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 당시 록산 게이 씨의 몸에 일어나고 있던 많은 변화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십 대 아이들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해 서로 상충하는 감정들(ambivalent feelings)을 갖죠. 그러고 나서 비로소 새로운 (성인의) 몸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호르몬이 변화하고, 신체적인 변화를 겪고, 더 성적으로(more sexual) 변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더 성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지납니다.

저는 그런 변화를 겪는 동안 (청소년에게) 많은 혼란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게이 씨는 그런 모든 변화를 겪는 동시에 성폭행을 극복하고, 혹은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었죠. 그리고 게이 씨의 몸은 체구를 키우려는 시도로 인한 과식의 결과로 변화하고 있었고요. 그러니 그 시기에 게이 씨는 자신의 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복잡하셨을 것 같습니다.

록산 게이: 어떤 면에서는 복잡했고,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 체중이 아주 많이 늘었던 것 같은데,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제 체중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십 대 아이들이 갖게 되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문제나 걱정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15살이 될 때까지 생리도 하지 않았어요.

호르몬 변화 같은 것들을 경험했지만 성관계는 생각만 해도 두려웠어요. 그래서 다른 아이들처럼 이성 친구를 사귀는 대신 상상 속의 남자 친구를 갖는 쪽을 택했죠. 제 체구가 계속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로지 체중의 증가만 생각했습니다.

진행자: 엑서터(Phillips Exeter Academy, 미 북동부 뉴햄프셔주에 있는 명문 사립고등학교–옮긴이)를 나오고 예일 대학교에 진학하셨죠. 그러니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는 집에서 떨어져서 생활하는데, 그런 생활 때문에 아무런 제약 없이 식사하시기 쉬웠나요?

뉴햄프셔주에 위치한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이미지 출처: 엑서터 아카데미 페이스북)

록산 게이: 네, 물론이죠. 특히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첫 2년 동안 저는 음식에 엄청 집착했습니다. 학교 내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얼마나 쉽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는지 몰라요. 게다가 대학에 간 후로는 더욱 그랬죠. (예일 대학교가 있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은 (엑서터 고등학교가 위치한) 엑서터보다 훨씬 큰 도시니까요. 그래서 저는 정신줄을 놓은 거죠.

진행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방학 때 집에 오면 신체적으로 변해 있었다고 책에 쓰셨어요. 계속해서 체중이 증가하고 있었다고요. 게이 씨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십 대 후반에 아이티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신 분들이고요. 책 내용을 인용하면 "아이티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 섬 음식을 사랑하지만 탐식은 좋지 않게 생각한다(Haitians love the food from our island, but they judge gluttony). 그런 아이티 가정에서 누군가 과체중이면 그것은 가족의 문제가 된다"라고 하셨어요. 부모님께서는 게이 씨의 체중 증가를 어떻게 다루셨나요?

록산 게이: 패닉에 빠지셨죠. 제가 원래 마른–혹은 적어도 정상–체형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셨죠. 그래서 그분들 눈에 저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던 거예요. 이유를 모르셨죠. 뭔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만큼 눈치 있는 분들이었지만 그게 뭔지는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제 체중을 줄이려고 하셨어요. 액상 음식만 먹는 다이어트를 시키셨고,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제가 아픈 일이 있었는데, 아플 때도 체중이 줄었구요. (웃음) 다이어트 캠프(fat camp)에도 갔어요. 그것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번 그런 다이어트가 끝나고 나면 체중이 돌아왔어요.

진행자: 그걸 원하셨기 때문인가요?

록산 게이: 네, 물론이죠.

진행자: 게이 씨의 체중과 관련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다른 접근법을 갖고 계셨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달랐나요?

록산 게이: 제 아버지는 엔지니어세요. 엄청난 분이죠. 임무 지향적(mission-oriented)이고 팩트에 아주 충실한 성격입니다. '운동을 하고 적게 먹으면 살은 빠진다. 끝.' 그랬기 때문에 아버지는 항상 제가 그런 정보를 따라 필요한 일을 수행해서 목표를 달성하고 더 나은 삶을 살라고 권유하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바랐던 건 그게 전부입니다. 항상 제게 바라던 바도 그거였고요.

제 생각에 어머니는 좀 더 공감적인 분입니다. 어머니는 몸의 사이즈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건지 이해하시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항상 제 사이즈에 대해 걱정하시고, 제가 살을 빼도록 항상 격려하셨지만, 그러면서도 감정적인 요소를 고려하셨어요.

다이어트 캠프는 여전히 미국 전역에서 유행하고 있다.

진행자: 엑서터와 예일에서 공부하실 때 인종과 계층, 그리고 지리적으로 동떨어진 존재로 느끼셨다고 하셨어요. 미국에 사는 흑인이고, 중산층, 혹은 중상류층 집안에서 자라셨고, 교육을 많이 받으셨잖아요. 게다가 글을 쓰시고요. 그러니 동료 학생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흑인, 혹은 아이티계 미국인이라는 내러티브에 들어맞지 않으셨어요.  

