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수하일 샤힌 ①, 편에 이어 SBS 김수형 기자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기의 경험담을 옮긴 것입니다. 트럼프 정권의 후기와 미국 팬데믹 대처의 혼란, 그리고 정권 교체에 이르는 가장 뜨거웠던 시기에 미국 정치의 한 가운데서 직접 목격하고 취재한 이야기를 오터레터 독자들에게 전해드리기 위해 연재를 부탁드렸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10월에 출간 예정인 책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책이 출간되면 따로 소개하겠습니다.


2019년부터 임기를 시작한 특파원들은 우스갯소리로 1백 년 만의 팬데믹과 2백 년 만의 의회 폭동을 모두 겪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만큼 역사에 남을 큰 사건을 많이 겪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미국의 코로나 팬데믹은 요란한 면이 있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방역 지휘는 갈팡질팡했고, 대통령 선거까지 거치면서 보건 정책이 극도로 정치화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코로나 방역 정책을 일선에서 진두지휘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앤서니 파우치(Anthony Fauci) 백악관 수석의료 보좌관이었다. 코로나가 낳은 미국의 방역 스타로 '과학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는 '나치'라는 극단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 인물이었다.

앤서니 파우치 박사 (이미지 출처: Politico)

그의 설명과 전망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졌고, 코로나 국면을 미국에서 보냈던 기자 입장에서는 꼭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특히 백악관 브리핑은 물론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접했던 파우치 박사는 목소리만 들어도 컨디션이 어떤지 아는 수준이 됐다. 파우치 박사 인터뷰에 무려 2년 넘는 섭외 기간을 거치면서 취재하기 어려운 인물에게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다. 이번 편은 미국 전염병 대응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파우치 박사에 대한 설명과 지난 5월, 그와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의 일을 담았다.

미국 감염병 대응의 산증인

파우치 박사는 한국에는 코로나 사태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의 활약은 1980년대 미국의 AIDS, HIV 유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IDS에 대한 공포감으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독버섯처럼 퍼져나가던 시절, 젊은 나이로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를 이끌고 있던 파우치 박사는 AIDS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AIDS 환자와 일상적인 접촉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는, 지금 보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그는 수많은 방송에 출연해 미국인들에게 설명했다. 그의 1980년 대 AIDS 강연 영상이 유튜브에 꽤 있는데, 지금 들어봐도 정말 쉽고 간단하게 이 전염병의 실체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당시 AIDS 연구에 올인한 것은 경력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워낙 미지의 신종 감염병이어서 그가 제출한 AIDS 관련 첫 연구 보고서는 학술지에서 너무 과민 반응하는 내용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는 그때부터 행정, 연구, 치료를 모두 저글링 하듯이 병행하는 엄청난 일 중독자였다.

HIV AIDS 방역 최전선에서 뛰던 시절의 파우치 박사 (이미지 출처: ABC 뉴스)

당시 파우치 박사는 AIDS 인권 단체의 주요 공격 표적이었다. AIDS 환자들은 면역력이 떨어져 여러 질병으로 후유증을 앓다가 처참하게 숨지는 경우가 많았다. 치명률이 워낙 높아 걸리면 죽는다는 공포가 미전역을 휘감고 있었다. 이렇게 한 해 수 만 명씩 숨지는 사람이 나오는데도 미국 정부가 치료제 개발에 미온적이라는 것이 인권 단체들의 불만이었다. 유명한 AIDS 인권 운동가 래리 크레이머(Larry Kramer)는 파우치 박사에 대해 '멍청한 살인자'라는 극언을 담은 공개편지를 썼다.

하지만 파우치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인권 단체들과도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기관장인 그가 직접 인권 단체들과 계속 만나고 그들의 의견을 들었고, 치료제 임상 시험 설계 과정에도 인권단체들의 의견을 일부 수용했다. 1990년에는 인권 단체 회원들이 메릴랜드에 있는 국립보건원(NIH) 건물을 점거하려고 시도했는데, 건물을 기어 올라갔다가 체포된 활동가를 파우치 박사가 보고 뛰어나와 “이 사람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경찰에게 부탁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들으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극단적인 비난을 했던 크레이머는 파우치와 절친이 됐고, 사망하기 전까지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AIDS 인권 단체들은 지금도 파우치를 은인처럼 기억하고 있다. 파우치가 금과옥조처럼 생각한다는 문장은 영화 대부에 나오는 대사였다. 'It's not personal. It's strictly buiness'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사적인 감정으로 대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실용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대화를 진전시켜왔다.

