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신호
• 댓글 남기기가정폭력과 관련한 유명한 시가 있다. 폴레트 켈리라는 여성이 쓴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I got flowers today)'라는 시다. 이 시에는 여성이 특별한 기념일도 아닌데 남자에게서 꽃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한글 번역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짐작할 수 있듯 아내를 폭행한 남편이 미안하다며 가져다주는 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마침내 중요한 기념일이 되어 꽃을 받게 된다.
자신의 장례식이다.
많은 사람이 한 번쯤 읽어봤을 이 시를 오늘 다시 읽다가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두 번째 연에 등장하는 "지난 밤 그는 저를 벽에 밀어붙이고 제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Last night, he threw me into a wall and started to choke me)"라는 대목이다. 이 시는 남편의 언어폭력(1연)으로 시작해서, 2연에서 물리적인 폭력이 시작되고, 3연에서 폭력이 심해지고, 4연에서 화자가 죽임을 당하는 점증법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남편이 처음 사용한 폭력이 바로 목 조르기(choking)였다. 시인은 그냥 다양한 형태의 폭력 중 하나로 목 조르기를 선택했을까?
갑자기 이 시를 다시 찾아 읽게 된 이유는 신문 기사를 읽다가 발견한 구절 때문이다. 뉴욕타임즈에 실린 "The Woman on the Bridge (다리 위의 여자)"라는 이 기사는 동거남에게서 몇 년 동안 폭행을 당해온 여성이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5년 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경찰과 검찰을 이 여성을 도우려고 애썼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난 이 사건을 두고 뉴욕타임즈는 미국 사회가 가정폭력(domestic violence라고 부르고, 반드시 결혼한 가정만을 가리키지 않는다)에 접근하는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본다. (하지만 기사를 읽다 보면 한국에 비해 훨씬 더 피해자 중심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기사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기사 속 남성이 동거녀의 목을 조른 적이 있음을 시인했는데 "가정폭력 전문가들은 목 조르기가 위험이 커질 것을 보여주는 경고신호라고 본다 (domestic violence experts view choking as a predictor of mounting danger)." 그리고 그 문장에는 한 논문의 하이퍼링크가 들어있었다.
바로 이 논문이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이 논문에 따르면 피해자를 죽이지 않았어도("non-fatal") 여성의 목을 조르는 행위는 가해자의 폭력이 계속해서 더 커질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위험요인이라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고 한다. 여성을 무력으로 통제하려는 행위(abused controls) 중 10%에서 여성의 목을 조른 폭력이 발생했는데, 가정폭력을 통한 살인미수에서는 45%, 가정폭력 살인에서는 43%가 목 조르기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중요한 건 가정폭력을 행사한 남성이 살인할 의도가 없었어도 여성의 목을 조른 적이 있는 경우 후에 살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조른 적이 없는 경우에 비해 무려 7배가 높았다는 사실이다. 일설에 따르면 위의 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를 쓴 시인이 직접 가정폭력을 겪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내용에서 처음 일어난 물리적 폭력이 목 조르기였고, 결국 여성의 죽음으로 끝난 것은 이 논문이 이야기하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외에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 연구들이 더 있다.
여성을 폭행하는 사람들은 왜 목을 조를까? 주먹질을 하는 것과 달리 흉터를 많이 남기지 않으면서도 여성에게 "정말로 죽을 수 있다"는 신호를 강력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폭력이 나쁘지만, 특히 여성의 목을 조르는 행위는 그 폭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종류의 상해보다 나중에 살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따라서 가정폭력 사건을 처리할 때 목을 조른 일이 있을 경우 처벌을 강화해야 하고, 여성이 살해당할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경찰이 인지하고 더욱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위에서 언급한 뉴욕타임즈 기사 속 사건은 미국 메인주에서 일어난 일인데, 이 주에서 일어나는 살인의 절반에 가까운 사건이 가정폭력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주의 경찰은 "가정폭력 피해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단 한 번밖에 없다고 간주하라"고 배운다고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행동과 상태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해 위험신호를 잡아내지 못하면 다음에는 피해자를 시신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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