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없게 된 사람들
• 댓글 63개 보기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지난달 기고한 글('The Rise of Right-Wing Nihilism')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독자들에게 사고실험을 하나 제안한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접하는 모든 미디어가 기독교 민족주의자(Christian Nationalists)가 만든 콘텐츠를 쏟아낸다고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주요 언론사는 물론이고, 스포츠를 봐도, 늦은 밤 토크쇼를 봐도 전부 기독교 민주주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심지어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도 모두 기독교 민주주의에 바탕한 내용이라고 상상해 보라. 그런 세상에서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아마도 세상을 바꾸고 싶을 것이다.
브룩스는 미국의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바로 그런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언론사의 뉴스도, 토크쇼도, 학교의 교과 과정도 전부 진보적인 어젠다를 전파하고 있으니, 그들은 자기가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을 가르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대학교의 심리학자가 노스웨스턴 대학교와 미시건 대학교의 학생 1,45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그들 중 88%가 수업과 대인 관계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진보적인 척했던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는 결과를 소개한다.
물론 브룩스가 소개하는 주장에는 비판의 여지가 많다. 기독교 민족주의는 국가를 기독교의 신이 사용하는 하나의 도구로 간주하고, 기독교적 가치와 국가 정체성을 결합하려는 정치, 종교적 이념이다. 이는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원칙에 반한다.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를 '종교의 자유'라고 포장하지만, 그 결과 그 국가에서는 하나의 종교만 살아남게 되기 때문에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잃게 된다. 기독교 민족주의를 원하는 우익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다원성에 반대하는 사람이 탄압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견해를 탄압하려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잠시 접어두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진보적인 견해가 가득한 진보적인 견해가 우세한 정치, 미디어, 교육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그들에게 세상은 어떤 느낌일까?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애국적인 노래들을 모은 음반을 보면 대개 전통적인 멜로디나 찬송가 곡조에 가사를 붙인 곡들인데,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불렀던 군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가령, 우리에게도 익숙한 '공화국 승전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 같은 노래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노래 중에 '조지아 행진곡'(Marching through Georgia)이라는 게 있다. 여기에서 한글 자막과 함께 들어 볼 수 있는데, 북군의 유명한 장군이었던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이 조지아주에서 남부 연합군을 무찌른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조지아 행진곡'은 당시 조지아 주민들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내용이었고,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셔먼 장군도 "이런 노래가 만들어질 줄 알았다면 나는 조지아로 진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 노래를 싫어했다. 하지만 승리한 북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노래를 불렀고, 지금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북군의 핵심이었던 뉴욕 사람들("Yankees")은 그런 노래에 그치지 않고, 셔먼 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에 맨해튼 한복판에 그를 기리는 황금색 동상을 만들어 세웠다.
동상 속 셔먼이 탄 말은 나뭇가지를 짓밟고 걸어가는데, 그 나무가 바로 조지아주의 자랑, 조지아 소나무(Georgia pine)이다. 조지아 주민들이 뉴욕에 와서 이 동상을 볼 때 어떤 느낌일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미국에서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깨닫게 되는 건, 노예제도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남북전쟁에 패한 남부 지역 사람들의 울분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북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엄연히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했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거다. 게다가 반란의 이유도 떳떳하지 않다.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한 반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북부—지금은 해안가 대도시 지역—의 문화가 주류가 되고,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남부나 쇠락한 지역의 백인들은 이중의 수치심을 느낀다. 빈곤에 대한 수치심과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문화적 수치심이다. 이들이 느끼는 울분은 민주당도, 공화당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런 그들 앞에 트럼프가 나타났다.

알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가 쓴 책 '도둑맞은 자부심'(Stolen Pride)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낙후된 지역에서 사는 백인들이 느낀 수치심의 정체를 사회학자의 눈으로 살핀 책이다. 궁금해할 것 같아서 저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면, 동부 해안 지역(보스턴)에서 태어나고, 서부 해안 지역(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가르친 백인 여성이다. 그럼 또 다른 궁금증이 들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사회, 문화적—그리고 젠더에서도—대척점에 있는 블루칼라 백인 남성들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인 저자가 선택한 방법은 흔히 민족지학(民族誌學)으로 번역되는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다. 이건 보통 다른 문화에 속한 연구자가 연구하는 대상이 되는 문화를 살펴볼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단순히 외부에서 문헌이나 조사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그 집단에 참여해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직접 관찰하고 대화를 나누며 일차적인 자료를 수집한다.
