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이 된 남자 ②
• 댓글 3개 보기앞을 보지 못하는 조 엔그레시아에게 전화기는 익숙한 세상이었다. 모두가 목소리만으로 존재하는 전화 속 세상에서 그는 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였다. 아니, 그는 남들은 모르는 전화기 작동 원리를 알고, 그걸 해킹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프리킹(phreaking)을 하는 다른 폰 프릭들을 만나면서 특별한 커뮤니티, 즉 해커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폰 프릭들 사이에서도 엔그레시아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도구가 필요없이 입으로만 해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해커 다섯 명을 선정한 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엔그레시아는 그 커뮤니티에 남아있을 마음이 없었다. 그는 전화기를 가지고 놀기 시작하던 3, 4살 때부터 "나는 평생 전화국에서 일할 거야 (I'm a telephone man forever)"라는 말을 노래처럼 중얼거렸다. 전화의 원리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를 발견하면 전화 회사에서 알려서 고치게 하는 아이였으니 전화 회사에서도 환영할 만한 미래의 직원이었다. 그가 시각장애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엔그레시아는 장애 때문에 비장애인처럼 취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전화 회사에서 일하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프리킹으로 유명해진 그는 얼마되지 않아 장거리 전화로 장난치는 일을 그만하고 (프리킹 커뮤니티에서 경찰에 체포된 사례도 있었다) 진지하게 전화 회사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전화 회사에서만 일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상관없었어요. 앞을 보지 못하니 단순한 교환원 일밖에 주지 않겠지만, 그거라도 상관없었습니다."
그가 원한 건 다른 사람들처럼 출퇴근하며 월급을 받는 평범한 직장 생활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정처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던 그는 길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엔그레시아는 황당한 계획을 세운다. 예전에 속해있던 프리킹 커뮤니티 사람들과 컨퍼런스콜을 하면서 모두가 듣고 있을 때 해외에 있는 미국 영사관 같은 기관에 장난 전화하는 일종의 공개 쇼를 해서 전화 회사의 관심을 끌기로 한 거다. 그는 평소 실력으로 해외 영사관에 국제 전화를 건 후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사칭해 인터뷰를 시도했다. 물론 금방 들통날 일이었지만, 그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는 전화 회사가 자기의 위치를 추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었고, 새로운 장난을 시작한 지 2주일 만에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그를 찾아왔다.
나쁜 뜻으로 한 일은 아니니 특별한 처벌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이 사실이 알려져서 전화 회사에서 그에게 일자리를 주는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벨(Bell)처럼 큰 회사는 아니고, 밀링턴 전화 회사라는 작은 독립 전화 회사였다. 거기에서 그는 전화기를 청소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재능에 전혀 맞지 않는 수준의 일이었고, 그는 오래지 않아 일을 그만둔다.
그러다가 1977년(1976년이라는 얘기도 있다)에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드디어 벨(Mountail Bell. 독점 기업이었던 벨은 분리되어 지역별로 다른 이름을 가진 회사가 되었다)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가 하는 일은 전화 네트워크에 생긴 문제를 찾아내 고치는 작업이었다. 이즈음 그는 전화 시스템에 통달했고,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어떤 문제인지, 심지어 어느 위치에서 문제가 생겼는지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워낙 뛰어난 재능이었기 때문에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상당한 연봉을 받으며 수영장이 딸린 고층(high-rise) 아파트에서 살았다. 친구들은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그를 "High-rise Joe"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렇게 꿈같은 생활을 하던 엔그레시아는 1980년대 초, 돌연 전화 회사 일을 그만두고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로 이주한다. (그가 왜 일을 그만뒀는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가 일정한 직장과 생활에 정착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미니애폴리스를 택한 이유는 그 도시의 지역번호가 엔그레시아가 좋아하는 612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사 날짜도 6월 12일로 잡았다.
이 글의 제목이 왜 '다섯 살이 된 남자'인지 궁금했다면 이제부터 그 답이 나온다. 새로운 도시로 온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곳에서 참석한 어느 세미나에서 진행자가 "여러분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표현해 보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조이버블(Joybubbles)!"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가 즉흥적으로 기쁨(joy)과 비누거품(bubbles)를 합쳐 만든 이 단어는 어린아이들이 보는 TV 프로그램에 어울릴 법한 말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그는 그때까지 살아온 자신을 버리고 다섯 살이 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나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이름은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법원에서 가서 조 엔그레시아라는 이름을 조이버블로 개명했다. (그는 조이버블이 한 단어라는 걸 강조하곤 했다.)
조이버블이 된 그는 'Stories and Stuff'라는 폰 라인을 개설했다. 일종의 전화 사서함 같은 것으로, 누구나 전화하면 그가 녹음해 놓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여기에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얘기를 업데이트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전화를 걸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웹사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그렇게 조이버블이 남겨놓은 많은 녹음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한 테이프에서는 그가 어린 시절 시각장애인 학교에 다니면서 겪은 체벌과 성폭력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힘든 이야기를 했다"며 우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기에 가면 23분 지점에 나온다.) 그가 왜 자기를 다섯 살이라고 선언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여기에 있다. 그는 다른 많은 아이들이 누렸던 순수한 어린 시절을 갖지 못했다. 시각장애와 폭력적인 가정 환경, 그리고 학교에서 겪은 일까지, 그의 어린 시절은 힘든 일로 가득했고, 그래서 전화라는 세상으로 탈출을 시도한 거였다.
그에게 다섯 살은 아마도 그런 기억 이전의 시절이었을 것이고, 다섯 살로 돌아가 자기가 그때 누리지 못한 세상을 누리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즈는 부고 기사에서 그를 "폰 해커들의 피터 팬"이라고 불렀다. 그 기사에 이런 말이 나온다. "조이버블은 시각장애인 학교에서 폭력을 경험했고, 어머니가 자기의 아이큐(172)에 맞게 교육을 시키려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어린 시절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훗날 장난감과 어린이용 잡지, 그리고 상상 속의 친구들을 모았고, 사람들이 들으면 미소를 지을 이름(조이버블)을 골라 개명했다."
조이버블은 피터 팬처럼 아이들을 좋아했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며 친구가 되었다. 인생의 전반을 엔그레시아라는 이름으로 전화와 관련된 삶을 살았다면, 후반은 조이버블이 되어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국가에서 받는 장애인 지원금과 뛰어난 후각을 사용해 대학교 농업 연구소 등에서 부업을 하면서 생활을 유지했던 그는 2007년 8월 8일, 5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전화를 통해 한 자리에 모이는 대형 컨퍼런스 콜 추모식을 열어서 무려 네 시간 동안 자기가 아는 조이버블의 이야기와 그가 자기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함께 나눴다.
그가 남긴 녹음테이프 하나는 이런 작별 인사로 끝난다. "항상 건강하시고, 서로를 돌봐주세요. 그리고 시간을 내어 노세요. 그리고 상상 속의 친구를 하나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친구도, 여러분도 행복할 거예요." 그게 조이버블 자신이 살아온 방법이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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