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복과 저항 ②
• 댓글 남기기트럼프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로펌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일은 뉴욕타임즈의 마이크 슈미트 기자가 쉽게 설명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퍼킨스 쿠이는 민주당이 자주 이용하기는 하지만, 사실 이 로펌의 주 수익원은 미국의 연방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연방 정부가 발주하는 사업을 하던 중에, 혹은 관련 법규와 관련해 문제가 생기면 이들을 대변하는 게 퍼킨스 쿠이의 주 수익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연방 정부의 공무원들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는 퍼킨스 쿠이 소속 변호사들이 연방 정부 건물에 들어가거나 공무원들을 만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한 마디로 퍼킨스 쿠이가 사업을 할 수 없게 막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행정 명령에는 연방 정부가 발주한 사업을 하는 기업체들이 퍼킨스 쿠이를 변호사로 고용할 경우 연방 정부의 일을 하지 못한다는 조항까지 들어있다. 그 기업은 잘못한 게 없어도 문제의 로펌에 돈을 준다면 연좌제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이는 북한이나 이란,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이 테러, 전쟁을 벌이거나 핵확산방지조약 등을 위반했을 때 미국 정부가 이들 적성 국가를 상대로 사용하는 방법, 즉 '블랙리스트'와 다르지 않다. 만약 어느 나라가 비밀리에 러시아의 원유를 수입하거나, 이란이나 북한에 물건을 수출하다가 적발될 경우 대미 무역 제재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 그런데 이 방법을 적국도 아닌, 자국의 대형 로펌을 상대로 사용하는 근거가 뭘까? 2016년 대선에서 퍼킨스 쿠이가 고용한 정보업체에서 트럼프와 러시아의 관계를 조사한 것은 "국가에 위협이 되는" 사안이라는 게 트럼프 측의 주장이다. 따라서 로펌을 적성 국가처럼 취급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의 행정 명령이 발동되자, 기업 고객들이 퍼킨스 쿠이와 거래를 끊기 시작했다. 회사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로펌을 고용해도 되는데 굳이 트럼프와 척진 로펌을 사용해서 피해를 볼 이유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고객이었던 기업들이 떠나면서 퍼킨스 쿠이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는 로펌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
퍼킨스 쿠이는 정면으로 저항을 선택했다. 이대로 회사가 문을 닫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퍼킨스 쿠이는 소속 변호사들이 직접 싸우는 대신, 이런 문제를 더 잘 다룰 다른 로펌을 찾았다. 트럼프의 명령에 맞서는 싸움에 지면 회사가 날아가는 심각한 사안인 만큼 막강한 화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례 없는 큰 칼을 휘두르는 트럼프와 맞서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퍼킨스 쿠이를 변호하겠다는 로펌은 많지 않았다.
그때 퍼킨스 쿠이를 위해 이 사건을 맡겠다고 나선 로펌이 있었다. 워싱턴 DC에 있는 윌리엄스 앤드 코널리(Williams & Connolly)였다. 규모는 퍼킨스 쿠이보다 작지만, 이 역시 대형 로펌이었고, 무엇보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평소 연방 정부를 상대로 가장 지독하게 싸우는 로펌으로 유명한 곳이다. 윌리엄스 앤드 코널리는 지체없이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연방 판사에게 행정 명령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윌리엄스 앤드 코널리의 변호사들은 판사에게 트럼프의 행정 명령이 불공정하고, 헌법에 위배되며, 퍼킨스 쿠이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했고, 피고인 법무부는 로펌이라도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면 대통령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퍼킨스 쿠이가 2016년 대선 때 한 일을 이야기했다.
양쪽 이야기를 들은 판사는 트럼프의 행정 명령이 법조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it sends a chill down my spine)"며, 임시 중지 명령을 내렸다. 여기까지 들으면 퍼킨스 쿠이가 이긴 것처럼 들린다. 법정에서는 이긴 게 맞다. 하지만 슈미트 기자에 따르면 피해는 이미 발생했다. 기업 고객들의 눈에 퍼킨스 쿠이는 트럼프의 미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피해야 할 로펌이 된 거다. 트럼프는 이 재판에서 패한다고 해도 이를 대법원까지 가져갈 게 분명하다. 거기까지 가서 퍼킨스 쿠이가 이긴다고 한들, 그 시점에 이미 많은 고객을 잃은 이 로펌이 존재할까? 문을 닫은 상황에서 이긴다고 한들 그저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에 불과하다.
