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언 그레인지의 자신감 ①
• 댓글 남기기먼저 얼마 전 'Daily Catch' 뉴스레터에서 다룬 내용을 복기해 보자.
세계 최대의 음악 레이블인 유니버설 뮤직 그룹(UMG)이 틱톡 플랫폼에서 자사가 저작권을 보유한 음악을 모두 빼겠다고 결정했다. 신곡 홍보에서 차지하는 틱톡의 비중을 생각하면 UMG의 결정은 최후의 수단이다. 음반사가 플랫폼을 상대로 이런 전쟁을 시작하는 건 처음이 아니다. 2008년에는 워너뮤직이 유튜브와 수익 배분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면서 무려 9개월 동안 자사가 보유한 음원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번 싸움이 그때와 다른 이유는 협상의 쟁점이 인공지능(AI)이기 때문이다. UMG는 틱톡에서 자사의 앨범을 모두 빼기로 하면서 음악인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웹사이트에 올렸다. 틱톡과 싸우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이 공개서한에서 UMG는 요즘 틱톡에는 생성형 AI가 만든 음악들이 가득하다면서, 이런 AI 콘텐츠가 이미 존재하는 가수와 그들의 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AI 프로그램들이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거다.
UMG가 AI가 만드는 음악을 불허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아래 이어지는 글에서 알 수 있듯, 이 기업은 AI 음악으로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결국 이번 대결의 본질은 틱톡이 얼마를 지급해야 하느냐에 있었다. 공개서한에 따르면 틱톡은 "비슷한 규모의 다른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비교해" 형편없이 낮은 액수를 제시했고, 그 차이를 좁히지 못해 1월 31일에 기간이 만료되는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공개서한에 따르면 틱톡이라는 플랫폼은 어느 소셜미디어보다도 음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음악 중심의 플랫폼임이고, UMG가 보유한 곡을 많이 사용하지만, 정작 UMG가 틱톡에서 받는 돈은 UMG 매출에서 1%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UMG가 틱톡이라는 플랫폼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음반사와 틱톡은 수익의 배분을 놓고 다투지만 서로를 필요로 한다. 틱톡은 UMG의 음악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UMG는 틱톡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틱톡은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굴하는 가장 효과적인 플랫폼일 뿐 아니라, 잊혀진 오래된 음악을 다시 발굴해 바이럴을 일으키는 마법의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틱톡은 물론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둘이 팽팽한 치킨게임을 할 수 있는 거다.
여기에서 드는 궁금증이 있다. 아무리 유니버설이 세계 음반 업계 최대 기업이라고 해도 플랫폼과 AI를 가진 빅테크 기업들에 비하면 새우와 고래의 싸움이다. (틱톡은 아직 상장을 준비 중이지만,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들은 시가총액이 우리 돈으로 3천조 원이 넘는다. UMG의 시가총액은 약 65조 원이다.) 아무리 지식재산권이 중요한 시대라고 해도 과연 플랫폼, AI 기술과 맞서서 승산이 있을까? 틱톡과 UMG가 벌이는 싸움은 AI 컨텐츠의 홍수에 익사하고 있는 음반 업계의 마지막 몸부림이 아닐까?
그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틱톡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UMG의 CEO일 거다. 이번 글의 주인공 루시언 그레인지(Lucian Grainge)가 그 사람이다.
물론 루시언 그레인지가 단지 음반 업계의 희망사항만을 말한다면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음반 업계의 변화를 모두 겪어왔을 뿐 아니라, 음악인과 업계 모두의 존경을 받는 천재적인 사업가가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굳이 아서 C. 클라크의 삼법칙을 꺼내지 않더라도 한 업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전문가의 말은 귀를 기울여 볼 만하다.
아래의 내용은 UMG가 틱톡에서 음원을 빼겠다고 발표하기 직전인 지난달 말 뉴요커에서 발행한 기사를 요약하고 설명을 붙인 것이다. 한 인물과 그 주변 사람들을 오래 취재한 전형적인 프로파일 기사이지만, 뉴요커의 롱폼 기사들이 그렇듯, 인물 취재를 넘어 한 분야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전해준다.
