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의 오즈
• 댓글 3개 보기미국 일리노이주 J.B. 프리츠커(Pritzker) 주지사는 지난달 신년 주의회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치가 독일의 헌법 공화국을 무너뜨리는 데 걸린 시간은 53일 8시간 40분입니다." 그는 지금 일리노이 주민들에게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즉 트럼프 행정부가 하고 있는 일을 가볍게 보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나치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헌법에 근거한 공화국을 무너뜨렸는지 설명한 것이다.
트럼프가 재집권에 성공해서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56일이 되었다. 미국의 국회 의사당은 불타지 않았고, 트럼프는—적어도 아직까지는—미국의 총통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국이 백인 기독교 민족주의(White Christian Nationalism) 국가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느낀다. 다양성과 형평성, 포용성(DEI) 원칙하에서 역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백인들은 트럼프의 집권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백인으로서의 특권이 보장받는다면 트럼프가 영구 집권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트럼프도 그걸 알고 있다. 아래는 그가 자기 소셜 계정에서 "국왕 만세! (LONG LIVE THE KING!)"라고 쓴 것을 백악관 공식 계정이 공유하며 타임지 표지를 흉내 낸 이미지를 첨부한 것이다. (지금은 지웠지만, 많은 사람들이 화면을 캡처해 공유했고, 팩트 체크 기관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농담처럼 아이디어를 던져 보고, 반응이 좋으면 추진하고, 비난이 쏟아지면 '농담 갖고 왜 그렇게 흥분하느냐'는 투로 지나가는 게 트럼프가 항상 사용하는 방법이다. 작년 선거운동 당시 자신의 옛 보좌관들과 보수 헤리티지 재단이 함께 작성하고 러닝메이트 J.D. 밴스가 서문을 쓴 '프로젝트 2025'라는 문서가 공개되었을 때도 트럼프는 "나는 읽어 본 적도 없다"고 잡아뗐지만,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하고 있는 작업은 실제로 그 문서에 등장한 것들이다.
따라서 트럼프가 "공화당이 3선 개헌을 하는 방법을 찾아 볼 수도 있을 것"이라거나, "나를 뽑으면 영원히 투표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할 때는 아무리 농담처럼 던져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월스트리트의 투자자들은 트럼프를 지지하면서도 그가 말하는 관세 정책은 그저 위협이거나 협상 전략 정도로 치부했지만, 트럼프는 이를 정말로—그것도 계속 말을 바꾸는 최악의 방법으로—추진하면서 미국 경제를 예측 불가능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일까? 세계는 트럼프를 얼마나 두려워해야 할까? 이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질문이다. 트럼프는 많은 것을 파괴할 힘을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위협이다. 하지만 트럼프를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 누군가 퍼뜨린 가짜 뉴스를 언론이 팩트 체크를 하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할 경우 그걸 확산하는 효과(=가짜 뉴스 생산자의 의도)가 생기는 것처럼, 우리가 그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그의 의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권위주의 정권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무기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AOC) 의원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괴물(트럼프와 추종자들)은 사람들의 공포를 먹고 삽니다. 우리가 불안해하고 겁을 먹을 때 그걸 영양분으로 삼아 성장합니다. 저는 그걸 주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냉소주의와 무관심, 공포, 혼란, 불안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그런 걸 더 많이 줄수록 이 괴물은 덩치가 더 커집니다.
저는 그런 걸 볼 때마다 '오즈의 마법사' 후반부에 등장하는 마법사 오즈가 생각납니다. 커튼을 열어젖히니 작고, 무능력하고, 겁먹은 남자가 있잖아요? 물론 트럼프는 엄청난 파괴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서울 수 있어요. 게다가 무시하거나 관심을 꺼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위협의 존재를 알고 있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트럼프를 "작고 무능력한" 마법사 오즈에 비유하는 건 너무 지나친 축소는 아닐까?

차분하고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미국 정치를 분석하는 것으로 유명한 에즈라 클라인(Ezra Klein) 뉴욕타임즈 기자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클라인은 지난달 초, "그의 말을 믿지 말라(Don't Believe Him)"라는 제목의 칼럼과 영상을 발행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13분 영상(아래) 전체를 보는 것도 추천하지만, 클라인 주장의 요지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트럼프는 언론이 일일이 다룰 수 없도록 "홍수처럼 쏟아내는(flood the zone)" 전략을 사용한다. 트럼프의 참모들은 뉴스 미디어가 야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데, 미디어는 "멍청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한 번에 하나의 이슈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하루에 세 개를 터뜨리면 언론은 그중 하나를 물고 늘어질 거고,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일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참모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은 이를 '총구 속도(muzzle velocity)'라 부른다. (우리말의 '속사포' 정도에 해당한다.)
