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스포일러
• 댓글 남기기와이어드 매거진(Wired Magazine)은 모바일 인터넷 시대에는 좀 오래된 느낌이 드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신선한 아티클을 발행하는 좋은 매체다. 이 매거진이 1997년 7월, 그러니까 약 25년 전에 21세기에 인류가 접할 문제를 예측하는 "10개의 시나리오 스포일러"를 발행했는데, 최근 누군가 그걸 다시 찾아내서 화제가 되었다. 이 10개의 스포일러는 인류의 21세기가 반드시 '희망찬 미래' 아닐 수 있음을 경고하는 건데, 많은 사람이 이 예측이 정확했다고 감탄한다. 어디까지나 읽는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지만 흥미로운 예측이라 여기에 소개한다.
이 10개의 비관적 예측은 'The Long Boom'이라는 아주 희망적인 미래를 이야기하는 피처 기사 속 박스로 등장한 내용으로 본 기사와는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devil's advocate'인 셈이다.
본 기사는 경제, 테크 붐이 2020년까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는데, 만약 그 예상이 실패한다면 어떤 요인이 그런 실패를 유발할 것인가를 예측해보는 것이 박스 기사다. 이 기사의 전문은 여기에서 읽어볼 수 있고, 옛날 느낌을 그대로 느끼고 싶다면 여기에서 종이 잡지를 PDF 형태로 읽을 수도 있다.
기사는 아주 희망적이다. '기술적 발전'과 '개방을 원하는 시대정신'이라는 두 개의 요인이 인류를 긴 번영기(boom)로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이야기한 "앞으로의 25년"을 지나 온 우리는 그 예측이 다소, 아니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였고 실제 역사는 예상과는 다르게 펼쳐졌다는 걸 안다. 사람들이 본 기사보다 박스 기사(아래 사진의 오른쪽 빨간 바탕의 글)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글쓴이는 이 박스 기사를 넣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긴 번영기는 미래에 가능한 하나의 시나리오일 따름이다. 이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많고 큰 영향력(big forces)과 더 많고 작은 조각들이 완벽하게 (좋은 쪽으로) 맞아떨어져야 한다. 물론 미래는 아주 다르게 펼쳐질 수 있다. 특히 큰 조각들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지 않을 경우 그렇다. 우리가 기대하는 번영기를 짧게 끝내버릴 지 모를 10개의 요인은 다음과 같다."
- 중국과 미국 사이의 긴장이 점점 커지면서 새로운 냉전(冷戰)으로 발전하고 열전(熱戰, 실제 전쟁)으로 확대될 위험도 생긴다. Tensions between China and the US escalate into a new Cold War – bordering on a hot one.
- 새로운 기술들이 실패작으로 판명 난다. 생산성 향상이나 경제 성장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New technologies turn out to be a bust. They simply don’t bring the expected productivity increases or the big economic boosts.
- 러시아는 도둑체제(kleptocracy, 권력자가 막대한 부를 독점하는 정치 체제)로 전락해서 마피아가 나라를 이끌거나 공산주의 비슷한 민족주의가 유럽을 위협한다. Russia devolves into a kleptocracy run by a mafia or retreats into quasi-communist nationalism that threatens Europe.
- 유럽의 통합 프로세스가 멈춘다. 동유럽과 서유럽은 재결합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유럽통합 프로세스 자체도 실패한다. Europe’s integration process grinds to a halt. Eastern and Western Europe can’t finesse a reunification, and even the European Unification process breaks down.
- 대규모 생태학적 위기가 전 지구적 기후변화를 유발하고, 그 결과 중 하나로 식량 공급에 지장이 생긴다. 곳곳에서 식료품 가격이 상승하고 간헐적 기근이 발생한다. Major ecological crisis causes a global climate change that, among other things, disrupts the food supply – causing big price increases everywhere and sporadic famines.
- 대규모 범죄와 테러 사건이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는다. 언제 폭탄이 터져 죽을지 모르는 상황은 각 나라가 문호를 개방하고 협력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Major rise in crime and terrorism forces the world to pull back in fear. People who constantly feel they could be blown up or ripped off are not in the mood to reach out and open up.
