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변화
• 댓글 14개 보기나는 요즘 한국에 와서 지인들에게서 미술관,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추천받아 찾아다닌다. 오늘은 그중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독립된 전시가 아니라 미술관에서 상영하는 다큐멘터리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MMCA Seoul) 내에 있는 영상관에서 3주 동안,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일주일에 3, 4일만 볼 수 있는 '화이트 볼스 온 월스(White Balls on Walls).' 앞으로 3일의 기회가 더 있다.
상영 시간과 기간만 제한적인 게 아니라, 상영관의 위치가 여기 하나라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수도권 거주자로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이 작품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물론 나의 게으름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생각해 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런 작품을 소개했다는 것만으로도 큐레이터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다만, 영어 자막을 참을 수 있다면 이 작품을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글 끝에 소개)
이 다큐멘터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시립미술관이 변화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스테델레이크 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 미술관은, 반고흐 미술관, 렘브란트의 '야경꾼'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국립미술관(Rijksmuseum)과 함께 암스테르담 남쪽에 모여있다. 스테델레이크는 이곳에 있는 3대 미술관 중에서 현대(contemporary, 동시대) 미술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거나, 유명한 작품을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다른 두 미술관이 이미 전 세계에서 많은 관람객을 끌어들이며 상대적으로 "안전한" 운영을 할 수 있는 반면, 스테델레이크은—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을 포함한 많은 현대 미술관들이 그렇듯—자기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힘든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암스테르담의 부시장이 2019년,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의 관장을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투리아 멜리아니(Touria Meliani)라는 이 부시장은 암스테르담의 웹사이트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예술과 문화, 이벤트, 포함과 차별금지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부시장은 이제 막 관장에 취임한 렌 울프스(Rein Wolfs)를 그냥 인사차 찾아온 게 아니다. 암스테르담시의 정책을 알리고, 스테델레이크 미술관도 시가 마련한 새로운 정책에 따라야 한다는 말을 하러 온 거다.
그가 관장에게 강조한 정책은 바로 포함(inclusion)와 차별금지(anti-discrimination)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이 좀 더 다양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더 쉽게 말하면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관 문화를 바꾸라는 말을 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그걸 전달하는 장면(아래 사진)을 언뜻 보면 그 압박의 강도를 눈치채기 쉽지 않다. 워낙 차분하고 조용한 작품이라서 처음에는 모르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블랙코미디, 혹은 부조리극 비슷한 톤을 갖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희미한 미소를 띄면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오가는 내용은 검투사들의 대결과 다르지 않다.
이 장면에서 칼자루(예산 편성권)는 부시장이 쥐고 있다.
이 작품이 블랙코미디처럼 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편집이다. 진심을 드러내지 않은 예의 있는 대화를 보여 준 후에 두 사람을 따로 불러내어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게 하는 편집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미국의 인기 코미디 '오피스(The Office)'가 크게 유행시킨 방식이기도 하다. 멜리아니 부시장은 미술관장과의 대화 후에 따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뉴욕시 같은 곳에서는 미술관에 다양성을 늘리라며 목표치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1년 이내에 달성하지 못하면 이듬해 예산을 10% 깎는다"라며,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조직 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내가 칼을 빼지 않고 좋게 말할 때 바꾸라'는 얘기다. 신임 관장은 그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즉시 큐레이터들을 모아 미술관 운영 회의를 연다. 그리고 그렇게 한 자리에 모인 12명의 운영진은 100% 백인이다. 다큐멘터리이지만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는 게 바로 이런 장면이다. 이 장면(아래 사진)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나오는데, 이게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려고 의도한 건지, 아니면 참담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부조리극처럼 둘 다를 의도했을 것 같다. 물론 이건 전혀 연출하지 않은, 엄연한 다큐멘터리다.
다양성이라는 단어조차 분명하게 정의하지 못하는 백인들이 모여서 미술관의 다양성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하는 장면은 어색할 수는 있지만, 절대 우스운 장면이 아니다. 미국에서 온 "젠더 다양성(gender diversity)"이라는 표현을 영어 그대로 사용할 만큼 아직 네덜란드 문화에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 개념을 논의하는 이들은 진지하다. 이렇게 부시장의 지시를 받은 후, 아무것도 모르는 단계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전시를 구성하고, 이를 관객과 평론가들에게서 평가받는 과정을 모두 담은 게 이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 '화이트 볼스 온 월스(White Balls on Walls)'는 한국어로 그대로 옮기면 "벽에 걸린 하얀 불알들"이라는, 도발적인 욕설이다. 여기에서 하얀(white) 는 백인이고, 불알(balls)은 남성 예술가의 작품을 의미한다. 1995년 이 미술관 앞에서 열린, 여성 예술가들의 게릴라걸즈(Guerilla Girls) 시위 때 나온 구호를 가져온 것으로, 당시 시위 사진(아래)을 보면 이 미술관에 걸린 작품 중 1%만이 여성 아티스트의 작품이고, 백인이 아닌 아티스트의 작품은 0%이고, 99%가 미국 백인 남성의 시각을 대변한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25년이 지난 지금은? 전체 작품의 4%만이 여성 아티스트의 작품이라는 게 울프스 관장의 평가다.