ACT UP이라는 단체를 이끌던 래리 크레이머는 파우치에 대한 공격의 최전선에 섰다가 훗날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고, 파우치 박사의 치료를 받기도 했다. 2020년 크레이머가 사망했을 때 나온 언론 보도

파우치 박사는 전염병의 공포를 어떻게 다루는지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6년 에볼라 바이러스 환자인 니나 팜의 퇴원식 장면이었다. 그는 간호사였던 에볼라 감염 환자를 직접 치료해 퇴원식까지 열어줬는데,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던 에볼라로부터 환자가 해방됐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퇴원식에서 그녀를 와락 안아줬다. 에볼라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해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쇼맨십이었다. 코로나 백신이 처음 나왔을 때도 그는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백신을 접종했다. 만약 파우치가 코로나 백신을 공개적으로 맞지 않았다면, 미국에서 코로나 접종률은 지금보다 현저하게 떨어졌을 수도 있다.

파우치는 1984년부터 국립 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장을 역임하고 있는데, 사실 임기도 없이 자신이 은퇴를 선언할 때까지 일을 하는 미국 전문가 제도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준 경우이다. (물론 이런 종신 시스템에 대한 비판도 많다) 공무원들이 자신의 임기 안에 일을 피하기 위해 복지부동한다는 비판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파우치는 감염병은 무엇이든, 언제 하더라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래 일하고 싶어서 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의 상급 기관인 국립보건원 NIH 원장 자리를 여러 차례 고사한 바 있다. 파우치 박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public servant'라고 자주 표현해왔다. 올해 81세인 그는 미국 감염병 대응의 산증인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만약 돈에 관심이 있었다면, 적당한 시기에 은퇴해서 제약회사에 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과학의 목소리가 되다

이런 파우치 박사가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나면서 인생의 행보가 다소 드라마틱해졌다. 물론 감염병 전문가로서 역할의 큰 차이는 없지만, 그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트럼프가 만들어놓은 정치의 링 한복판에 발을 내딛게 됐다. 지난 2020년 3월 13일, 미국이 코로나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락다운 상태로 들어갔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락다운을 한 번도 해보지는 않았지만, 당시 미국은 사회의 분위기가 대단히 살벌했다. 사재기가 일어나면서 마트에 물건이 동나고, 야간 통행금지까지 내려지면서 이동을 극단적으로 금지시켰다. 백신도 없고 약도 없는 답답한 상황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말라리아약(클로로퀸)이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며 근거 없는 기대감을 부풀리는 발언을 이어갔다. 이 때문에 비슷한 이름의 하이드록시클로로퀸성분이 들어 있는 어항 청소용 세정제를 먹고 사망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당시 매일 열리던 백악관 코로나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말라리아 약 예찬론을 이어갔는데, 그때 파우치 박사는 질문을 받고 "그렇지 않다, 말라리아 약은 코로나 치료가 가능한지 제대로 임상 시험을 하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버렸다. 당시 CDC 국장, FDA 국장, 공중보건서비스단장 등 모두 트럼프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오로지 파우치만 과학에 근거한 얘기를 했었다. 그를 미국 언론들은 'America's voice of scienc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Top health expert appears to do face palm after Trump mentioned ‘deep state’ during coronavirus briefing
Nation’s leading health expert seemingly reacts to president’s bizarre attacks during Covid-19 update
트럼프의 아무 말 대잔치를 그의 뒤에서 들으면서 이마를 짚은 파우치의 모습은 큰 화제가 되었다. 

코로나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트럼프의 아무 말 대잔치가 점점 더 심해졌는데, 연단 뒤에 선 파우치가 이마를 손으로 짚고 난감해하는 사진은 트럼프 시대 코로나의 상징이 돼 버렸다. 파우치에 대한 언론의 의존도는 더욱 커졌고, 트럼프는 그런 파우치를 대놓고 질투했다. 나중에는 파우치가 많은 실수를 했다며 공개 저격하며, 그를 자신의 재선을 반대하는 좌파 진영의 인사로 몰아세웠다. 이 때문에 내용을 잘 모르는 트럼프 지지자들은 파우치가 자유를 억압하려고 하는 나치쯤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그가 바이든 정부에서도 수석 의료 보좌관으로 더 큰 권한을 가지고 방역 정책을 설계하면서 다소 행정가적인 모습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는 감염병의 역사는 물론 코로나 대응의 모든 의사 결정 과정을 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내놓는 반응과 전망은 대중이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가장 최적화된 대응을 조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년 만에 잡힌 인터뷰 일정