에즈라 클라인은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자산은 집중(focus)이라고 한다. "국민은 정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미디어—주류 뉴스 미디어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게 된다. 따라서 많은 발표를 한 번에 쏟아내어 미디어가 동시에 살펴봐야 할 곳이 많아지면 문제에 집중하기 힘들어지고, 속도를 빠르게 하면 여당의 정책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게 된다."
트럼프가 지난 1월에 취임한 후로 사용하고 있는 전략이 바로 그거다. 매일 행정명령를 홍수처럼 쏟아내면서 사람들에게 '미국은 트럼프가 접수했다. 이 정부는 트럼프의 정부다'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미국의 정부는 트럼프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트럼프에게는 거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트럼프가 정부 지출을 멈추라면 멈추고, 트럼프가 출생 시민권(birthright citizenship)을 없애라면 없앨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클라인은 트럼프에 속지 말라고 한다. 트럼프는 2020년에 선거에 패해놓고 결과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자기가 선거의 승자인 척한 사람이다.
미국 대통령은 강한 파워를 갖고 있지만, 왕이 아니다. 헌법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사용 가능한 제한적인 권력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대통령직에 만족하지 않고 왕이 되려 한다.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TV에 등장해서 왕처럼 행동하는 거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미 그가 왕이 되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사람들이 트럼프에게 모든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가 정말로 왕처럼 군림하게 허락하게 된다.
이게 트럼프의 말을 믿으면 안 되는 이유다. 트럼프는 권력을 갖고 있지만, 그 권력은 헌법에 의해 제한된 대통령의 권력이지, 왕의 권력이 아니다. 그는 의회를 습격한 범죄자들을 사면해 줄 수 있는 사면권을 갖고 있고, 전직 관료들—트럼프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관료들—에게서 경호 인력을 빼앗을 수도 있다. 그런 건 대통령의 권한에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헌법을 새로 쓸 수는 없다. 트럼프가 출생 시민권을 없애자 연방 판사—그것도 레이건이 임명한 연방 판사—가 동의할 수 없다고 한 것이나, 또 다른 판사가 예정된 지출을 행정명령으로 취소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 바로 그거다. 트럼프는 그래도 많은 명령을 "총구 속도"로 쏟아낸다. 너무나 많아서 사람들은 각각의 명령과 정책에 분노할 시간도 없다.
클라인은 트럼프가 하는 이런 힘의 과시는 사실 그만한 힘이 없는 현실을 숨기려는 시도라고 설명한다. 트럼프가 내린 명령은 법원의 판결을 통해 힘을 잃기 쉽고, 그럴 위험이 있을 경우 명령을 취소하기도 한다. 게다가 지금(이 글이 나온 2월 초 시점) 트럼프의 지지율은 47%로, 바이든이 취임한 직후인 2021년에 비해 10%나 낮다. 그는 국민의 충분한 지지 없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트럼프가 이런 정책을 의회를 통해 법으로 만드는 대신 행정명령을 통해 진행하는 이유를 봐야 한다. 힘이 있는 행정부라면 의회를 설득해서 지출을 줄이거나, 공무원의 수를 줄이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법제화해야 쉽게 되돌릴 수 없는 진정한 변화가 된다. 하지만 현재 공화당은 상원과 하원 모두 단 3석의 우위에 불과하다. 지금 트럼프가 내리는 행정명령을 의회에 가져가면 대부분 하원에서 통과가 힘들고, 상원에서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저지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일이 생기면 트럼프는 힘이 없어 보이게 되는데, 트럼프는 자기가 약해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트럼프는 1기 때 오바마케어를 없애려고 하다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존 매케인(John McCain)의 반대표로 실패했던 수모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그런 일이 반복되는 걸 꺼린다.
에즈라 클라인은 행정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클라인은 그에게 "트럼프가 할 경우 가장 걱정되는 일이 뭐냐"고 물었단다. 그의 답은 "트럼프가 일을 천천히 하는 상황이 가장 걱정된다"는 거였다. 만약 트럼프가 자기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을 차근차근 실행하면서 임기를 시작하면 야당과 반대자들은 혼란에 빠지고 약해 보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트럼프가 그렇게 조용히 인기 있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힘을 축적하면 2년 후 중간선거에서 승리할 것이고, 국민의 눈에 띄지 않게 일하면 대통령의 권한을 확장하고, 정부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물론 트럼프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총구 속도'로 쏘아대는 중이다. 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하다 보면 결국 무리하게 되는 걸 피하기 힘들다. 끊임없이 빠르게 명령을 쏟아내면 결국 반대과 소송에 부딪혀 자신들도 감당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법원과 부딪혀 헌법적 위기(constitutional crisis)를 만들어 내거나, 약점을 드러내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트럼프는 대통령처럼 통치하기에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왕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힘이 없는 현실을 숨기기 위해 힘이 있는 척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정말로 힘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면 트럼프는 정말로 왕처럼 군림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그렇게 믿을 경우에만 그렇다.
그게 그의 말을 믿으면 안 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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