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비밀
• 댓글 2개 보기아래의 글은 199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한 가족의 이야기다. 내용 안에 자세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겠지만, 분쟁 지역을 탈출해 미국으로 들어간 이민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가족 중 가장 어린 딸 도리 사마드자이 보너(Dori Samadzai Bonner)로, 원고 없이 이야기해야 하는 스토리텔링 행사인 모스(The Moth)에서 2012년에 발표한 내용이다.
내용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옮겼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의역을 한 대목이 있다. 현장에서 녹음된 이야기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있던 시절이죠. (소련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다.) 제 어린 시절 기억에 아빠는 집에 없던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빠에 관해 얘기하는 것 자체가 집에서는 금기였기 때문에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가끔 아빠가 제게 관심은 있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제 어린 시절 아프가니스탄은 전쟁 중이었습니다. 폭탄 터지는 소리와 미사일 소리를 매일 들으면서 일상생활을 하는 건 끔찍한 일이었죠. 제가 열 살이 되자 폭음은 우리 가족이 살던 카불에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미사일이 목표물에 가까워지면서 내는 휘파람 소리 비슷한 게 있어요.
그즈음, 정권이 바뀐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당시 정권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에게는 아주 나쁜 소식이었죠. 역사적으로 새로운 정권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뺏는 일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제 부모님은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비자를 통제해 아무도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어요. 남아서 나라를 위해 싸우라는 거였죠. 출국하려면 서류를 위조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대 초, 부모님은 오빠와 저를 데리고 한밤중에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위조한 서류를 가지고 미국에 입국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서 임시 체류 허가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이민국이 저희 서류를 심사하는 동안 저희는 취업 허가증과 운전면허, 사회보장번호(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와 유사하다) 등을 받을 수 있었어요. 캘리포니아에 와있던 친척들의 도움으로 저희는 모두 정착해서 일을 할 수 있었죠.
그렇게 5년이 흐르면서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의 평온한 삶에 익숙해졌습니다. 당시 제가 가진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엄마가 제 귀가 시간을 늦춰줘서 밖에서 늦게까지 친구들과 놀 수 있을까, 였습니다. 그만큼 걱정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한 의류매장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제게 전화를 하셨어요. 아빠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흥분이 느껴졌습니다. 집에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눈치였어요. 아빠는 제게 이민국에서 편지가 한 장 왔으니, 빨리 집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했어요. 당시 집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저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저보고 읽고 설명을 해달라는 거였죠.

미국 이민국이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테니 설명하자면, 그 사람들은 그냥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지 않아요. 집에서는 이민국에서 왜 편지를 보냈을지 궁금해하면서도 좋은 소식일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저희가 먼저 문의하지도 않았는데 편지를 보낸 거니까요.
집에 도착하니 아빠는 경비원 유니폼—당시 아버지는 경비원으로 일하셨죠—도 갈아입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저뿐 아니라, 엄마와 오빠에게도 전화해서 빨리 집에 오라고 했고, 우리 가족은 식탁에 모여 저더러 빨리 편지를 읽고 설명해달라고 했습니다.
"어서 읽어 봐. 무슨 내용이냐?"
저는 편지를 들고 중요한 내용만 빠르게 읽어 봤습니다. 저의 가족의 이민국 면담이 앞당겨져 다음 주로 정해졌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갖고 있는 이민 관련한 법적 서류, 가족 사진첩, 그리고 다른 중요한 문서들을 챙겨 오라고 적혀있었어요. 우리는 모두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날이 드디어 온 거니까요.
인터뷰 날, 우리 가족은 로스앤젤레스 중심가에 있는 연방정부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차로 4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죠. 입구에 있는 금속탐지기를 통과하고, 보안요원의 검색을 마친 후, 저희는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민국 직원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직원은 저희를 한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의 문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오면 안 될 곳에 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 방에 와있던 사람들을 보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거 같았습니다. 그중 몇 명은 울고 있었죠. 그곳에 있던 직원이 "이름을 부를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난 후 아버지는 저보고 직원에게 가서 우리를 부른 이유가 정확하게 뭔지, 오늘 면담은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면담이 끝나는 대로 일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경비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원에게 물었죠. "오늘 면담이 얼마나 걸릴까요? 제 아버지가 일하러 가야 해서요." 그랬더니 직원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하러 가시는 건 문제가 없지만, 이제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일하셔야 할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저희는 국가를 배반한 사람들이니까요. 저는 자리에 앉아서 아빠에게 제가 들은 걸 말씀드렸습니다. 제 얘기를 듣는 아빠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습니다.
제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아빠를 봤는데, 아버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통증이 아니었고, 계속 아파하시는 걸 보고 저는 직원에게 전화를 사용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안 된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럼 화장실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직원의 허락을 받고 문을 열고 나가자, 긴 복도가 있었습니다. 저는 좌우를 둘러보며 공중전화를 찾았습니다. 복도 맨 끝에 있는 전화기를 발견한 저는 달려가서 수화기를 들고 저희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는 변호사에게 화가 난 상태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밥을 굶어도 변호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돈을 아껴 변호사를 구한 건데,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상황에 변호사는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때 제 나이가 18살이었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의 목소리는 제 또래의 여자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그 여자에게 변호사를 바꿔 달라고 했지만, 계속 안 된다고 하더군요. 저는 지금 비상 상황이니 당장 조디(변호사 이름)를 바꾸라고 소리쳤죠.
그렇게 해서 조디가 전화를 받았는데, 저는 변호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조디에게 이민국에서 문제가 생겼고, 아버지가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있는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도 못 하게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조디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테니 다른 데 가지 말고 아버지 곁에 있으라고 하더군요.