메일함을 뒤져보니 파우치 박사와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이메일을 처음 보낸 게 2020년 4월 1일이었다. 이메일을 보냈더니 바로 바쁘다는 내용의 두 줄로 된 자동 응답 메일이 날아왔다. (My work with the Coronavirus Task Force and the large volume of incoming emails precludes me or my staff from answering each individual message.  I would encourage you to visit www.coronavirus.gov. for the latest information and guidance related to COVID-19.) 전화를 걸면 자동 응답 전화로 연결되는 것과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자동 응답 메일이 올 거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답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생각날 때마다 이메일을 보냈다. 국립 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에서 공보를 담당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을 구글링해가며 개인 이메일까지 찾아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메일을 또 보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실제 파우치 박사의 일정 담당하는 비서관과 접촉할 수 있었다. 파우치 박사는 한국 언론의 접촉 시도를 흥미 있게 받아들였다. 기회가 닿는다면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의사는 비서관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트럼프 시기의 한국은 코로나 팬데믹 대응에 있어서 미국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통했다. 특히 한국과 미국은 첫 번째 코로나 확진자가 같은 날 나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과가 너무나 극명하게 엇갈렸기 때문에 트럼프 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미국 언론들은 한국을 더 자주 거론하기도 했다. 2020년 4월, 진단 검사를 한국과 비교하면서 질문하는 기자의 말에 기분이 상한 트럼프가 기자회견을 하다가 접어버리고 퇴장하는 일까지 있었다. 파우치 박사는 미국 언론들의 비교 때문에 사태 초기부터 한국 사례를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도 여러 차례 언론에 나와서 설명하곤 했다. 그가 한국 사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한국에 주는 조언을 더욱 취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파우치 박사의 최우선 관심사는 미국의 코로나 급한 불을 끄는데 맞춰져 있었다. 외신들은 아무래도 우선 인터뷰 대상 매체는 아니었다. 그래도 가끔 같은 영국의 유력 매체들과는 인터뷰하는 걸 기사로 접할 수 있었다. 물론 인터뷰를 잡아보자고 실제 몇 차례 조율을 했었다. 날짜까지 조율하는 단계에 갔지만, 갑자기 코로나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곤 했다. 백악관 코로나 브리핑이 매일 가동되는 급박한 상황이 펼쳐지면 인터뷰 진행은 없던 일이 되곤 했다. 그게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기자로 느꼈던 비애이자 답답함이기도 했다.

팬데믹 기간, 특히 초기에 파우치 박사는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달리기를 통한 건강관리가 그 비결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임기 말이 가까워오면서 정말 귀국 인사를 미리한다는 생각으로 일정 담당 비서관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지내면서 그는 코로나 팬데믹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줬던 은인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비서관은 "당신이 돌아가기 전까지 인터뷰를 해보자"고 답을 보내왔다. 그리고는 넉넉하게 날짜를 미리 잡아 시간 약속을 잡고 줌 예약 링크까지 미리 받아갔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인터뷰가 성사되리라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마침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에 파우치가 불참하고, 무더기 확진자가 나오면서 또 파우치 박사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예정됐던 시간에 나타났다.  2년이 넘는 섭외 기간을 거쳐 파우치 박사와 인터뷰가 성사됐던 것이다.

실제 인터뷰 진행은 백악관 담당 직원이 맡았는데, 인터뷰 시간을 20분으로 지켜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하지만 사전 녹화로 인터뷰를 진행하다보면 시간을 딱 맞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최대한 시간을 엄수하겠다고 했지만, 질문할 것이 워낙 많았고 예정 시간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실제 인터뷰 중간에 직원 누군가가 인터뷰 시간이 됐다고 말을 했지만, 파우치 박사가 그 직원을 손으로 막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질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직원에게 얘기했다. 사실 인터뷰이가 이렇게 반응한다면 기자는 더 기운이 날 수밖에 없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 최선을 다해서 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의 문답은 다음 팬데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겨들을 부분이 많았다. 새로운 변이로 코로나가 재확산되는 추세에 있지만, 그가 전망한 팬데믹의 미래는 그런 재확산까지 염두에 둔 내용이었다.

('워싱턴 특파원의 기록: 파우치가 응답했다 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