 나온 대로"라는 말을 좋아한다. 특히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 마태복음 5장 18절에 나오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는 대목이다. 물론 성경을 조금만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서로 상충하는 내용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거나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건 성경에 있는 구절이다.
이는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가 강조하는 원전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1787년에 작성된 (이후 33개의 수정조항–수정헌법이라고도 부른다–이 만들어졌지만) 이 문서에서 이야기한 것을 있는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오래 전에 만들어진 문서에 나온 말에만 철저하게 의지해서 찾으려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은 두 집단이 공유하는 태도다. (참고로, 미국 헌법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스는 사회가 변하는 것을 고려해 미국의 헌법은 19년마다 한 번씩 개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성경에서도, 미국 헌법에서도 임신 중지(abortion)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헌법에서 언급되지 않은 이슈를 두고 어떻게 "원전주의적" 법해석을 할 수 있을까?
실체적 적법절차
그런데 이 고민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통해 여성들에게 임신을 중지할 헌법적 권리(Constitutional right)가 있다고 판결한 1973년의 대법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럼 그들은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헌법에서 임신 중지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헌법에 있는 다른 조항에서 연장선을 그으면 여성들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그 근거가 수정헌법 14조에서 이야기하는 프라이버시였다. 임신 중지는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purely private matter)인데, 만약 특정 문제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라면 미국 헌법의 일반적인 원칙은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14조 1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제1절 :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한 자 및 그 사법권에 속하게 된 사람 모두가 미국 시민이며 사는 주 시민이다. 어떤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 또는 면책 권한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거나 강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주에도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 없이 개인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 그 사법권 범위에서 개인에 대한 법의 동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1973년에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내린 대법원은 여성이 임신을 중지할 권리가 이 14조에 내포되어(implicit)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에서는 이는 억지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일반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영상도 만들었다. 이들에 따르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프라이버시(권리)를 분석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 조항에 정말로 프라이버시 개념이 존재하는지도 분명하지 않고, 그걸 임신 중지 문제에까지 확대 해석할 수 있는지는 더더욱 의심스럽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내리면서 임신 중지의 권리를 기본권(fundamental right)으로 명시했다.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의 설명에 따르면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 기본권으로 명시된 사안에 대해서는 훨씬 더 엄격한 심사(strict scrutiny)가 요구되기 때문. 따라서 만약 개별 주가 임신 중지를 금지하거나 어렵게 만들려면 압도적으로 충분한(compelling) 이유가 있어야 하고, 이는 사실상 주정부의 개입을 금지한 것이다.
로 대 웨이드(Roe v. Wade)라는 명칭에서 임신 중지를 금지하려는 쪽인 '웨이드'는 이 사건이 올라온 텍사스주의 의견을 대표하는 검사 헨리 웨이드다. 텍사스주가 웨이드를 통해 강조하려던 것 중 하나는 뱃속의 태아도 하나의 생명이며, 텍사스 주정부는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태아가 온전한 인간임(personhood)을 주장하는 법이 없다고 반박하고, 프라이버시라는 권리의 연장선에서 임신 중지의 권리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 글 1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법원이 1965년에 내린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판결을 근거로 사용했다.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판결도 수정헌법 14조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 조항에는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라는 것이 있다. 이 글의 2편에서 설명한 것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인정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개개인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일일이 나열하기에 앞서 법적 권리를 전부 존중하고 시작한다는 것. 따라서 이 중에서 어떤 하나를 제한할 때는 '적법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미국법에서 적법절차에는 흔히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절차적(procedual)인 적법절차이고, 다른 하나는 실체적(substantive) 적법절차다. 전자의 경우는 법이 개인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서는 그 절차의 기일과 내용을 제대로 통지하는 등의 민사절차, 형사절차, 행정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라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후자인 실체적 적법절차는 다르다. 이는 미국 헌법에 존재하는 하나의 원칙으로 기본권과 관련해서는 국가나 주정부가 이를 침해하는 법을 사실상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다수당이 다수결의 힘을 발휘해서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을 만들 경우 그런 법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원칙이다.
이런 실체적 적법절차의 정신은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미국에서 이를 현대적으로 사용된 것은 20세기 중반이다. 로 대 웨이드가 사용한 논리도 이것이다. 수정헌법 14조에 의거해 임신 중지는 여성의 프라이버시, 즉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이고, 이를 침해하는 (텍사스주의 법과 같은) 임신 중지 금지법은 실체적 적법절차를 침해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대법관들이 실체적 적법절차를 판결의 근거로 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권리를 만들어 내는(make things up) 행위라고 꾸준히 비판해왔다. 1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클래런스 토머스 판사가 "그리스월드, 로렌스, 오버게펠처럼 대법원이 실체적 적법절차를 사용한 선례들을 재심사해야 한다. 실체적 적법절차를 근거로 한 판결은 모두 '명백한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런 판결에서 일어난 '실수를 수정'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 얘기다.
(마지막 편 '선을 넘은 대법원 ➃'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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