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4년마다 보게 되는 대선 토론회를 미식축구의 수퍼보울(Super Bowl)에 비유한다. 오랜 경력을 쌓은 정치인이 경선에 이기고 최종 결선에서 만나 정면 승부를 겨루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인기로 대결하는 게 아니라, 치밀하게 상대를 분석하고 준비한 팀의 지원과 전략에 따라 토론에 임한다는 점에서 팀 스포츠에 비유하는 건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이슈를 잘 파악하지 않고 대선 토론을 보는 일반인의 눈에 대선 토론은 미식축구보다는 미국의 유명한 자동차 경주인 나스카(NASCAR)에 가깝다. 개개 선수, 팀을 모르는 사람이 나스카를 보면 그저 많은 차들이 끊임없이 좌회전만 하는 지루한 경기인 것처럼, 대선 토론도 이미 골백번 이야기된 문제에 대해 평소의 주장을 주고받으며 조금도 이견을 좁히지 않는 두 평행선을 보는 기분이다.

그런 일반인도 나스카가 재미있을 때가 있다. 바로 사고가 날 때다. "나스카는 사고를 보는 재미로 본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사고는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의 시선도 집중시킬 수 있다. 대선 토론회도 그렇다. 뻔한 주제로 안전한 공방전을 하는 건 지루할 수 있지만, 한쪽에서 실수를 하거나, 상대방의 실수를 끌어낼 경우 대선 토론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된다.

엊그제(9월 10일) 있었던 도널드 트럼프와 카멀라 해리스의 토론이 그랬다.

후보들의 서로 다른 목표

대선 토론은 주제를 두고 막연하게 생각을 주고받는 행사가 아니다. 전술적인 차원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만천하에 알리는 날카로운 공격을 해야 하고, 자기가 그런 공격을 받았을 때 교묘하게 빠져나가서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전략적인 차원에서의 목표가 있다. 대선의 현재 시점에서 해내야 하는 목표는 후보마다 다르지만, 평소 선거운동을 통해서 할 수 없었던 것을 토론회를 통해 할 수 있는 게 있다. 카멀라 해리스의 경우, 탄력을 받은 지지율의 상승세를 유지해야 한다. 해리스는 후보가 된 직후 적절한 연설, 발언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렸고, 뛰어난 러닝메이트 팀 월즈를 골랐고, 그동안 취약점이라고 지적받았던 인터뷰까지 성공시켰다. 그런 해리스에게 남은 건 트럼프를 상대로 한 토론 실력의 검증이다.  

트럼프는 다르다. 트럼프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미국인들은 없다. 따라서 트럼프로서는 카멀라 해리스처럼 검증을 통과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그는 해리스의 모멘텀을 끝내고 상승세를 막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잘 모르는 해리스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 그런데 카멀라 해리스는 인기 없는 바이든의 부통령이다. 따라서 트럼프 팀은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유권자들에게 바이든에 대한 실망을 해리스에 투사하고, '바이든=해리스'라는 인상을 심어주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트럼프가 목표에 도달하는 걸 가장 효과적으로 막는 건 트럼프 본인이고, 이번 토론회가 그걸 다시 한번 확실하게 보여줬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카멀라 해리스(와 토론 준비팀)의 뛰어난 전술이 돋보였다. 해리스는 트럼프가 물고 싶을 미끼를 간간이 던졌고, 트럼프는 그걸 여지없이 물었다. 그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 보자.

아래의 내용은 호주 출신의 뉴욕타임즈 기자 조너선 스완(Jonathan Swan)이 토론회가 끝난 직후 뉴욕타임즈 팟캐스트에 출연해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스완 기자는 언론계에서도 트럼프를 잘 이해하는 기자로 유명하다.

