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발 하라리는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으로 대화를 들었다. 대부분의 인류가 작은 마을, 부족에서 살았던 과거에는 민주주의가 오히려 어렵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마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을 규모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게 우리가 '사피엔스'에서 본 것 같은 하라리 특유의 재해석이다. 그는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바뀐 후에 인류의 수명이 길어지지 않았음을 들면서, 그런 변화로 개인의 삶이 더 나아졌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비슷한 논리를 대화, 혹은 정보 교환에 적용하고 있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하라리는 소유권(ownership)을 예로 든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어느 마을에 사는 아무개가 한 필지의 땅을 갖고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원래는 그걸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그 땅은 아무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땅에 소를 몰고 가거나, 거기에서 자란 열매를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최초의 소유권은 공동체의 합의 이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판다는 건 공동체가 알고 합의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주인이 그 땅을 다른 마을 사람에게 파는 것에 마을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팔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그 마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왕은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일일이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세금을 부과할 방법이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점토판이다.

땅의 소유권 변경을 기록한 고대 바빌론의 점토판. 땅값의 지불 수단으로 청동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출처: Penn Museum)

흔히 볼 수 있는 진흙(점토)으로 만든 판(태블릿)에 누가 어느 필지를 소유했는지 기록하고, 주인이 바뀔 때마다 그 내용을 업데이트하면 멀리 떨어진 제국의 수도에서도 세금을 부과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거래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받을 필요도 사라진다. 단순해 보이는 이 발명은 사회를 바꾸고 문명을 바꾸는 엄청난 혁명이었다. 하라리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도 똑같다고 설명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토판이 종이로 바뀌었고, 종이가 다시 디지털 기록으로 바뀌었을 뿐, 어딘가에 존재하는 문서를 통해 소유권을 증명하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거다.

유발 하라리는 점토판이라는 새로운 정보 기술에서 흥미로운 모순을 발견한다. 점토판은 마을 사람들의 동의 없이도 땅을 거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지만, 동시에 소규모 공동체(커뮤니티)의 힘을 약화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인쇄술로 돌아가 보자. 민주주의의 씨앗은 고대 사회에 이미 뿌려졌지만, 우리에게 익숙한—현대적인 의미의—민주주의가 등장한 건 인쇄술의 등장 이후였다. 왜 그럴까?

하라리는 고대의 민주주의는 마을이나 아테네나 공화정 시대의 로마와 같은 도시 국가의 규모 이상으로 자라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이는 소통 기술의 문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규모는 한 도시를 넘지 못한다. 가령 고대 로마에서 전쟁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려면 많은 시민이 광장에 모여서 서로 다른 연설가/정치인의 주장을 듣고 나서 각 사람이 의견을 나눴는데, 나라가 성장하면서 도시를 넘어 이탈리아반도 전체, 더 나아가 지중해 연안 지역을 장악하는 수준으로 커지자 그런 절차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처음에는 민주주의적인 의사 결정권을 가졌던 나라가 제국이 되면서 중앙집권적 왕정으로 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 하라리식으로 말하면, "대화를 할 수 없으면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얘기다.

117년의 로마 제국 (이미지 출처: Wikipedia)

로마 제국이 가진 모순적인 면은 또 있다. 212년 카라칼라 황제가 제국에 사는 모든 (노예가 아닌) 남성들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한 것이다. 아랍 지역에 살아도, 이베리아반도에 살아도, 유대 지역, 혹은 아프리카에 살아도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남자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얻게 된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치적 발언권을 얻은 건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공화정은 오래전에 끝났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는 카라칼라(본인이 북아프리카 출신이다)가 민주주의나 공화정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위의 지도에 등장하는 거대한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시민이 된 사람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적인 절차, 즉 함께 모여 대화를 하는 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민주주의가 끝난 것이 그런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저 로마 황제들의 결정이었다면, 페르시아, 인도, 중국 같은 다른 지역에서는 왜 민주주의를 볼 수 없었냐는 거다.