록산 게이: 네, 맞습니다. 아이티계 미국인이라서 당시 미국 내 흑인들의 문화에 별로 노출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러니 백인 학생들은 제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죠. 제가 네브래스카주에서 왔다고 하면 그런 곳에도 흑인이 있는지 몰랐던 아이들이니까요. (웃음) 따라서 저는 잘해야 신기한 존재였죠. 하지만 저의 흑인 정체성(blackness)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했습니다.

제 흑인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건 흑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저와 그들은 문화적 맥락이 서로 달랐으니까요. 그랬기 때문에 흑인 학생들이 저를 낯선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걸로 저를 많이 놀리기도 했고요. 돌아보면 충분히 그럴 만했지만 말이죠. 하지만 백인 학생들과 달리 흑인 학생들은 저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저를 (흑인) 커뮤니티의 일부로 받아들였습니다.

진행자: 대학을 다닐 때 연극에 빠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일 대학교를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그 학교의 연극과 때문이었다고 하셨으니 그전부터 연극을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무대 뒤에서 일하셨다고 하셨는데, 그게 스토리텔링에 참여하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동시에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이었나요? 말 그대로 무대 밖에(offstage) 있을 수 있어서 말이죠.

록산 게이: 물론입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모임, 단체에 쉽게 참여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게 뭔가에 참여하는 방법이었어요. 저는 과목 외의 특별활동에 별 관심이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에 지원하려면 특별활동을 해야 해서 한 거였고요.

하지만 연극은 제가 제 열정을 발견한 곳이었고, 남들이 저를 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무대 뒤에서 일했죠. 저는 그저 제가 쓸모가 있으면 됐다고 생각했어요. 무대 장비팀이 제게 그런 공간을 제공한 거고요. 고등학교와 대학교 1, 2학년 때 가장 좋았던 기억들은 모두 연극과 관련이 있어요.

진행자: 제가 보기에는 글쓰기도 게이 씨에게 같은 걸 제공하는 것 같아요. 원하는 걸 말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여주면서도 물리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아도 되니까요.

록산 게이: 네, 기대는 그렇게 했죠. (두 사람 웃음)

진행자: 지금은 너무 유명해지셔서 이제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피할 수 없죠.

록산 게이: (웃음) 피할 수 없어요.

진행자: 게다가 인터넷도 있잖아요. 많은 곳을 다니시고 강연을 하시고, 또 TV에도 나오시죠. 사람들은 게이 씨가 어떤 모습인지 알죠.

록산 게이: 알죠. 제가 글 쓰는 사람이 된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무대나 화면에 나서고 싶지 않아서인데 말이죠.

진행자: (웃음) 너무 늦었네요.

록산 게이: 아이고. (웃음)

진행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게) 어떠신가요?

록산 게이: 음, 저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두려워해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하는지 익혀야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 앞에 나서고 청중과 교감하는 기회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저를 찾아오는 청중들은 아주 열정적인 분들이거든요. 이건 제가 누리는 특별한 행운입니다.

하지만 TV에 나가는 건 싫어해요. TV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그 이후에 날아오는) 많은 증오 이메일과 소셜미디어에서 벌어지는 트롤링은 정말 참기 힘들거든요. 그래서 가능한 한 제가 그런 (혐오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겁니다.  

진행자: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트롤링을 당하실 때는 그게 게이 씨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반 페미니즘 트롤링이 넘쳐나니까요.

록산 게이: 네. 제가 보기에 제게 오는 트롤링의 40%는 제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오는 거고, 30%는 제가 흑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 30%는 제가 뚱뚱하다는 이유로 오는 거예요.

진행자: 퍼센티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어요. (두 사람 웃음)

록산 게이: 맞아요. 저를 트롤링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요.

진행자: 세 가지를 모두 하는 사람들의 퍼센티지도 있나요?

록산 게이: 오, 맙소사, 그럼요.

진행자: 흑인이고, 페미니스트인 데다가 뚱뚱해서 싫어하는 건가요? (두 사람 웃음)

록산 게이: 네. 제 트롤들의 벤다이어그램은 그냥 원일 거예요. (두 사람 웃음)

(이미지 출처: Washingtonian)

진행자: 책에 본인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 쓰셨어요. 남성과 여성을 만난 일에 관해서도요. 과거에는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규정하셨는데 여전히 남자들에 끌리기도 하신다고 쓰셨습니다. 본인의 성적 지향이 혼란스러운 건 성적 지향이라는 게 원래 모든 사람에게 혼란스러운 것이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본인이 많은 것을 감추고 어떤 면에서는 성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 해서인가요?