조너선 스완이라는 이름이 낯익다면 바로 아래의 인터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시절, 액시오스에서 일하던 조너선 스완은 트럼프와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트럼프가 확진자, 사망자의 통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 깨우쳐 주었고, 그 인터뷰 영상은 "인터넷을 다운시킨 비디오"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화제가 되었다.
스완 기자가 트럼프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발을 흔들고 있는 이 인터뷰 영상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미지: 유튜브 캡처)

토론회의 시작

원래 토론회에 나선 양당의 후보는 토론장 가운데서 만나 악수를 나누며 선전을 약속하는 게 관례이지만, 트럼프가 정치를 막말이 난무하는 판으로 만든 후에는 그런 관례가 깨졌다. 트럼프는 '나와 악수하려면 네가 이리로 오라'는 식으로 자기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항상 강한 것처럼 보여야 하는 트럼프가 하는 많은 행동 중 하나다—바이든은 아예 악수를 포기했다.

그런데 카멀라 해리스는 여기에서 뜻밖의 행동을 한다. 트럼프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 것이다. 스완 기자는 이를 '파워무브(power move)'로 해석한다. 말하자면 '힘과 자신감이 있는 내가 아량을 베푼다'는 자세였다. 게다가 항상 그렇듯 악수를 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어서 나오는 트럼프를 향해 해리스가 빠르게 걸어가니 순간 트럼프가 해리스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효과도 생겼다. (영상 보기)

(이미지 출처: ABC News)

하지만 첫 질문은 카멀라 해리스에게 불리한 주제였다. 진행자인 데이비드 뮤어(David Muir)는 부통령인 해리스에게 미국인들이 4년 전보다 형편이 좋아졌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다른 나라들처럼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미국에서 형편이 좋아졌다고 대답하면 비난을 받을 것이고, 나빠졌다고 하면 그럼 당신이 잘못한 거 아니냐는 비판을 받게 될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인이 되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교훈은 이럴 때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른 얘기하는 거다. 해리스는 능청스럽게 "저는 중산층 가정의 아이로 자랐습니다"라는 말로 질문을 피하고, 중산층이 원하는 게 뭔지 잘 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을 위한 자기의 계획—가령 소상인을 위한 정책—을 홍보한다. 카멀라 해리스는 정치인이다. (영상 보기)

하지만 첫 답변이 회피형 답변이면 약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에 반해 트럼프는 특유의 쉬운 말로 "수입품에 큰 관세를 붙이겠다"며, 자기가 대통령일 때 그렇게 해서 중국에서 관세를 받아냈다고 자랑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권위가 느껴진다. 미국 국민 중에는 해리스보다 트럼프가 경제를 더 잘 이끌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트럼프는 "나는 미국 경제를 사상 최고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음 임기 때도 그렇게 할 것이고, 오히려 더욱 부강하게 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 (영상 보기)

여기까지는 트럼프 팀이 기대하는 '후보 트럼프'의 모습이었다.

(이미지 출처: WSJ 유튜브 캡처)

해리스의 공격 개시

그런데 공동 진행자 린지 데이비스(Linsey Davis)가 임신 중지(abortion)를 주제로 두 번째 질문을 던지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데이비스는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들이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어 임신을 중지할 권리를 주 정부가 알아서 결정하도록 만든 것을 이야기하면서 "당신이 자주 말을 바꿨기 때문에 해리스는 여성들이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트럼프는 각 주가 알아서 결정하게 했더니 어떤 주에서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어떤 주에서는 임신 중지를 허용하는 등 다양한 결정을 했다며 대법원의 판결을 옹호했다.

