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방문 ① 1963년의 케네디
• 댓글 남기기역사나 언어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미국인들 사이에 유명한 "젤리 도넛(jelly donut) 논쟁"이라는 게 있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독일의 베를린을 방문해서 했던 연설 중에 그가 독일어로 말했던 문장, "Ich bin ein Berliner!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가 과연 문법적으로 올바른 표현이냐를 두고 벌어진 오래된 논쟁이다. 핵심은 부정관사 ein이 들어가는 게 맞느냐, 빠지는 게 맞느냐다.
문법적으로 이야기하면 둘 다 맞다. Ich bin ein Berliner라고 할 때 Berliner는 '베를린 시민'이라는 명사고, Ich bin Berliner라고 말하면 Berliner는 형용사다. 이건 I am Korean과 I am a Korean의 차이와 같다. 둘 다 같은 의미이고, 표현하는 법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런데 영어에서 I am Korean, I am American처럼 관사를 사용하지 않고 국적을 형용사로 사용하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운 것처럼, 독일어에서도 ein 없이 Ich bin Berliner가 더 자연스럽다고 한다. 다만 케네디는 I am a Berliner라고 강조하기 위해 굳이 ein을 넣은 거다.
문제는 베를리너(Berliner)가 독일인들에게는 젤리 도넛(Berliner Pfannkuchen)을 부르는 명칭으로 흔히 사용되기 때문에 (프랑크프루트의 소시지를 Frankfurter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함부르크와 Hamburger의 관계도 그렇다) 굳이 ein을 넣으면 "나는 젤리 도넛입니다!"로 들린다는 거다. 그래서 케네디가 이 연설을 한 직후에 미국 언론에서는 대통령이 독일어를 틀리게 사용하는 바람에 베를린에 모인 사람들이 낄낄대고 웃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대통령의 외국 방문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한 자국 언론의 비판적 보도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케네디의 표현은 실수가 아니고, 독일인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얘기는 과장된 얘기라는 정정 기사들이 등장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사실 당시 (위의) 영상만 봐도 케네디의 연설은 큰 성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문제의 그 문장을 말한 후에는 우레와 같은 환호가 터져 나온다.
당시 독일인들, 특히 베를린에 살고 있던 서독 사람들(West Germans)에게는 미국 대통령의 방문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케네디의 연설을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사람들에 따르면 "어떤 록스타가 왔어도 그렇게 많은 청중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케네디도 베를린 방문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참고로, 그가 말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말은 2000년 전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이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였던 것처럼 이제 베를린 시민도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얘기였다.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건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 (번역 출처: 위키피디아)
월경지(越境地) 서베를린
독일이 통일된 후에 태어난 세대는 잘 모를 수 있지만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 있던 시절(1945~1990년) 베를린은 국경에 걸쳐 있어서 서베를린, 동베를린으로 불린 게 아니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통째로 동독의 영토 한 가운데에 있었고, 그 도시에서 서쪽 지역(서베를린)만 서독에 해당하는 이상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베를린은 지리학에서 말하는 월경지(越境地, exclave), 즉 타국의 영토 내에 섬처럼 존재하는 땅이었다. 아래 그림 중에서 왼쪽이 흔히 하는 착각이고, 오른쪽이 정확한 지도다.
이런 도시를 케네디가 굳이 방문하려던 배경에는 그보다 2년 전인 1961년에 동독이 세운 악명 높은 베를린 장벽이 있었다. 동독은 서독에서 들어오는 간첩들을 막기 위해서 장벽을 세운다고 했지만, 사실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막으려는 게 진짜 이유였다. 동독과 서독은 이미 1952년부터 분리되었어도 베를린은 동독의 한가운데 있는 도시였고, 그 일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관할하는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동독인이 마음만 먹으면 서독으로 귀순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그 결과 1961년까지 약 4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빠져나가면서 두뇌유출의 문제가 심각했다. 동독이 이런 탈출 루트를 완전히 봉쇄하려는 방법으로 세운 것이 베를린 장벽이다.
동독이 막무가내로 장벽을 세우는 동안 베를린의 서쪽을 관할하던 프랑스, 영국, 미국은 소련의 도발적인 행동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고, 특히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며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에 그 비난이 집중되었다.
왜 미국은 베를린 장벽의 건설을 막지 않았을까? 베를린 장벽을 세운 주체는 동독 정부였지만 이를 지시한 것이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공산권 한 가운데 섬처럼 남아있는 위요지(圍繞地, enclave: 자국 내에 있는 타국 영토를 가리키는 지리학적 명칭)인 서베를린을 "목에 걸린 뼈처럼" 성가시게 생각했다. 철의 장막에 뚫린 유일한 구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장벽을 세워 통행을 막겠다는 쪽은 자기들의 체제가 열등하다고 인정하는 셈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대책 없이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에 이르자 소련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소련이 이렇게 결단을 내려서 장벽을 세우기로 했다면 이를 막는 게 몹시 난감하다는 사실이다. 서독인들의 입장에서는 힘 있는 나라들이 소련과 동독의 행동을 충분히 막아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미국으로서는 동독이 군인들을 동원해서 하는 공사를 저지하려면 자기네도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건 소련과의 무력 충돌을 감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두고 케네디는 “a wall is a hell of a lot better than a war (장벽이 전쟁보다 백배 낫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냉전(cold war)이라는 것 자체가 총알이 날아다니는 열전(hot war)을 피하기 위한 건데 침공도 아니고 단지 장벽을 쌓는 일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장벽을 완성하는 동안 미국이 팔짱을 끼고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케네디의 생각은 변하게 된다. 소련은 베를린 장벽을 세우기 시작한 이듬해인 1962년에 쿠바 미사일 사태를 일으켰다. 케네디는 미국의 코앞인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흐루쇼프의 도발에 맞서 미사일을 실은 선박을 회항하지 않으면 핵미사일을 발사하겠다며 위협하는 치킨게임을 벌였다. 결국 케네디가 기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이때부터 냉전은 (1970년대 후반 긴장이 완화될 때까지) 절정에 달한다. 미국은 소련의 공산권 블록 확장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케네디는 1961년, 미국은 베를린을 지키겠다고 거듭 강조하는 연설을 했어도 그 직후에 진행된 공사를 막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붉은 바다에 떠 있는 섬 같은 서베를린을 두고 동독과 소련이 허튼짓을 할 경우 미국이 과연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아줄지 알 수 없었다.
이 의구심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 대통령의 방문이었고, 세계는–그리고 누구보다 소련은–미국이 진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방문 ② 2023년 바이든'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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