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의 계산 ②
• 댓글 2개 보기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 쿠르스크로 진격하기 약 2주 전, 덴마크 왕립 국방대학교의 앤더스 퍽 닐슨(Anders Puck Nielsen, 이 사람의 견해는 오터레터에서 종종 소개했었다)은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머지않아 우크라이나가 대대적인 공세를 펼 것 같다"는 예측을 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양측이 공세와 수세를 오가게 된다. 한동안 한쪽이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공세를 취하면 다른 쪽은 방어에 집중하게 되는데, 공격을 하는 쪽은 아무래도 인적, 물적 자원을 더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공격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 반면, 수세에 몰린 쪽에서는 그 기간 동안 전쟁 자원을 비축하고 있다가—닐슨은 전쟁을 그걸 수행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의 측면에서 생각한다—상대의 공격력이 정점/한계에 도달하는 순간 공세로 전환한다는 거다.
앤더스 닐슨이 제시하는 아래 표를 보면 알겠지만, 2022년 2월 러시아가 공격을 시작한 후 8월까지 수세에 있던 우크라이나는 그 뒤로 1년 넘게 공세를 유지했지만, 작년 10월부터 이번 여름까지는 러시아의 공격을 막는 데 급급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미국 의회에서 공화당의 반대로 우크라이나로 무기를 보내는 작업이 지체되고 있었던 탓이 크다. 그런데 미국에서 정치적 돌파구가 마련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다시 공격에 필요한 무기를 채우기 시작했고, 지난봄에는 동원령을 내려서 새로운 병력을 훈련했다. 약 14개의 여단을 새로 편성할 수 있는 수준의 병력이었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여름 공세를 마무리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그러는 동안 미국 정부는 앞의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크라이나가 받은 무기로 국경지대의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는 데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기도 했다.
길어진 전선
우크라이나는 미국 무기의 러시아 영토 내 사용 허가를 끈질기게 요청해 왔고, 올해 들어 하르키우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 후에야 미국이 허락을 해줬지만, 이는 단순한 결정이 아니다. 비록 (그 정의가 모호한) "국경 지대"에 한해서만 사용할 수 있게 했지만, 그 효과는 생각보다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앤더스 퍽 닐슨이 설명하는 아래의 그림 보자. 파란색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사실상 현재 국경이고, 빨간색이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전선(戰線)이다.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두 나라이니 당연히 국경 전체에 병력을 배치해서 방어해야 하지만, 러시아로서는 빨간색으로 표시되지 않은 국경은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우크라이나가 사용하는 공격 무기들은 대부분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서 제공받았고, 이들은 그 무기를 러시아의 영토를 공격하는 데에 사용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서방 국가들로서는 핵을 가진 러시아를 자극해서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어쨌거나 그 결과로 러시아는 자기가 공격하고 싶은 동부, 남부 지역에만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게 무기의 러시아 영토 내 사용을 허락했다는 것은 러시아가 현재 전투가 활발하게 벌어지는 지역, 즉 자기들이 빼앗은 지역뿐 아니라, 북쪽의 국경도 염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닐슨은 바로 그 점을 지적했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다른 지역을 공략할 가능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쿠르스크 지역에 기습을 허용한 건 러시아가 그렇게 방심했음을 의미한다.
현재 상황을 이런 맥락과 틀에서 살펴보면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진격은 우크라이나군이 전략적으로 아주 논리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미국을 비롯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던 나라에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고, 우크라이나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시점에서는 이런 "회심의 한 방"이 더욱 절실했을 수 있다.
푸틴의 선택지
하지만 쿠르스크 진격이 매력적인 카드라고 해서 장기적인 성공이 보장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뉴욕타임즈의 데이비드 프렌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곰을 자극하고 있다(Ukraine Is Poking the Russin Bear)"라는 칼럼에서 러시아와 유럽을 연구하는 마이클 코프먼(Michael Kofman)을 인용해서 "일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끝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당장 러시아에 영토를 빼앗긴 돈바스(동부) 지역과 하르키우에서 병력을 빼내어 새로운 전선을 여는 건 도박이라는 것이다. "군사 역사에는 야심차게 진격했다가 끔찍한 패배를 겪고 수치스럽게 후퇴한 사례가 넘쳐난다."
