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의 내러티브 가치
• 댓글 1개 보기이 글과 조금 다른 버전이 조선일보 '박상현의 디지털 읽기'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기대로 시작한 2021년은 실망스럽게도 2020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끝나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써야 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고, 지인들과 떠들썩하게 치르는 송년회는 다시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020년을 반복하며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걸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지각변동은 우리가 체감하기 전까지 조용히 힘을 축적하는 것처럼, 2021년도 그렇게 사회가 변화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간이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 한 해 동안 일어난 지각변동, 앞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낼 만한 사건은 어떤 게 있었을까? 실리콘밸리의 기술 기업들은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고, 테슬라가 이끌었던 전기차 혁명은 이제 모든 자동차 기업이 뒤따르고 있지만 이런 것은 이미 10년, 20년 전에 일어난 혁명의 결과일 뿐이다. 미래를 짐작해보기 위해서는 어떤 기업을 주목해야 할까? 좀 뜬금없지만 미국의 영화관 체인 AMC다.
이 기업이 뜬금없는 사례인 것은 미국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영화관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않기 때문이다. AMC의 수익은 팬데믹 이전에 이미 성장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2017년에 50% 넘게 올랐지만 넷플릭스가 만들어낸 스트리밍 열풍에 디즈니를 비롯한 업계의 메이저 플레이어들이 동참하면서 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들 발길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영화 스튜디오들이 계산기를 두드려 본 결과, 성공 여부를 알 수 없고 영화관과 수익을 나눠 가져야 하는 전통적 비즈니스 모델보다는 5개, 10개 에피소드로 쪼개 스트리밍을 해서 매달 시청료를 받는 게 유리했다. 암울한 전망으로 주가가 계속 떨어지던 시점에 느닷없이 팬데믹이 발생해 영화관이 텅 비면서 ‘퍼펙트 스톰’이 생겨났고, 그 결과 “이제 영화관 산업은 끝났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자들은 결국 AMC는 파산할 거라 판단하고 주식을 공매도(short selling)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2021년을 휩쓴 밈(meme) 주식 열풍이 일어났다. 투자 경험이 없는 개미 투자자들이 기업의 펀더멘털과 상관없이 일제히 공매도 주식을 사들인 것이다. 이들이 화력을 집중한 주식은 AMC와 오프라인 게임 매장인 게임스톱처럼 누가 봐도 내리막길에 있는 기업들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분노였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기업들이 대형 투자자들의 돈벌이 ‘작전’의 희생물이 된다는 사실에 분노한 이들은 레디트(Reddit) 같은 소셜미디어에 모여 성토 대회를 열고 힘을 합쳐 주식을 사들였다. 주식 가격이 오르면 공매도한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행동은 ‘응징’ 성격을 띠고 있었다.
흥미로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그런 응징이 끝난 후에도 주식은 여전히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AMC의 주가는 최고점이었던 59달러보다는 크게 떨어진 30달러 미만이지만, 이는 이 영화 체인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 수준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높은 가격이다. 게다가 몰려든 투자자들의 도움으로 AMC는 현재 2조원이 넘는 현금을 보유하게 되었다. 기업 역사에 없던 규모다.
전문가들이 전통적 기준으로 산정한 AMC의 현재 주식 가치는 마이너스 3.20달러다. 가진 자산을 다 팔아도 총부채를 메꿀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여기에서 키워드는 ‘전통적 기준’이다. 이는 월스트리트의 투자 전문가들이 세운 기준이고, 기업의 매출과 순이익 등을 고려한 ‘펀더멘털’에 기반한 기준이다. 그런데 기업의 펀더멘털을 보지 않고 “그냥 좋아서” 특정 주식을 사들이는 사람 숫자가 꾸준히 유지된다면? 그럼 얘기가 달라진다. 이게 전문가들이 머리를 긁적이는 이유다.
현재 AMC의 주가는 순전히 이렇게 몰려든 개미 투자자들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고, 이들은 전체 주주의 80%에 이른다. CEO인 애덤 애런(Adam Aron)은 개미 투자자들의 참여를 “월스트리트의 민주화”라고 추켜세우지만 기업의 펀더멘털과 유리된 주가가 유지될 수 있을까? 비슷한 예가 없는 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폐는 금본위제를 탈피한 명목화폐(fiat currency)로 그 가치는 순전히 화폐에 대한 사용자들의 믿음에서 비롯될 뿐, 실물 가치와는 무관하다. 즉, 그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충분하게 유지되면 화폐의 가치는 유지된다.
AMC 주식과 같은 밈 주식을 사는 사람들은 “펀더멘털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주식이 가진 이야기, 즉 내러티브가 중요하다. 어떤 예술 작품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은 거기에 사용된 페인트 가격과 노동 비용의 총합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작품에 가진 애정 때문이다. 거기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 일정 숫자를 넘으면 가격은 유지된다. 그렇다면 주식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느냐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식의 내러티브 가치는 소위 스토리 주식(story stocks)과는 다른 개념이다. 스토리 주식도 자산, 수익 등 펀더멘털에 기반한 가치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그리고 신기술과 언론 보도, 입소문으로 높은 가격대가 형성된다는 점에는 내러티브에 기반한 주식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AMC와 게임스톱의 경우는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투자자들이 가진 정서적 가치가 더 큰 견인차 역할을 한다.
지난 17일에 개봉한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은 팬데믹 이후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고, AMC는 티켓을 무려 700만장 팔았다. 극장 체인 역사상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번 성공이 극장 산업의 미래를 증명해줄까? 밈 주식 투자자들에게는 그런 증명이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이들에게 AMC 주식의 가치는 가슴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주식시장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2021. 12. 31. 조선일보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주식 시장이 기업의 펀더멘털과 완전히 무관하게 바뀐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밈 주식에 투자한 사람이 손해를 본다면 그건 스스로 초래한 결과일 뿐이고, 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밈 주식에 열광한 이들은 NFT와 암호화폐에 투자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AMC의 개미투자자들은 AMC가 암호화폐와 NFT를 발행하도록 건의했고, CEO 애덤 애런은 이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두 디지털 자산이야말로 실물가치, 혹은 펀더멘털과 무관한 자산 클래스(asset class)에 속한다. 많은 사람이 '상호주관적 실재(intersubjective reality)'에 동의한다면 엄연한 가치를 가진 자산이 된다.
과연 밈 주식이 2022년에도 그 가치를 유지할까? 이건 비트코인의 가격을 예측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NFT와 암호화폐에 대한 투자가 유지되는 한 밈 주식에 대한 매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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