- 계속되는 공해가 쌓인 결과 암 발생률이 크게 증가하고, 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의료체계가 이 상황을 버티기 힘들어진다. The cumulative escalation in pollution causes a dramatic increase in cancer, which overwhelms the ill-prepared health system.
- 에너지 가격이 폭등한다. 중동지역에 발생하는 격변이 석유 공급에 지장을 초래하고 대체 에너지의 개발은 실패한다. Energy prices go through the roof. Convulsions in the Middle East disrupt the oil supply, and alternative energy sources fail to materialize.
- 통제 불가능한 감염병, 즉 현대판 독감 에피데믹(epidemic) 혹은 비슷한 바이러스가 마치 산불처럼 퍼져나가면서 2억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An uncontrollable plague – a modern-day influenza epidemic or its equivalent takes off like wildfire, killing upward of 200 million people.
- 사회적, 문화적 백래시(backlash)가 진보를 막게 된다. 인류는 앞으로 나아가는 걸 선택해야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지 모른다. A social and cultural backlash stops progress dead in its tracks. Human beings need to choose to move forward. They just may not…
과연 이 비관적 예측은 적중했을까? 하나씩 살펴보자.
"중국과 미국 사이의 긴장이 점점 커지면서 새로운 냉전(冷戰)으로 발전하고 열전(熱戰, 실제 전쟁)으로 확대될 위험도 생긴다."
바이든 행정부는 어제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외교적으로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선수단은 예정대로 파견하는 것이고 주요 인사들이 국가와 정부 차원에서 중국을 방문하지 않겠다는 것이지만 이는 1980년 미국과 서구진영이 구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올림픽에 불참했던 보이콧을 연상시킨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서는 그 보복으로 1984년 미국 LA 올림픽에 불참한다. 그래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이 8년 동안의 반목을 끝내는 "화합의 축제"였다). 현재의 미중 관계가 냉전이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진 논쟁을 확실하게 끝내고 '냉전이 맞다'고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다.
게다가 중국이 대만을 침공, 합병할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면서 미국과 유럽연합의 국가들이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며 군함을 보내는 시위를 하는 것은 열전, 즉 군사적 대결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시위는 무력 충돌을 사전에 막으려는 의도에서 하는 것이고, 실제 양국의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는 20세기 냉전 기간 중 미국과 구소련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Cold War II'에서 설명했다).
"새로운 기술들이 실패작으로 판명 난다. 생산성 향상이나 경제 성장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이 예측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기술, 특히 인터넷 기술이 생산성을 실제로 향상시켰고 경제성장을 촉진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예측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셜미디어는 사회를 분열시키고 개개인을 알고리듬의 노예로 만들었고, 전자상거래 기업들이 해낸 건 새로운 부의 창출이 아니라 전통적인 오프라인의 상권을 무너뜨리고 빼앗은 것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도둑체제(kleptocracy, 권력자가 막대한 부를 독점하는 정치 체제)로 전락해서 마피아가 나라를 이끌거나 공산주의와 비슷한 민족주의가 유럽을 위협한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마피아가 러시아를 장악한다는 우려가 있었고, 사회가 그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에 대통령이 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마피아를 장악했다. 그래서 마피아가 사라졌다기 보다는 푸틴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게다가 2016년에 유출된 파나마 페이퍼(Panama Papers)를 통해 푸틴이 비밀리에 쌓은 재산이 20억 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최근 등장한 판도라 페이퍼(Pandora Papers)에 따르면 푸틴의 "이너써클"이 또 그렇게 몰래 재산을 축적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도둑체제로 전락한다는 예측은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푸틴의 치하에 러시아에서 극우 민족주의가 득세한 것도 맞는다는 평가.
"유럽의 통합 프로세스가 멈춘다. 동유럽과 서유럽은 재결합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유럽통합 프로세스 자체도 실패한다."