록산 게이: 제게 성적 지향이 혼란스러운 건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여성에게 끌리는 것에 불안을 느끼거나 걱정하지 않아요. 그런 면에서 아주 행운이죠. 저는 제 삶 속에서 많은 문제와 싸워왔지만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에 죄책감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제게 어려웠던 건 (상대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게 제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는 건 그의 젠더와 무관하게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여자들과는 비교가 안되게 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어요. (웃음) 네, 그런 의미에서 힘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래, 나는 레즈비언이야'라고 생각했죠. 그랬더니 좋더라고요. 게다가 안전하기도 했어요. 여성들은 정말 좋거든요. 저는 여자들을 좋아하고, 그들에게 끌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남자들에게 다칠 위험이 없을 테니까요.  

진행자: 책 내용을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이렇게 쓰셨어요.

"나는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던, 나 자신에게도 말했던 절반의 진실을 믿기 위해 퀴어성(queerness)을 연기했다. 나는 행진했고, 퀴어임을 드러냈다(I marched, was here and queer). 나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프라이드 반지와 배지 같은 것들로 하고 다녔다. 나는 열정적으로 전투적이었다(I was passionately militant)."

왜 그러셨는지 이야기해주시겠어요?

"퀴어는 세상에 존재하고 사라지지 않으니 이 사실에 익숙해지라"는 의미의 이 표어는 LGBTQ+ 커뮤니티의 유명한 구호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Yale University Library)

록산 게이: 네. 제가 커밍아웃했을 때 저는 그게 완전한 진실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저는 여전히 남성에게도 매력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었죠. 하지만 저는 남자들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그래, 이곳은 내게 안전한 피난처가 될 거야'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저는 최고의 레즈비언이 되고 싶었어요. 그렇게 되면 남성에게 끌리는 제 감정이 사라질 거고, 제가 남성에게 끌리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도 함께 사라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최선을 다했어요. 제가 베이비 다이크(baby dyke, 커밍아웃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옮긴이) 역할은 꽤 잘했어요. (두 사람 웃음)

진행자: 저는 당시 게이 씨께서 바이섹슈얼(bisexual, 양성에 모두 끌리는–옮긴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제가 여기에서 바이섹슈얼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정확한가요? 틀렸으면 고쳐주세요.

록산 게이가 분명히 남성과 여성에 모두 성적으로 끌린다고 말했기 때문에 바이섹슈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행자 테리 그로스는 말을 잠시 멈추고 그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확인한다. 왜냐하면 록산 게이(완전히 우연이지만 이 사람의 이름이 이 주제 맞물려 헷갈릴 수 있다)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말을 했지만 바이섹슈얼이라는 말은 아직 직접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스가 아무리 분명해 보여도 넘겨짚지 않고 그 단어를 써도 되는지 확인하는 것은 자신이 정확하게 모르는 상대방의 성 정체성을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이 먼저 규정하는 것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얼마나 억압적인 역사를 만들어왔는지 알기 때문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배워야 한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록산 게이: 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좋습니다.

록산 게이: 제가 당시에는 레즈비언이라고 정체성을 밝혔지만,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사실이 아니기도 했으니까요. (웃음)

진행자: 맞아요.

록산 게이: 네, 그래서 저는 레즈비언이나 바이섹슈얼 모두 괜찮아요.

진행자: 네, 제가 좀 궁금했어요...

록산 게이: ... 물론 그 둘은 다른 집단이지만요. (두 사람 웃음)

진행자: 네, 그 정도면 제게는 충분합니다.

록산 게이: 그냥 분명히 해두려고요. (웃음) 그로스 씨에게가 아니라, 청취자들을 위해서 말이죠 (두 사람 웃음)

두 사람이 혹시라도 상대방이 오해하거나 상처를 받을까 봐 서로 무척 조심하는 이 대화를 보면 왜 록산 게이가 여자들 사이에서 안전함을 느낀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대목은 여기에서 22:05 지점을 찾아서 음성으로 들어보면 좀 더 분명한 느낌이 온다.)

진행자: 그래서 제가 궁금했던 것은 게이 씨께서 커밍아웃하셔서 행진하고, 열정적으로, 전투적으로 활동하신 것이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일부가 되려는 노력이었던 것인지였어요. 아웃사이더처럼 느끼셨다고 하셔서 말이죠. 게다가 본인이 그런 단체에 쉽게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이곳은 게이 씨께서 참여하고, 동질성을 느끼고, 편안하게 생각하고, 신체 이미지 때문에 배척받는 곳이 아니니 말입니다.

록산 게이: 맞아요. 정확히 그랬어요. 이 커뮤니티만큼 저를 환영해준 곳도 없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제가 커뮤니티가 필요했을 때 이 커뮤니티가 저를 반겨주었어요. 남들이 제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에게 인정받고, 섹시하고 아름답다고 받아들여지는 건 마치 물을 처음 발견한 듯한 기분, 깨끗한 공기를 처음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어요. 정말 소중했습니다. 제가 커밍아웃했을 때 그 커뮤니티가 저를 어떻게 맞아주었는지 저는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록산 게이 이야기 ④'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