우리 가족은 계속 앉아 있었고, 아버지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30분이 좀 넘게 기다렸더니 한 남자가 와서 우리 이름을 부르더니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족 네 명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 남자를 따라 갔습니다. 저희가 도착한 곳은 아주 작은 사무실이었어요. 얼마나 작은지 저와 아빠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죠.
그 방에는 한 남자—아마도 판사—가 책상에 앉아서 저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아빠와 저는 뻘쭘하게 서서 기다렸습니니다. 그 남자는 마침내 고개를 들더니 저희에게 서류를 한 장 건네줬습니다. 제가 읽어 보니 비자가 3개월 연장되었으니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적혀있었죠. 우리는 그곳을 나와 곧장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 후 3개월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3개월 동안 매일매일 추방을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집배원이 집 우편함에 뭔가를 넣는 것을 보면 마치 끔찍한 시험지를 받는 기분이었죠. 네 사람 중 아무도 우편함을 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이상한 행동을 했어요. 어머니와 같은 침실을 사용하지 않고 거실에 나와 소파에서 주무셨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주무실 때는 꼭 옷 두 벌을 옆에 놔두셨죠. 혹시 밖에 인기척이 있으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블라인드 사이로 밖을 살폈습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고, 우리는—이번에는 변호사와 함께—다시 이민국으로 갔습니다.
이번에 저희를 만난 판사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무서워 보이는 나이 든 남자였죠.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얼굴에 미소도 짓지 않는 그 판사를 보며 겁을 먹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대화는 제가 가족을 대표해서 통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죠.
판사는 저희 변호사와 잠깐 대화를 나눈 후, 제 아빠를 보며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통역할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빠는 저를 가리키며 "내 딸이 통역을 한다"고 했죠. 그 말을 들은 판사는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가씨(Young lady),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아버지에게 통역해야 해요. 조금도 빼거나 보태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는 말은 나에게 있는 그대로 통역해야 해요. 조금도 빼거나 보태서는 안 됩니다."
그러고는 아빠를 향해 아주 고압적인 자세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 들어올 때 서류 위조한 거 맞죠?"
아빠는 그렇다고 답하면서, 하지만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면 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판사는 아버지의 말을 자르고는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설명에 관심 없고, 들을 필요도 없어요." 그다음에 이어진 대화는 계속 그런 식이었습니다.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했어요. 판사는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법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시민권을 주지 않습니다. 줄 수도 없고, 줄 생각도 없습니다." 이 말을 옮긴 저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기도했습니다.
제가 다시 눈을 뜨자 이상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빠가 의자에서 일어나 바지에서 허리띠를 풀고 있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어요. 아빠가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빠가 그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 몰라 당황했습니다. 아빠는 이어서 셔츠의 오른쪽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아닌 판사를 쳐다보며 아프가니스탄 말로 "이게... 공산주의자들이 제게 한 짓입니다"라고 말하며 옆구리에 10cm가 넘는 칼자국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빠는 뒤로 조금 돌더니 바지를 내리고 "이게 공산주의자들이 제게 한 짓입니다"라며 총상 흉터 세 개를 가리켰습니다. 다음에는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고는 발가락을 보여주며 "이게 공산주의자들이 제게 한 짓입니다"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플라이어로 아빠의 발톱을 뽑다가 생긴 흉터였습니다.
저는 아빠의 말을 들으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저는 아빠가 들려주는 끔찍한 얘기를 판사에게 통역하고 있었지만, 처음 듣는 얘기였거든요. 제 어린 시절, 아빠가 왜 사라졌었는지를 판사와 함께 듣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감옥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계셨던 겁니다. 아빠의 말을 영어로 옮기면서 제게 엄청난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자기 몸에 있는 흉터를 다 보여준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님께서 법복을 입고 그곳에 앉아 저를 판단하시기는 쉽겠죠. 하지만, 저의 쪽으로 오셔서 저를 인간 대 인간으로 보시면 제가 제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한 일을 이해하실 겁니다. 저는 (서류를 위조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판사님께서는 제가 서류를 위조한 것 때문에 시민권을 허락하지 않으시겠지만, 만약 판사님께서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하셨다면, 판사님도 저와 똑같이 행동하셨을 것을 저는 압니다.
판사님께서 저와 같은 사람에게 특별 대우를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미국 국민에게 보여주셔야 한다면, 저도 이해합니다. 저를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보내십시오. 기꺼이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제 아이들만은 제발 미국에 남게 해주십시오. 제발 제 아이들에게 새로운 거처를 허락해 주십시오." 이 말을 마친 아빠는 고개를 숙이고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빠의 이야기를 다 들은 판사는 휴정하고 재판정을 나갔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판사가 법정으로 돌아왔는데, 아까와는 달리 법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휴식 시간이 끝나지 않은 줄 알았죠. 하지만 판사는 손에 뭔가를 들고 판사석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가족은 왜 판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건지 몰라 긴장했습니다. 판사는 다른 사람은 보지 않고 아빠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 앞을 지나쳐서 아버지 옆에 선 판사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마드자이씨, 손을 펴보세요." 아빠가 손을 펴자, 판사는 아빠의 손에 도장을 쥐어 주며, "스마드자이 씨, 저와 함께 자녀분들의 서류에 도장을 찍으시죠"라고 했어요. 저와 오빠의 망명 허가 서류였습니다. 판사는 페이지를 넘기더니 아빠와 엄마의 서류에도 같은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아빠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말했습니다.
"미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리와 그의 가족은 미국에 도착한 지 18년 만인 2009년 1월 29일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여기에서 도리와 가족의 옛날 사진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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