'도둑맞은 자부심'은 지난해 뉴욕타임즈 북리뷰 에디터들이 선정한 책이기도 하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24년의 책 중 하나로 골랐을 만큼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눈에 띄었다. 하지만 학부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나는 '민족지학적 연구는 읽기에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고, 트럼프 지지자들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는 게 있겠냐는 생각에 읽지 않았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읽어보라고 보내준 책은 내 선입견과 달리, 손에서 놓기 힘들만큼 몰입감이 있었다. '도둑맞은 자부심'은 단순히 연구 대상에 대한 학술적 관찰과 서술로 이뤄진 책이 아니라,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띠고 있다. 게다가 그 인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마치 '숏컷'(Short Cuts, 1993), '매그놀리아'(Magnolia, 1999) 같은 영화에서 한 에피소드의 배경 인물이 다음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한 챕터에서 인터뷰 안에 지나가듯 언급된 인물이 다음 챕터에서 주인공이 되어 등장한다.
이건 극적인 효과를 노린 구성이 아니라, 한 커뮤니티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각과 사연을 가진 각각의 인물이 단순히 조사 연구 속에 등장하는 데이터 포인트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도와주는 뛰어난 방법이다. 이 책이 영화처럼 다가오는 건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다. 켄터키주 파이크빌(Pikeville)이라는, 인구 7천 명의 작은 도시, 좀 더 정확하게는 미국에서 KY-5로 분류되는 선거구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캐릭터다.

켄터키주는 미국에서 가구당 소득이 가장 낮은 10개 주 안에 꾸준히 들어가는 가난한 주다. 하지만 저자가 더 가난한 미시시피주, 루이지애나주가 아닌 켄터키주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 주, 특히 KY-5라는 지역구가 미국 내에서도 백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역 전체가 겪은 일이다.
사실 켄터키주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켄터키가 북부와 뜻을 같이한 것도 아니다. 주지사는 남부 연합을 지지하는 사람이었고, 두 진영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여론이 남부 지지와 북부 지지로 양분되었다. 20세기 들어와서 켄터키주, 특히 파이크빌에 돈이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즉, 항상 가난했던 동네도 아니라는 얘기다. 정치적으로도 루즈벨트, 케네디, 빌 클린턴처럼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 당선시킨 지역이다.
문제는 파이크빌이 있는 켄터키주 동부 지역이 한때나마 잘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나오는 석탄 때문이었다는 데 있다. 20세기 미국의 전기 생산을 뒷받침하던 석탄 산업은 이제 사양산업이 되었고, 켄터키주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낡고 뒤떨어진 동네'로 취급받고 있다. 특히 애팔래치아 산맥에 속한—파이크빌이 속한—켄터키 동부(Eastern Kentucky) 사람들은 다른 켄터키 주민들 사이에서도 놀림감이 된다. KY-5 선거구는 미국의 435개 선거구 중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선거구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차별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 유일하게 대학원까지 졸업한 애슐리라는 여성은 보스턴에 갔던 일을 들려준다. 그가 한 서점을 방문했는데 (아마도 애슐리의 억양을 들은) 카운터의 점원이 어디서 자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제가 켄터키 동부 출신이라고 말하자 점원은 카운터 너머로 몸을 내밀어 제가 맨발인지 아닌지 확인하더군요. 농담이었겠죠. 하지만 그 사람은 제게 그런 농담을 해도, 저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트럼프를 지지한 가난한 백인들에 관한 많은 글을 읽었어도 이 책이 흥미를 유지하는 건, 저자가 그들의 생각을 자부심과 수치심이라는 틀로 분석하기 때문이고, 분석 대상이 파이크빌이라는 작은 동네이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특수성 안에 들어있다"(In the particular is contained the universal)는 말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특정 개인들의 사연이지만, 왜 가난한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뽑아 자기 발등을 찍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저자는 애팔래치아 지역 사람들이 '자부심의 역설'에 갇혀있다고 설명한다. 똑같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난한 이유를 사회적 요인, 즉 환경 탓을 하는 반면, 이 지역 사람들은 예전부터 근면과 성실에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성공하면 자부심을, 실패하면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가난하게 된 이유는 광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수치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게 느낀다는 데 있다.
