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훌륭한 글을 많이 남겼지만, 그가 했던 이야기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건 1999년 말, 그러니까 전 세계가 21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에코는 지난 밀레니엄(1000~1999)에 대해 다른 대담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확한 문구는 찾을 수 없지만, 각 대륙에 흩어져 살던 인류가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함께 살기 시작한 1천 년이라는 게 그의 평가였다.

그 평가가 인상적이었던 건, 당시 언론은 지난 한 해, 지난 10년, 아니 지난 100년을 평가할 때 항상 사용하던 진부한 문구, "다사다난(多事多難, 일도 많고 탈도 많은)"을 사용했고, 지난 1천 년을 대규모 전쟁과 폭력으로 가득했던 시기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사실관계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전에는 다른 대륙에 인간이 산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고, 살아도 그들은 괴물이라고 생각했다면, 지난 1천 년은 괴물에서 인간 비슷한 존재로, 인간이지만 싫은 적으로, 그리고 비로소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첫 시기다.

나는 그 인터뷰를 읽고 움베르토 에코가 같은 시대를 다르게 인식할 수 있었던 이유를 오래 생각했고, 내가 내린 결론은 그가 잡는 기준점, 혹은 시간의 틀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는 그 일이 일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기준으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오늘 소개하는 미국 작가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 리베카 솔닛)의 글이 바로 그 얘기를 한다.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친구를 갖기 위해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To see takes time, like to have a friend takes time).”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여러 사람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누가 제안을 하나 했다. 각 사람이 자기가 기후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를 돌아가며 얘기해 보자는 것이다. 그 친구는 그런 계기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내 경우 그 과정은 여러 단계에 걸쳐 천천히 일어났다. 기후 변화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걱정을 하게 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기로 하는 과정이 내게는 점진적인 변화였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몇십 년에 걸쳐 조금씩 일어났지, 한 번의 큰 변화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인생의 전환점, 어느 순간의 깨달음, 갑작스러운 전환, 돌파구처럼 짧은 시간에 변화가 일어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영화에서도 첫눈에 반하는 사랑 이야기,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꾸는 연설, 나쁜 놈 하나를 쏴서 해결하는 문제처럼 쉬운 해결, 확실한 승리를 선호한다. 옛날식 사고방식을 가진 급진주의자들도 다르지 않아서,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꾸는, 그런 혁명을 좋아한다. 하지만 정권의 교체가 문화의 변화, 의식의 변화는 아니다.

종교도 개종, 계시, 갑작스런 각성을 좋아하는 듯하다. 성경에서 사울(Saul)은 강한 계시를 받고 말에서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바울(Paul)이 된다. 석가모니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짧은 순간에 큰 깨달음을 얻었고, 무함마드는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계시를 받는다. 하지만 적어도 석가모니와 무함마드의 경우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의도적으로 탐구하는 긴 여정이 있었다. 나도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좋아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는 경향이 있다.

카라바조가 그린 '바울의 개종' (이미지 출처: Wikipedia)

내가 20년 넘게 불교 주변을 얼쩡거리며 알게 된 건, 불교의 가르침 자체는 꽤 단순하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핵심에 관해서는 하루를 투자해서 열심히 읽어 파악할 수 있다. 한 시간, 혹은 15분 만에도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불교가 가르치는 가치관, 관점, 통찰력을 내 안에 깊이 새겨넣어서 그것들이 내게서 반사적으로 나오고, 내가 작동하는 원리가 되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파악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원칙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건 한평생—윤회설을 믿는다면 여러 번의 생—이 걸리는 작업이다.

대부분의 진리가 그렇다. 듣거나 외우기는 쉽지만—우리가 느린 것을 힘들어하듯—실천하기는 힘들다. 거기에 헌신하고, 인내하고, 다른 길로 빠졌다가 돌아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진리가 뭔지 아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소시오패스는 선한 게 뭔지 알지만 그걸 무기화하고, 성자는 스스로 선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한 번에 목표를 달성하는 게 아니라, 그걸 향해 어렵게 나아가는 스토리, 때로는 뒤로 미끄러지고, 허우적대고, 멈추기도 하면서 천천히 진보하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어쩌면 소설이나 전기가 잘하는 게 그걸 거다.