2020년 1월에 일어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싯")만큼 이 비관적인 예측을 잘 확인시켜주는 사례도 없다. 물론 유럽 통합 프로세스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유럽 연합이 실패한 실험이라는 분석은 21세기에 들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실패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고전 중(struggling)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EU 여러 나라에서 불고 있는 민족주의의 바람을 보면 적어도 현재로서는 낙관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대규모 생태학적 위기가 전 지구적 기후변화를 유발하고, 그 결과 중 하나로 식량 공급에 지장이 생긴다. 곳곳에서 식료품 가격이 상승하고 간헐적 기근이 발생한다."
생태학적(ecological) 위기가 아닌 화석연료의 사용이 기후변화를 유발했지만, 기후변화 자체는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하게 일어났다. 현재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긴 것도 사실이고, 여기에는 팬데믹과 같은 다른 요인도 있지만, 기후변화가 주요 원인인 것도 이미 밝혀졌다.
"대규모 범죄와 테러 사건이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는다. 언제 폭탄이 터져 죽을지 모르는 상황은 각 나라가 문호를 개방하고 협력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4년 후에 일어날 9/11 테러를 예견한 듯한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예측은 불가능한 게 아니었다. 당장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만 해도 이미 1993년에 폭탄 테러 사건을 겪었고, 그 범인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었다. "곧 대형 테러 사건이 일어난다"는 경고는 1990년대 말에 꾸준히 나오고 있었고, 이는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가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9/11 테러 이후 세계는 테러에 민감해졌고, 비행기를 타는 절차는 길어졌다. 하지만 글로벌화의 흐름에 변화가 생긴 것은 테러보다는 미중 갈등에 기인한다고 보는 게 맞다.
"계속되는 공해가 쌓인 결과 암 발생률이 크게 증가하고, 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의료체계가 이 상황을 버티기 힘들어진다."
암 발생률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치료 성공률이 높아지면서 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서서히 감소 중이다. 미세먼지 등의 요인이 앞으로 어떻게 반영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 기준으로 이 예측은 틀린 듯하다.
"에너지 가격이 폭등한다. 중동지역에 발생하는 격변이 석유 공급에 지장을 초래하고 대체 에너지의 개발은 실패한다."
중동지역의 분쟁은 항상 존재하는 위험요인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엉뚱한 이라크를 공격한 것도 궁극적으로 이런 위험요인 중 하나인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중동지역에서의 전쟁으로 유가가 변하기는 했지만, 장기적인 폭등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류사회는 대체 에너지의 개발에 실패하지 않았다. 이미 몇몇 국가에서는 재생 에너지가 화석 연료를 대체하며 제1의 에너지원으로 등극했고, 기후위기의 해결책으로 이 수요는 더 커지고 있고, 가격도 내려가고 있다. 게다가 '인공태양'이라 불리는 핵융합 발전에 대한 연구에 진전이 있었고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에 돈이 몰리고 있다. 즉, 대체 에너지 개발은 실패하지 않았다. 진전이 더뎌 보인다면 그건 기술 개발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다.
"통제 불가능한 감염병, 즉 현대판 독감 에피데믹(epidemic) 혹은 비슷한 바이러스가 마치 산불처럼 퍼져나가면서 2억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에피데믹 보다 더 큰 팬데믹이 일어났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사망자 수는 지난 10월 기준으로 5백만 명으로, 엄청난 숫자가 맞고 앞으로 얼마나 더 늘지 알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2억 명 수준이 되지는 않을 듯하다. 사망자의 수를 제외하면 비관적이면서도 정확한 예측이었다. 특히 (충분한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통제를 하지 못한 것이 그렇다.
"사회적, 문화적 백래시(backlash)가 진보를 막게 된다. 인류는 앞으로 나아가는 걸 선택해야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지 모른다."
위의 10가지 비관적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그래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예측이 바로 이게 아닐까 싶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민주주의 절차가 무너지고, 극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종주의는 전 세계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고, 임신 중지와 같은 기본적인 여성의 권리는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조직된 백래시(backlash)로 위협받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임신 중지를 보장하는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뒤집힐 경우 각종 인권법이 흔들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위의 10개 항목을 보면 맞는 예측도, 틀린 예측도 있지만 1990년대 말에 했던 걱정들이 기우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충분히 걱정할 만한 일이었고, 그런 우려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미래를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 거기에 대비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류는 미래를 내다본 사람의 경고를 무시해온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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