X세대나 그 이전 세대 중에서 대중음악, 팝 음악을 좀 들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사 모은 음악 CD들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CD 컬렉션을 뒤져 보면 거의 예외없이 갖고 있는 앨범이 있다. 바로 스웨덴 팝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을 모은 '아바 골드' 컴필레이션(편집) 앨범이다.
루시언 그레인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다들 아바가 한물갔다고 생각한 1992년에 그들의 히트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음반(compilation album)을 기획, 제작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아바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1972년에 결성된 아바는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그룹이 해체된 1982년까지 약 10년 동안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70년대 디스코 장르에서 시작한 그룹이 1980년대에도 인기를 이어나가기는 쉽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제 아바는 1970년대를 이야기할 때나 기억될 많은 가수, 그룹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폴리그램(PolyGram)에서 일하고 있었던 그레인지는 아바가 해체된 지 10년 째 되는 1992년에 '아바 골드'를 기획한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인기 그룹을 다음 세대인 X세대에 다시 소개해 보자고 생각했던 그의 아이디어는 크게 히트했고, 지금은 그야말로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 있는 앨범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1980년대 중반, CD의 등장을 보면서 과거에 발매된 히트곡들을 리패키지(repackage)하면 훌륭한 사업이 될 거라 생각하고 인기곡의 음원을 사들였다. 이는 단순히 '아바 골드'와 같은 히트 상품을 넘어 스트리밍 시대인 지금까지 살아남아 돈을 벌게 해준 뛰어난 결정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고, 음반 업계가 AI 시대를 헤쳐 나갈 아이디어를 그에게서 기대하고 있을까? 그의 경력과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다.
루시언 그레인지는 이미 설명한 대로 세계 최대의 음반 그룹인 유니버설 뮤직 그룹(UMG)의 CEO다. 지난 10년 동안 빌보드가 발표하는 음악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안에 꾸준히 들어갔고, 2016년에는 영국에서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작은 키에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착각하기 쉽지만, 함께 일해 본 사람들은 그의 웃음 뒤에는 "킬러 샤크"가 숨어있다고 말할 만큼 무서운 사업가다. UMG는 그가 CEO가 된 후에 워너 뮤직과 소니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현재 스포티파이에서 가장 많이 플레이되는 20곡 중 절반 이상이 UMG가 가진 곡이다.
UMG 산하의 유명한 재즈 레이블인 블루노트(Blue Note)를 이끌었던 돈 워즈(Don Was)는 그레인지의 실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음반 업계에서 루시언 그레인지만큼 똑똑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는 음악도 잘 알고 있고, 재무에도 능통하다. 완전히 다른 두 영역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런던 북부 유대계 커뮤니티에서 자란 그는 현재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지만, 골프는커녕 술이나 담배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업 때문에 골프장에 가야 할 경우 플레이는 하지 않고 카트 운전을 도맡아 한다.) 하지만 투자자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엄청나서, 그레인지는 "테크놀로지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업계의 비즈니스 모델을 바꿔놓은" 인물로 통한다. 요즘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을 사임하게 만들어서 악명이 높은 행동주의 투자자 빌 애크먼(Bill Ackman)은 루시언 그레인지가 음반 업계에서 이룬 업적을 넷플릭스의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가 TV와 영화 업계에서 해낸 일에 비유한다.
그레인지가 음악계에서 일한 지난 45년 동안 사람들이 음악을 만들고, 홍보하고, 배포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완전히 탈바꿈했다. 하지만 인쇄 매체와 케이블TV, 극장 업계가 디지털 혁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동안 음반 업계는—냅스터로 인한 첫 충격을 벗어난 다음에는—사상 최대의 수익을 내고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스트리밍을 통한 수익만 170억 달러(약 22조 원)에 달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음반 업계는 이제 끝났다던 예상을 뒤엎고 업계를 살려낸 사람이 루시언 그레인지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루시언 그레인지의 자신감 ②'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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