더 흥미로운 건 로마가 황제가 지배하는 제정(혹은 독재 체제)으로 돌아선 후에도 로마 사람들은 자기네가 민주주의적인 국가라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하라리에 따르면 이건 완전한 착각은 아닌 것이, 제정이 시작된 후에도 로마의 작은 도시에서는 여전히 투표에 의해서 관료를 선출했고, 이를 위한 선거운동도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79년에 화산 폭발로 파괴된 것으로 유명한 폼페이의 유적을 살펴보면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특정 후보를 추켜세우거나 비방하는 ("도둑이나 술 취한 놈들은 바티아를 지지하니 너도 바티아에 투표해라" 같은 문구) 내용이 등장한다는 거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폼페이의 인구가 고작해야 1만 명을 조금 넘었기 때문이라는 게 하라리의 주장이다.

폼페이 유적에 남아있는 선거 운동 벽 글씨 (이미지 출처: Brewminate)

수백만 명이 투표하는 현대적인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건 신문과 전보, 라디오와 TV 같은 새로운 소통 수단이 등장한 후였다. 민주주의가 도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가 대규모 소통의 제한이었는데, 신문과 같은 새로운 매체(미디어)가 수많은 사람들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따라서 근대 정치에서 신문이 가졌던 힘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다. 대규모 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만들어 준 도구는 대규모 독재에도 유용했다는 사실이다. 러시아를 공산화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소련을 지배하는 자리에 가기 전에 '이스끄라(불꽃)'라는 신문의 편집장이었고,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사회주의 신문의 기자였다. 그 이후로도 현대 정치에 활약한 많은 정치인이 신문사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민주주의 국가와 독재 국가의 차이가 없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

유발 하라리는 독재 체제 중에서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를 구분한다. 권위주의 체제는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고 지배한다. 그 독재자는 로마의 황제처럼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직접 내린다.

하지만 권위주의 체제의 독재자는 개인의 일상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반면, 전체주의는 독재자나 정당이 국민의 삶 전체를 통제하려는 체제다. 전쟁을 시작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큰 결정뿐 아니라, 경제와 사회, 문화 같은 분야에도 관여한다. 각 공장이 어떤 제품을 만들어내고, 그 제품의 가격은 얼마인지, 어떤 책은 출간해도 되고 어떤 책은 안 되는지 등등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게 전체주의라는 게 하라리의 설명이다.

이 설명의 핵심은 고대 문명에서는 전체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하려고 했어도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이미지 출처: Radical Reads)

그리고 그 기술적인 문제는 고대 사회의 민주주의가 도시 규모를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와 같다. 정보 기술의 한계는 민주주의 공간적 성장은 물론이고, 전체주의의 등장을 막은 것이다. 결국 로마와 같은 고대의 제국들은 세금을 걷고 독재자 중심의 통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주민들은—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제국의 특별한 간섭 없이 살 수 있었다.

전체주의가 대규모의 민주주의와 함께 20세기에 등장한 이유는 그 두 체제가 같은 기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 사이에 민주주의적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그 기술은 모스크바에 사는 지도자가 방대한 소련 영토와 위성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통제할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그런 소련의 통제도 현재 이란에서 행해지는 일상 통제에 비하면 원시적인 수준이다. 이란 여성들은 법에 따라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써야 하지만, 자동차를 운전하는 동안에는 벗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란은 중국에서 도입한 감시 카메라와 AI 기술을 활용해 길에 있는 감시 카메라가 히잡을 벗은 운전자를 촬영하고, 그렇게 얻은 이미지를 정부가 가진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해 "범법자"의 신분을 확인한다. 인쇄술의 발전과 신문의 등장이 전체주의가 탄생하는 것을 도왔다면, 이제 AI 기술은 전체주의의 감시 기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제 독재자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 것일까? 유발 하라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AI 기술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하라리도 이에 동의하지만, 그는 AI에 더 취약한 건 민주주의 정부가 아니라 독재 정권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하라리 특유의 시각과 가치관이 등장한다.


'하라리의 이유 있는 걱정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