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세계 여러 나라들의 관세 정책은 궁극적으로 당시 "세계의 공장"이었던 영국에 맞서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시도였지만, 미국에서 그 수혜자는 공장이 몰려있는 북부였다. 대다수의 국민은 더 비싼 가격에 물건을 구매해야 했고, 관세로 늘어난 세금도 남북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북군)의 연금 지급에 들어갔기 때문에 남부 농촌 지역에는 이로울 게 없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농촌 지역에서 공화당을 지지하고, 대도시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구도는 1960년대 민주당이 흑인을 위한 민권법을 통과시킨 후 일어난 미국 정치의 거대한 재정렬(The Great Realignment)로 탄생한 것이다. 약 50년간 유지된 이 구도는 트럼프의 등장 이후로 깨지면서 새로운 재정렬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현재의 격변으로 인해 어떤 구도가 탄생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병원에 입원한 다양한 환자들에게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관세(Tariff)'라고 적힌 약을 나눠주는 모습. 이 그림에서는 기업가, 독점자본, 포퓰리스트, 아나키스트 등이 모두 병자로 묘사되고, 저 멀리에는 여성운동가들이 모인 '여자 병동'이 보인다. 매킨리가 다양한 국내 문제를 관세 하나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꼬는 그림.

높은 상호 관세로 수출이 힘들어지면 미국의 산업에도 좋을 게 없었지만, 미국의 시장 자체가 워낙 크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매킨리는 세계 시장이라는 건 미국에 "덫이며,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소비자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기업가들은 높은 관세 뒤에 숨어 쉽게 돈을 벌었고, 그들이 만든 질 떨어지는 제품을 보면서 매킨리 행정부 내에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미국의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세계 최대의 경제로 발돋움했는데 관세 장벽을 세우는 건 설득력이 없는 정책이었다. 대니얼 임머바르는 경제학자 더글러스 어윈(Douglas Irwin)의 책을 인용해 당시 미국의 관세 정책은 궁극적으로 부(富)를 미국의 농업지역에서 공업지역으로 재분배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높아진 관세의 영향은 미국 내에 국한되지 않았다. 관세에서 유예되었던 설탕에 40%의 관세가 붙으면서 대미 설탕 수출에 의존하던 하와이의 경제를 뒤흔들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영토가 아니었던 하와이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에 편입되어 관세 장벽을 없애는 것 뿐이었다. (적어도 하와이에서 설탕 사업을 하던 미국과 유럽의 기업가들의 생각은 그랬다.) 결국 설탕에 40%의 관세가 붙은 지 4년 만인 1898년, 하와이는 미국에 합병된다.

제국을 숨기는 방법 ③
트럼프의 영토 확장 욕심은 1890년대 미국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미국의 하와이 합병과 관련해서는 이 글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흥미로운 건 1890년대 매킨리의 관세 정책에 큰 타격을 입은 나라들 중에 캐나다가 있다는 사실이다. 대미 수출이 중요했던 캐나다의 경제가 흔들리자, 당시 캐나다 총리 존 맥도널드(John Macdonald)는 매킨리의 관세 정책이 "캐나다를 미국에 합병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캐나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은 1867년으로,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다. 그런 신생국 캐나다의 경제를 송두리째 흔드는 미국의 관세 정책이 국가의 독립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건 기우가 아닌 것이, 실제로 당시 미국은 하와이와 필리핀, 괌 등을 합병하면서 뒤늦게 제국주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킨리가 캐나다 수출품에 부과한 관세는 평균 48.4%였지만, 그는 캐나다를 합병하겠다는 의도라고 밝힌 적이 없다. 하지만 트럼프는 캐나다에 특별한 이유 없이—그는 마약이 캐나다 국경을 넘어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높은 관세로 위협하면서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만들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대니얼 임머바르는 1900년, 매킨리가 재선에 성공한 후 1901년 암살당하기 전, 높은 관세가 더 이상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생각을 바꿨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매킨리가 암살범의 총에 맞은 건 1901년 9월 뉴욕주 버펄로에서 연설할 때였는데, 그 연설에서 매킨리는 "상업전쟁(무역전쟁)은 손해"라는 말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미국의 관세에 불만을 품은 외국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을 수 있다고 한 트럼프의 말은 아무런 역사적 지식이나 맥락이 없이 나온 말이다.) 같은 연설에서 매킨리는 "고립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말도 했다. 이제 고립주의를 끝내고 세계 질서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고립주의를 끝낸 건 매킨리의 연설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었다. 미국은 그 전쟁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국익'의 개념을 확장하게 되었다. 버지니아 대학교의 역사학자 앤드루 프레스턴(Andrew Preston)에 따르면 이런 사고 전환의 핵심은 '위협(risk)'에 대한 재정의였다. 세계 대전 이전만 해도 위협은 군사적인 위협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국방(defense)을 통해 대응할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미국의 세계 최강대국으로 올라선 2차 대전 후에는 국방보다 더 큰 개념인 안보(security)가 중요하게 대두된 것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국무부 청사인 해리 S. 트루먼 빌딩