정부에서 식료품 지원금(흔히 "푸드 스탬프"라고 부르고, 신용카드 형태로 지급되는데, 이걸로 식료품을 살 때는 지불 수단이 쉽게 드러난다)을 받는 것도 창피해서 자기 동네가 아닌, 옆 동네에 가서 음식을 사는 이 지역 사람들의 수치심을 어루만져 주는 것은 마약과 트럼프다. 물론 마약을 하게 되면 더 큰 수치심의 수렁에 빠지게 되고, 트럼프를 찍으면 자기가 받던 사회복지가 줄어든다. 그럼에도 트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트럼프가 나의 힘든 사연을 들어주고 이해하는 유일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현대 미국의 대선에서는 유권자의 감정을 더 잘 읽는 후보가 당선되었다. 시청률에 민감한 쇼비즈니스에서 일한 트럼프는 이를 누구보다 잘 읽어낸다.
'도둑맞은 자부심'은 한 극우인사가 2017년 4월에 파이크빌에서 집회를 열기로 한 것을 두고 벌어지는 일들과 그 집회를 바라보는 지역 주민들이 생각을 기록하면서 진행된다. 매튜 하임바크(Matthew Heimbach)라는 이 사람은 왜 인구도 많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는 그 존재도 알지 못하는 파이크빌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을까? 그가 이끄는 극우단체인 '전통주의 노동자당'(Traditionalist Worker Party)은 백인우월주의 단체이고,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한때 살 만했던 지역의 블루컬러 노동자들의 소득이 떨어지면 백인우월주의에 끌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임바크와도 직접 만나 인터뷰하지만, 극우단체들도 각자의 계산이 다르다. 가령 전통적인 KKK와 신나치주의자는 원하는 것이 다르고, 어떤 의미에서는 경쟁 관계에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가난한 백인이어도 하임바크 같은 외부의 인종주의자가 들어와서 소동을 피우는 것을 싫어한 주민들이 많았던 것이다. 8장에 등장하는 와이엇이라는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친구(하임바크)가 왜 켄터키 동부에 왔는지 아세요? 우리가 가난하고 멍청한 백인 힐빌리들이라서 무조건 자기 말을 따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알겠어요? 난 가난하고 멍청하고 백인이에요, 맞죠? 그러니까 그 친구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오는 거예요.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난 힐빌리일지는 몰라도 레드넥은 아니에요. 내 혈통을 내 정체성과 혼동하지 않아요. 내겐 내 생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을 하나만 꼽으라면 9장에 등장하는 토미다. 그의 아버지는 1980년대 탄광 경비에서 해고되었고, 그다음으로 일하게 된 제재소도 문을 닫으면서 최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했다. 그러면서 부모는 술에 의존하게 되고, 주위에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술과 마약으로 죽거나, 자살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는 자기가 청소년 시절에 방황할 때 누군가 자기에게 비난의 대상을 정해줬다면 그대로 믿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하임바크가 백인 민족주의가 문제의 빠른 해결책인 것처럼 팔고 있다면서, "자기 자신을 비관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강해지고 성공의 길로 접어든 것처럼 느끼게 해주려는 거죠. 하지만 인종주의를 이용하는 것은 예전의 나 같은 사람에게 술 한 잔 더 건네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저자가 만난 파이크빌 사람 중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인종주의자도 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간단한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심지어 매튜 하임바크마저 생각을 바꾸고 자기가 이끌던 단체를 나온다.) 이 책을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부심과 수치심의 사이에서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남들이 뭐라 해도 자기만의 생각을 지키며 자존감을 잃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환경에 사는 사람에게도 보편적인 울림을 준다.
이 책을 펴낸 어크로스 출판사에서 오터레터 독자 10명에게 책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책을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로 의사를 표해주시면 제가 한국 시각으로 일요일 오전에 추첨해서 발표하겠습니다. 응모하시는 분들은 꼭 이메일을 확인해서 답장을 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