하지만 프렌치는 그런 경고를 하면서도 이번 공격의 성공으로 우크라이나가 푸틴의 프로파간다를 깨버렸다는 분석도 소개한다. 푸틴은 소련 시절의 전술을 되살려서 무한한 러시아의 병력을 쏟아부어 우크라이나군을 압도하고, 시간을 끌다 보면 결국 서구 국가들의 인내심이 바닥나게 되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포기하게 될 거라는 그림을 내비쳤고, 실제로 서구에서는 그런 시나리오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진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전쟁의 내러티브가 푸틴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문제는 그 결과로 푸틴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닐슨은 러시아의 병력 문제를 제기한다. 쿠르스크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많은 러시아 징집병을 포로로 잡았다"는 젤렌스키의 발표에서 보듯, 러시아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지역은 징집병에게 맡긴다. 그 결과 국경이 쉽게 뚫린 것이지만, 이건 러시아의 군 편제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러시아군은 계약을 통해 자원입대한 직업 군인과 의무 복무를 하는 징집 병력으로 크게 나뉘고, 그밖에 계약 기간을 마친 예비군 병력이 있다. 러시아를 침공할 나라는 없기 때문에 러시아의 긴 국경 방어는 징집병이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특수 군사작전"을 해야 할 때는 경험이 많고 전투력이 높은 직업 군인을 동원한다.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이 이들이다.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소모전(attrition warfare)이 원래 병력 손실이 크지만, 러시아는 이번 전쟁으로 엄청난 병력 손실을 겪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본토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을 충원해야 한다. 푸틴으로서는 직업 군인으로 필요한 병력을 충원하는 게 정치적으로 가장 부담이 적지만, 2년이 넘는 전쟁으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인적 자원에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많은 반발을 겪으면서도 예비군을 동원해서 부족한 병력을 대신했지만, 이대로 가면 다른 지역 방어를 하고 있던 징집병을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문제가 많다. 일단 징집병은 전투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직업 군인보다 훨씬 더 큰 병력 손실을 겪게 될 게 뻔하다. 그런데 직업 군인과 달리 이들의 사망과 부상은 일반 국민들의 반발, 특히 부모의 반발을 부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돈을 버는 직업 군인이 주로 수행하는 전쟁이라 러시아 국민들이 큰 동요 없이 푸틴의 전쟁을 묵인하거나 지지하고 있지만, 당장 자기 아들이 전쟁터에서 시신으로 돌아오면 얘기가 다르다. 푸틴이 징집병 투입을 꺼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도 상황이 나빠지면 푸틴은 전쟁 지속을 포기하고 협상에 나서거나 징집병을 전쟁터에 보내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가 작은 지역 하나를 뺏겼다고 해서 당장 종전 협상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우크라이나는 어쩌면 이런 상황을 알고 푸틴을 압박하기 위해 쿠르스크 진격을 감행했을 수 있다.
닐슨은 러시아 국민을 다루는 법을 잘 아는 푸틴이 섣불리 징집병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량 투입하는 대신, 소수의 병력으로 조심스럽게 시도해 보고 특별한 반발이 없으면 그 수를 늘려갈 것으로 전망한다. 이번 공격의 결과로 우크라이나가 더 많은 러시아 병력과 싸워야 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근거다. (현재 러시아의 의무 복무기간은 1년이지만, 소련 시절처럼 2년으로 늘리기만 하면 병력의 수는 두 배로 늘어날 수 있다는 게 그의 또 다른 우려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온 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침공 후 푸틴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의견이 나빠졌다고 한다. 이들은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에 대한 푸틴의 대응이 "부족"하거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다. 철권을 행사하는 독재자라고 해도 여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징집을 통해 병력을 늘려도 이렇게 상황을 보며 늘려야 하기 때문에 푸틴은 당장 빼앗긴 쿠르스크 지역의 탈환에 큰 노력을 쏟지는 못 할 것이고, 그가 이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비록 시간이 걸려도 징집병 투입을 시작하면 연말에는 우크라이나의 전장에 10~20만 명의 추가 병력이 들어 오게 될 거라는 게 닐슨의 전망이다. 전쟁이 잦아들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당분간 상황은 더 나빠지고,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는—우크라이나도 이미 징집병을 늘렸고, 전쟁터에 가고 싶지 않은 젊은이들이 징집을 피해 숨거나 국경을 넘어 달아나고 있다고 한다—교착 상태와 상황의 악화라는 두 개의 나쁜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한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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