결국 스테델레이크같은 서구 유명 미술관은 인류의 10%에 불과한 백인 남성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장소라는 게 이들의 엄정한 평가다. 인류의 90%가 이들의 눈에 객체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우리는 그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이런 상황의 부조리함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지적되어 왔지만 아주 최근까지—정확하게는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살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사실상 변하지 않고 있다가, 드디어 변화의 급물살을 맞게 된 것이다.
문제는 변화의 방법과 그 과정이다. 세상에 자연스러운 사회 변화라는 건 없다. 모든 변화는 변하지 않으려는 대중에게 어색하고, 억지스럽고, 불편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익숙한 환경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그 환경이 자기에게 유리할 수록 관성의 힘은 더 강하다. 이들을 상대로 변화를 끌어내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많은 구성원의 불만을 유발하고,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회적인 변화가 시도될 때는 사회는 대개 두 개의 내러티브 중 하나를 선택한다. '모두가 함께 하는 아름다운 변화'라는 캠페인, 혹은 '이러다가 사회가 무너진다'라는 경고와 반발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는 그렇게 극단적인 길을 따르지 않는다. 구성원들은 조용히 불만을 터뜨리고, 갈등이 빚어지지만 조직은 무너지지 않고, 변화는 일어난다. 하지만 변화를 끌어냈다고 해서 그 과정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령,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서는 전시 연구 책임자로 흑인 남성을 새로 임명한다. 남자라곤 백인 밖에 없던 곳에 들어온 샬 랜드브루그드(Charl Landvreugd)는 남미 수리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네덜란드로 이주해 자란 사람이다. 영국의 골드스미스(Goldsmith)와 미국 컬럼비아(Columbia)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런던의 왕립예술원(Royal College of Ar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최고의 인재이고 지금 스테델레이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완벽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뽑혔다고 생각하는 일부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는 별도의 인터뷰에서 "나는 최고의 학교들에서 엄청난 노력을 통해 미술을 공부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지, 흑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항변하지만, 그걸 미술관 회의 때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을 인종주의자로 치부하는 공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시선이 있음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다른 두 사람과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는 회의를 하면서 "그런데 남자 세 명이 모여서 이 회의를 하고 있군요"라면서 어색하게 웃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등장하는 인물도 그걸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여성 아티스트를 포함하는 문제도 그렇다. 많은 미술관이 그렇듯, 스테델레이크에도 많은 여성 큐레이터가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남성 아티스트들이 대부분인 교과서를 읽고, 남성들의 작품으로 가득한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남성 교수들에게서 배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여성을 더 많이 포함해야 한다는 미션은 분명하게 인식하면서도 더 유명하고 잘 알려진 작품 대신 덜 알려진—미술관 수장고에서 힘겹게 여성의 작품을 하나 찾아내는데,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이 그걸 가지고 있다는 기록도 없다—작품을 전시에 넣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하게 된다.
자기가 받은 교육이 남성 아티스트 중심의 교육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이 큐레이터의 고민은 스테델레이크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전시 공간이 무한하다면 모르겠지만, 제한된 공간에서 다양성을 높인다는 것은 단순히 '포함'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특정 작품을 '배제'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배제되는 작품은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나 에밀 놀데(Emil Nolder)와 같은 유명 남성 아티스트들의 그림들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키르히너와 놀데 같은 화가들이 얼마나 인종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이었는지, 그리고 소아성애적인 작품을 많이 그렸는지 이야기하게 된다.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이 벌거벗고 춤을 추는 모습을 그리고, 나이 든 남성이 어린 여자 아이의 누드를—대개는 가난한 아이들이 모델이 되었다—그린 작품들이 단지 그들이 유명하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전시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들이 유명해진 이유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이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그들의 작품을 선택해서 전시하고, 남성 비평가들이 찬양했기 때문 아닌가?
'화이트 볼스 온 월스'는 이런 고민이 등장인물들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가 뛰어난 건 결론을 내리지 않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documentary)는 그 이름처럼 말 그대로 기록이어야 한다. 물론 관객은 다큐멘터리에서 분명한 관점을 보기 원하고, 결론은 아니어도 일종의 완결감(closure)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런 게 전혀 없이 순전히 기록만 한다면 가공하지 않은 기록(raw footage)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다큐멘터리가 결론을 내리고 시작하고, 감동과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효과(가령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를 동원한다. 이런 다큐멘터리는 그냥 삼키기만 하면 되는 이유식과 같아서 관객은 내용을 곱씹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게 된다. 온갖 효과의 도움을 받은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달콤한 결론을 삼키기만 하면 되는 다큐멘터리와 초반에는 단조로움에 졸음을 참아가며 지켜보다가 문제를 스스로 인식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 중에서 '화이트 볼스 온 월스'는 후자에 속한다.
이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대단한 반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걸 소개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재미를 반감시키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결말도, 서글픈 결말도 아니다.
사실 세상일이라는 게 대개 그렇다. 🦦
이 작품은 '애플TV 플러스'(미국 계정)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빌리거나 구매할 수 있다. 아마존 프라임이 조금 더 싸다. (정정: 둘 다 한국 계정으로는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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