의미 있는 소설의 경우 누군가가 성장하고, 변화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에서 주인공 핍은 에스텔라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신분 상승에 대한 야망, 그리고 자기가 태어난 계층에 대한 수치심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고,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에서 엘리자베스 베넷과 피츠윌리엄 다아시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교만에서 비롯된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서로 사랑에 빠진다. '리틀노호스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한 마지막 보고서(Last Report on the Miracles at Little No Horse, 한국어 번역 없음—옮긴이)'의 초반에 등장하는 수녀는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사랑을 발견하고, 사랑을 잃고, 나이를 먹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캐릭터가 형성되고, 관계가 만들어지고, 무너지고, 시간이 걸려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오만과 편견' 삽화 (이미지 출처: PICRYL)

사랑이 깨지는 경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슬픔이 마치 기차가 지나는 역처럼 다섯 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증, 수용)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루는 이랬다가, 다음날은 저랬다가, 제자리를 맴돌다가, 다시 뒤로 후퇴하고, 슬픔 속에서 살면서 체념(reconciliation, 화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마치 통나무집을 만드는 것처럼 힘들게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지, 야구에서 주자가 미끄러지며 도루하듯 얻어내는 게 아니다.  

당신은 내일이 오늘과 다르기를 원하겠지만, 당신의 내일은 오늘과 비슷하거나 더 나쁠지 모른다. 하지만 내년은 올해와 다를 것이다. 조금씩 일어나는 변화가 쌓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의 나무는 어제의 나무와 비슷해 보인다. 아기도 그렇다. 많은 변화들이 극적이지 않은 성장, 변화, 혹은 쇠퇴의 형태로 일어나고, 그게 일어나는 시간의 단위가 커서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은 참을성이 부족한 종(種)이다. 미래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지금 당장 갖고 싶은 마음에 과거가 어땠는지 잊으며, 때로는 참을성이 없어서 우리 시대에 획득한 최고의 업적이 사실은 변화를 위한 길고 느린 노력의 결과라는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역사의 호는 길지만, 정의를 향해 휘어있다(the arc of history is long but it bends toward justice)"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게 어느 쪽을 향해 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킹 목사가 그 호가 예각이 아니라 완만한 곡선이라는 의미로 말했다고 확신한다.) 때로는 그 호가 불현듯 보이지만, 그건 변화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뤄졌지만 우리가 비로소 인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킹 목사가 말했던 원문은 "도덕적 우주의 호는 길지만 정의를 향해 휘어있다"이지만 솔닛이 인용한 버전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지 출처: TOM FLETCHER)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상태나 성격이 변했다는 사실, 혹은 당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사람의 모습이 빛바랜 옛날 사진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은 적이 있을 거다.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사라졌던 사람이 다시 나타나서 우리 중 누군가가, 혹은 장소가, 혹은 시스템이 변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거다. 같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던 사람들은 변화가 워낙 조금씩 쌓였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변화 자체는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다.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날 거라고 기대하고, 기대처럼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습관은 정치에 나쁜 영향을 준다. 착각(정보 부족)에 기반한 절망은—한 번의 선거운동, 한 번의 시위처럼—짧은 시간 동안 노력했다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흔히 발생한다. 한 번 졌다는 이유로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짓고 그만두는 건, 동전을 한 번 던져도 반드시 앞면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거나 다름없다.

이러한 조급함과 주의 집중력 결핍이 가져오는 또 다른 큰 피해는 정치적 절차가 막바지에 이를 때, 그러나 아무도 그 시작을 기억하지 못할 때 나타난다. 대부분의 긍정적인 정치적 변화의 마지막 단계는 권력자나 단체(가령 대법원 같은—옮긴이)가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일으킨 운동은 대부분 풀뿌리 운동으로 시작한다. 권력자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느린 조망(slow perspective)과 긴 시선을 통해서만 권력이 보통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회운동과 선거운동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운동들은 초기에만 해도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이고,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본 가장 뛰어난 영화가 2022년에 나온 다큐멘터리 'To the End(끝까지)'였다. 2018년에 30세 이하의 사람들이 모인 미국의 기후단체 선라이즈 운동(Sunrise Movement)가 만들어지는 모습, 그들이 그린뉴딜(Green New Deal) 정책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떻게 바이든 선거운동본부의 기후 정책에 영향을 주었음을 설명한다. 현 미국 정부가 통과시킨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정책 역시 선라이즈 운동의 덕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물론 애초에 목표했던 것보다 후퇴하고, 타협 끝에 작아졌지만, 그래도 2022년에 결승점을 통과해서 법안이 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To the End'는 선라이즈 운동(Sunrise Movement)을 설명한다. (이미지 출처: The Princeton Progressive)-

