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을 상대로 하는 미디어 프로그램 진행자들 중에서 내게 지적인 자극을 가장 많이 줬던 사람을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넣을 두 사람이 테리 그로스(Terry Gross)와 존 스튜어트(Jon Stewart)다. 그로스는 NPR(미국 공영라디오)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스튜어트는 코미디센트럴이라는 케이블TV 채널에서 뉴스 코미디를 진행한다. 이 두 사람이 내게 지적 자극을 줬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들이 초대하는 손님 중 상당수가 새로 나온 책의 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주일에도 몇 권씩 소개하는 그 책들이 가벼운 것들이 아니다. 400, 500페이지가 넘는, 내용이 꽉 들어 찬 책들을 어떻게 그렇게 자주 소개할 수 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은 혼자서 쇼를 끌어가지 않는다. 다양한 역할의 스태프가 있고, 무엇보다 '콘텐츠 연구팀'에 해당하는 작가들이 있다. 테리 그로스의 경우, 새로 나온 책과 기사를 뒤져서 인터뷰할 사람을 고르는 사람들만 10명 가까이 유지한다고 들었다. 항상 콘텐츠를 찾아 읽고 보는 사람들—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단다—이 매일 회의 때 자기가 읽은 책, 기사를 추천하고 총책임자이자, 진행자인 그로스가 그중에서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직접 책을 읽기 시작한다. 추천한 스탭이 중요한 부분을 표시했겠지만, 어쨌거나 직접 읽으면서 인터뷰에서 질문할 내용을 결정한다. 존 스튜어트도 다르지 않다. 자기 프로그램의 성격이 그렇다 보니, 거의 매일 책 한 권을 읽어야 하는 날도 많단다. 이게 가능할까?

테리 그로스와 존 스튜어트 (이미지 출처: This American Life, WIRED)

관심사와 정치적 성향, 문화적 배경이 비슷한 (둘 다 유대계다) 두 사람은 서로 친해서 가끔 함께 무대에 올라와서 대담을 진행할 때가 있다. 그런데 한 인터뷰에서 두 사람이 자기 직업 때문에 책을 엄청나게 읽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놀라운 말을 했다. 존 스튜어트가 "거의 매일 한 권씩 읽고 인터뷰를 해야 하니, 녹화가 끝난 다음 날이면 책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털어놨는데, 그 말을 들은 테리 그로스가 마치 자기와 같은 희귀병 환우를 만났다는 듯 깜짝 놀라면서 "나도 똑같다!"라며 자기가 읽은 책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 일이 흔하다고 했다.

혼자 그 인터뷰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큰 위안을 얻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나는 책 다 읽고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게 나의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내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가벼운 난독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믿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최근에도 지인에게 이 말을 했다가 "하하하... 네, 안 믿을게요"라는 말을 들었다—사실이다. 일단 남들보다 읽는 속도가 느리다. 모든 글을 느리게 읽지 않지만, 남들이 쉽게 페이지를 넘기는 글을 나만 아주 느리게 읽는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난독증(dyslexia)이라고 말하지 않고 "가벼운 난독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첫째, 내가 정식으로 진단을 받은 적이 없고, 둘째, 흔히 알려진 난독증세와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난독증 환자를 위한 폰트로 바꾼다고 해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아래에 무게를 많이 준 폰트는 난독증을 가진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Dyslexia Reading Well)

그렇다면 내 '증세'의 정체는 뭐고, 어디에서 온 걸까? 매슈 루버리(Matthew Rubery)의 책 '읽지 못하는 사람들 (Reader's Block: A History of Reading Differences)'에서 처음으로 답을 얻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고 보냈을 때만 해도 나는 스마트폰과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글 읽는 기술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건 사실이다) 현상을 다룬 책이라고 생각하고 받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도 내 읽기 버릇 때문일 수 있지만, 받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기대와 달랐지만, 훨씬 더 흥미로운 방향으로 달랐다. 내가 오래도록 궁금해하던 그 질문을 풀어주는 책이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은 "사람들은 읽기(reading)가 단순한 활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단일한 공통점이 없는 다양한 활동을 포함하는 용어"라는 거다. 사람들은 전형적인 읽기 행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책에서 인용한 한 연구자의 말을 빌리면, "읽기를 정의하는 것보다 읽기에 관한 책 한 권을 쓰는 편이 더 쉬울" 만큼 정의하기 힘든 것이 읽기라는 행위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면, "읽기란 누군가 책을 펼쳤을 때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들처럼 읽지 못한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오랜 굴레를 풀어줄 책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해방감을 느꼈다.