하지만 발언권을 이어받은 해리스는 준비했다는 듯 트럼프를 공격했다. 벌써 20개가 넘는 주에서 트럼프가 시작한 임신 중지 금지가 실시되면서 여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해리스는 임신 중지를 도운 것으로 종신형을 살게 하는 주도 있다는 예를 들기도 하고, 혹시라도 처벌이 두려워 환자를 거부하는 바람에 병원을 찾지 못한 여성이 주차장에서 피를 흘리는 사연, 근친상간으로 임신한 12, 13살 여자아이가 아이를 낳게 만드는 상황도 이야기하면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실제 사례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했다. (영상 보기)

(이미지 출처: WSJ 유튜브 캡처)

스완 기자는 이 부분이 이 토론에서 해리스가 공세로 돌아선 전환점이라고 한다. 트럼프는 공화당에서 추진하는 연방 차원의 낙태 금지 법안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피하기 시작하면서 말이 길어진다. 첫 질문에 대한 해리스의 대답처럼, 대답이 길어지면 자신이 없어 보이고 수세에 몰렸다는 뜻이다.

트럼프를 잡는 덫

그다음 질문은 이민, 난민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오터레터에서 이야기한 적 있지만, 이 주제는 카멀라 해리스와 바이든 정권의 약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토론회의 주최 측인 ABC 뉴스의 공정한 질문 배열이 눈에 띈다.) 진행자 뮤어는 바이든이 강력한 조치를 계속 미루고 있다가 대선이 다가오자 마지못해 실행한 것을 지적하면서 "당신이 대통령이었다면 다르게 했겠느냐"고 물었다.

이 대목에서 트럼프의 공격이 들어올 것을 잘 아는 해리스는 뮤어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선제공격에 나섰다. 첫째, 자기가 국제 범죄조직(트럼프는 이민자, 난민 중에 범죄 조직원이 섞여 들어온다는 주장을 자주 한다)을 잡아 처벌했던 유일한 후보임을 강조했고, 둘째, 양당이 거의 합의했던 강력한 이민법 개정안을 트럼프가 막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트럼프는 이민 문제가 계속해서 미국인을 화나게 해야 선거에 유리하다는 계산 하에, 자기를 따르는 의원들이 개정안을 거부하게 했기 때문이다. 해리스는 "트럼프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그 문제를 이용해서 당선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영상 보기)

그런데 해리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트럼프의 선거 유세에 한 번 가 보시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한 말은 잘 준비된 토론 혹은 연설용 멘트였는데, 거기에 흥미로운 한 줄을 넣었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다.

"(트럼프의 선거 유세는) 아주 흥미로운 구경거리입니다. 한니발 렉터(영화 속 인물인데, 트럼프는 뜬금없이 이 캐릭터가 자기를 지지한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관련 한국 기사) 이야기, 풍력발전이 암을 유발한다는 이야기 따위를 합니다. 그런데 보시면 사람들이 그의 연설이 끝나기 전에 유세장을 떠나는 것도 보실 수 있죠. 지치고 지루해서입니다. 다양한 말을 하는 트럼프가 하지 않는 얘기가 하나 있다면 여러분(유권자)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필요, 여러분의 희망, 여러분이 바라는 바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유권자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대통령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최우선에 두겠다고 맹세합니다."

저 말은 전체 내용에 필요한 내용이 아니지만, 누가 보기에도 트럼프를 트롤링(관심을 끌어 화나게 하기)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들어있는 말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트롤링을 할 때는 무시하는 게 가장 적절한 대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를 가장 분노하게 하는 트리거가 있고, 그 트리거를 건드리면 트롤링에 걸려 미끼를 문다.

트럼프에게 가장 확실한 트리거는 자기 얘기를 듣기 위해 모인 군중의 규모와 흥행 여부다. 그걸 건드리는 순간 이성을 잃고, 준비했던 모든 계획은 내던지고, 먹잇감을 쫓는 사냥개가 된다. 스완 기자는 해리스가 "청중이 지루해서 일찍 자리를 뜬다"는 말을 하는 순간 트럼프의 얼굴이 (분노로) 씰룩거리는 게 보인다고 한다. 실제로 그랬다. 

아래가 그의 눈에 불이 켜지는, 즉 그가 "낚인" 순간이다. (영상 보기)

'해리스가 놓은 덫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