트럼프는 퍼킨스 쿠이를 괴롭힘으로써 미국 모든 로펌들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트럼프나 트럼프 행정부의 눈에 어긋나는 일을 할 경우 회사 문을 닫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슈미트 기자는 미국은 건국 이래로 누구나 원하면 변호사를 고용해서 법정에서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는 사법 시스템을 유지해왔지만, 트럼프의 이번 명령이 그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트럼프는 자신을 탄핵하거나 수사했던 정치인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트럼프의 표적이 된 개인이나 조직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변호사가 필요하다. 물론 그들이 변호사를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로펌들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로펌들이 트럼프의 행정 명령으로 자칫하면 돈이 되는 수임을 하지 못해 문을 닫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 행정 명령이라는 수단으로 의회를 무시한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트럼프를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법원이다. 하지만 법원은 의회와 달리 정치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소송이 들어오기 전에는 판사들이 자발적으로 나설 수 없다. 결국 피해를 본 당사자들이 변호사, 로펌을 고용해서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데, 미국에서 가장 힘 있는 로펌들이 트럼프의 눈치를 보며 수임을 꺼리게 되었다면? 트럼프로서는 가장 강력한 상대를 사실상 무력화한 것이다.
언론에서는 트럼프가 퍼킨스 쿠이를 겨냥한 행정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고, 이런 조치가 퍼킨스 쿠이 하나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고, 그 예상은 맞았다. 그 이후로 트럼프는 그동안 자기에게 소송을 걸었던 로펌들을 차례로 겨냥해서 퍼킨스 쿠이와 똑같은 제재를 가했다. 추가로 포함된 곳에는 매출 규모 세계 27위의 폴 와이스(Paul, Weiss, Rifkind, Wharton & Garrison), 45위의 윌머 헤일(Wilmer Cutler Pickering Hale and Dorr), 심지어 세계 6위의 스캐든(Skadden, Arps, Slate, Meagher & Flom)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대형 로펌들도 퍼킨스 쿠이처럼 트럼프에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을까?
그렇지 않다. 폴 와이스와 스캐든, 커클랜드 앤드 엘리스 등의 로펌들은 행정 명령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맞서는 대신 수천만 달러의 수임비에 해당하는 무료 법률 서비스(pro bono)를 트럼프 행정부에 제공하기로 했다. 트럼프의 요구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한 때 트럼프에 맞섰던 이 로펌들의 무료 서비스는 이제 트럼프 행정부가 헌법에 어긋나는 정책을 추진할 때 사용되는 무기가 된다. 여기에는 미국의 유명 대학교들이 받아야 할 연구비 지급을 막는 것에서부터, 죄 없는 이민자들을 재판 없이 외국으로 추방, 구금한 명령, 그리고 트럼프가 헌법이 금지한 3선에 나서기 위해 법의 구멍을 찾아내는 일까지 다양한 요구가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에 굴복해서 무려 1억 달러 이상의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한 대형 로펌 스캐든에서 한 젊은 변호사가 사임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토머스 시프(Thomas Sipp)이라는 이 변호사는 현재 27세로 2023년에 콜럼비아 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후 스캐든에서 일을 시작한 신참이다.
앞날이 창창한 그는 왜 누구나 부러워하는 최고의 직장을 떠나기로 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수치스러웠다(I felt ashamed)"는 거다. 그는 사표를 내기 전에 자신이 스캐든을 떠나기로 결정한 이유를 간략하게 적은 이메일을 회사 동료들에게 보냈는데, 그 이메일을 읽은 누군가가 언론에 이를 공개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의 이메일은 이렇게 끝난다: "스캐든은 역사에서 옳지 않은 쪽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언젠가 제가 왜 회사에 남기로 결정했는지 해명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스캐든에 남을 수 없었습니다."
이 글이 알려지자 뉴욕타임즈가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아직 법률에 대한 이상적인 태도가 사라지지 않은 젊은 변호사의 패기에 찬 항변을 들을 것으로 기대하고 인터뷰를 듣기 시작했다.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지만, 그의 인터뷰에는 뜻밖에도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중요하게 등장했다.
그는 일본에서 일본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이중국적자였다.
'굴복과 저항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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