매튜 루버리는 남들처럼(=전형적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책의 구조도 아주 쉽고 명확하다. 여섯 가지 "읽기장벽"—난독증, 과독증, 실독증, 공감각, 환각, 치매—을 각각 한 챕터를 할당해서 설명하는 여섯 개의 챕터가 있다. 이 여섯 개의 챕터는 마치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에게 찾아갈 법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사례들로 가득한데, 가장 중요한 건 도입부("들어가며")다. 이 도입부가 읽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기 때문이다.

저자는 난독증, 혹은 읽기장애(reading disability)라는 표현에 의문을 제기한다. 읽기라는 게 인간에게 어떤 행위인지 안다면,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는 걸 과연 장애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거다. 그래서 저자는 읽기장애 대신 읽기차이(reading difference)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읽기란 어떤 행위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은 읽도록 태어나지—정확하게 말하면, 읽기에 적합하도록 진화하지—않았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쉽게 수행하게 된 기능들이 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손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기능을 사용할 수 없거나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는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읽기도 이렇게 인류가 자연스럽게 수행할 수 있는 기능으로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읽기는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기술이며 (생물학적 특질이 본래의 기능과 관계없는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는) 굴절적응과 (뇌의 신경회로가 외부 자극, 학습을 통해 구조적, 기능적으로 회복, 혹은 재조직되는) 신경가소성이 준 선물에 불과하다. 즉, 우리 두뇌는 읽기를 수행하도록 진화하지 않았고—인류 역사상 지난 한 두 세기 전까지 읽기는 사회에서 소수만이 수행하는 특별한 기능이었으니 당연하다—우리는 뇌에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도록 된 부분을 동원해서 읽기라는 행위를 수행한다는 얘기다.

이 침팬지보다 문제를 빨리 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공교육이 확산되고 모두가 읽는 능력을 갖춰야 하는 세상이 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음치'는 장애가 아니지만 누구나 노래를 (잘) 할 수 있어야 하는 몇몇 문화권에서 음치는 고쳐야 할 문제로 여겨지는 것처럼, 과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을 사람들이 모두가 읽을 수 있어야 하는 세상에서 장애인처럼 여겨지게 된다.

가령 미국인들은 "나는 노래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지, "나는 음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KBS 뉴스)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 "정상적인" 읽기 혹은 "전형적인" 읽기라는 개념을 반박한다. 신경전형적(neurotypical) 독자들은 누구나 텍스트 자체는 비슷하게 '해독'하고 그저 내용의 '해석'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해독뿐 아니라, 읽는 행위 자체도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렇게 시원스럽게 말해주니 내가 가진 고민을 고백하자면... 나는 텍스트를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똑바로 읽지 못하고 페이지 전체를 헤매는 시간이 무척 길다. 그게 내가 남들보다 읽는 속도가 느린 이유라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내가 읽는 동안 시선추적(eye tracking)을 하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진단할 게 분명하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마운 건, 그게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다양한 읽기 방법의 한 가지일 뿐임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내 시선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페이지 전체를 오가는 이유는 내가 딴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딴 생각"이 내 읽는 속도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그걸 억누르려는 연습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 텍스트를 다 읽기는 해도 그걸 소재로 글을 쓰는 게 어려워졌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건, 내가 산만한 독서라고 생각한 것이 결국 내가 그걸 읽고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집중해서 빨리 읽느냐, 가 아니라 내게 필요한 독서가 뭐냐, 가 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해 보자.

'전형적인 독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가 이을 뿐이다. 이 점에서 모든 독자는 비전형적이다. 신경다양적 독자의 사례는 읽기 방법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음을 알려주고, 다른 사람과 비슷하거나 다른 자신만의 취향을 되돌아보게 한다. (...) 논의를 이어 나가면서 자신의 읽기 습관이 완전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도 같은 생각을 해왔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어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책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나처럼 설명하기 힘든 고민을 갖고 있던 이들도, 자기는 "정상적인" 독서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독서라는 행위를 완전히 다르게 보게 될 거다. 🦦


이 책을 낸 더퀘스트 출판사에서 오터레터 독자들에게 10권을 선물하시기로 했어요.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로 의사를 밝혀 주시면 제가 수요일(6월 5일) 오전에 추첨해서 발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