이 다큐멘터리는 처음에는 변화를 꿈꾸는 젊은 이상주의자들이 모여 시작한 이 운동의 성과를 5년이라는 시간의 틀로 추적하며 젊은이들, 풀뿌리 운동, 그리고 급진적이고 새로운 생각이 힘을 얻는 과정을 보여준다. 같은 이야기를 짧은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정치인이 우리에게 좋은 걸 하나 준다'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긴 버전으로 이야기하면 하나의 운동이 우리가 가능하다고, 논리적이라고,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변화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압력을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권력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To the End'에서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선라이즈 운동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알렉스 오키프(Alex O'Keefe)가 차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집마다 돌아다니며 설득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전략에 대해 비평합니다. '어떻게 이길 건데? 전략이 뭐야? 그거, 현실적이야? 가능한 거야?' 우리가 이기건 말건 상관없어요. 우리가 지금 당장 하고 있는 건 차에서 짐을 내리는 일입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어요."  

알렉스 오키프의 인내심 있는 헌신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2019년에 했던 유명한 선언을 연상시킨다. "기후 재난을 피하려면 거대한 성당을 짓는 사람들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천정을 어떻게 지을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먼저 건물의 기초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이해하는 툰베리의 비유는 두 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갖고 있다. 하나는 기후 위기라는 게 다양한 종류의 작업을 요하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해결책이 계속해서 진화할 것임을 명심하며 화석연료가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태양광 발전, 풍력 발전만 해도 그렇다. 21세기 초만 해도 이 두 가지는 불충분한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저렴하고 효율이 높은 기술이 되어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전기를 저장하는 배터리에 사용되는 물질과 기술도 무섭게 발전 중이다.

빠른 속도를 좋아하고, 느린 변화를 추적하기 힘든 사람들이 파괴에 흥분하고, 건설을 지루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천천히 진행되는 파괴도 있다. 환경사학자인 롭 닉슨(Rob Nixon)이 "느린 폭력(slow violence)"이라고 이름 붙인 야생동식물의 급격한 감소, 계절의 불안정화, 20세기 중반의 진보적 경제정책의 해체 같은 것들이 바로 느리게 진행되는 폭력이다. 이런 폭력은 재난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느리게 진행되는 바람에 기준점도 분명하지 않고, 우리의 주의집중력으로는 꾸준히 추적하기도 힘들고, 어제와 오늘 사이에 크게 달라진 게 없으니 언론사가 강한 헤드라인을 뽑기도 힘든 뉴스다.

뉴스의 주기가 빠르다는 사실은 기후 변화와 관련해서는 갑자기 일어난 일, 지난 밤에 일어난 예상치 못한 홍수나 화재를 이야기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같은 기후 소식이라고 해도 좋은 뉴스는 딱딱하고 기술적—먼 훗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기술적 발전이나 정책의 통과 소식—이거나, 아니면 조금씩 천천히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변화의 완만함을 설명하는 것을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사실은 그 반대다. 변화는 느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이를 위해서는 이 작업을 반드시 끝내겠다는 굳은 결의와 헌신이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건 패배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얻게 될 승리가 어떤 조건을 갖고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페이스를 조절한다. 운동가, 운동단체들도 그래야 하고, 세상을 바꾼 변화를 만들어 낸 과거의 운동들이 어떤 시간표를 갖고 움직였는지 배워야 한다.

변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느림을 옹호하는 사람이다. 반응이 늦거나 하기 싫어서 느리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일의 진행을 인지하기 위해 인식을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나는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

레베카 솔닛 (이미지 출처: Literary H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