따라서 이제는 국경을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했고, 이를 위해 수만 명의 직원을 채용해서 외교와 정보, 해외 원조 등에 투입하게 된 것이다. 매킨리가 캐나다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던 당시 67명에 불과했던 미 국무부(State Department, 한국의 외교부에 해당한다)에서 일하던 직원은 2019년 기준으로 7만 7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국무부가 직원 1,353명을 해고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런 변화에서 역사적 사실이 겹쳐 보이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미국 정부가 외교와 안보의 개념을 바꾸겠다고 모든 게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당장 대통령부터 세계에 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대통령직에 오른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나는 외교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인정하고 합참 총장을 백악관의 지도 보관실로 자주 불러 개인 교습을 받았다. 수업만 받은 게 아니라, 세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서류를 잔뜩 싸 들고 퇴근해서 늦은 시간까지 읽느라 눈이 많이 나빠졌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하면서 트루먼은 비로소 미국이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윌리엄 레이히 합참총장(오른쪽)의 설명을 듣는 해리 트루먼(가운데)

하지만 미국은 단순히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트루먼은 "미국은 육지와 바다, 하늘에서 계속해서 우위를 유지해야"하는데, 그 작업은 물가와 농업, 산업과 개인의 자유 같은 모든 것들을 지켜야만 가능했다. 그중 핵심이 되는 것이 무역이었다. 무역 장벽은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빚더미에 앉은 독일은 대공황을 맞아 침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미국과 유럽의 높은 관세가 수출까지 어렵게 만들어 경제 회복이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불만이 가득한 국민에게 히틀러가 "국가의 영광"을 재현할 것을 약속하면서 독일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한편, 일본은 빠르게 공업 발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석유나 철, 그리고 (당시 중요하던) 고무 등의 천연자원이 없어 고전하고 있었다. 일본이 석유와 고무 등이 풍부한 인도차이나반도로 진출하자 미국과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들이 가진 시장과 자원에 일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강한 경제 제재를 시행했고, 특히 1941년 미국이 일본에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하자 궁지에 몰린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기로 작정한다. 그렇게 일어난 사건이 1941년 12월 7일에 일어난 진주만 공격이다.

1940년 9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는 일본군

2차 대전 후 미국의 생각은 이랬다.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들이 필수적인 자원을 얻는 방법이 전쟁밖에 없다고 판단한다면 세계는 끊임없이 전쟁에 휩싸일 것이고, 자원을 가진 나라들은 강대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이 전쟁 대신 무역을 선택하도록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당근'과 그 질서를 위협하는 나라가 있을 경우 막강한 미국의 군사력을 사용하는 '채찍'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대대적인 변화—미국이 큰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변화—를 미국의 유권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임머바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도금시대(Gilded Age)에 미국 대통령이 세계 질서를 그렇게 조율하겠다고 했다면 미국 내 자본가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과 경쟁하던 모든 나라들의 공업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미국 기업들은 관세를 낮추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미국이 관세를 낮추면 상대국도 낮추게 되기 때문에 미국 기업들의 제품을 수출할 기회가 생긴다. 그리고 그런 무역을 통해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달러를 갖게 되면 그걸로 미국의 수출품을 살 것이었다. 시장 개방은 이렇듯 명백한 이점이 많았다."

하지만 자유주의 세계질서는 일본처럼 미국과 싸운 적국과도 무역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은 무서운 경제적 잠재력을 가진 나라였고, 미국은 머지않아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트럼프가 가진 지금의 사고를 형성한다.


마지막 편, '트럼프의 관세 집착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