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인 남자들 ②
• 댓글 남기기미국에서 흔히 ‘레드 스테이트(red state)’라고 불리는 공화당 우세주에서는 조 바이든이 이끄는 연방 행정부와 끊임없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주 정부와 연방 정부 사이의 갈등은 트럼프 행정부 때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때는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라 불리는 진보 성향의 (혹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주들이 연방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는 일이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남부를 중심으로 한 레드 스테이트에서는 연방 정부의 힘을 최소화하고 주의 자치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에는 공화당 소속의 주지사가 이끄는 플로리다주에서 미국 농무부(우리로 치면 농림축산식품부)의 정책에 반대해서 각급 학교들에 “농무부가 내려보낸 가이드라인을 무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지자체와 정부가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모양새인데, 도대체 연방 정부가 무슨 가이드라인을 강요했기에 이런 일이 생겼을까?
문제의 핵심은 ‘타이틀 나인(IX)’이라 불리는 연방법이다. 1972년에 제정된 이 법은 미국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는 학교들은 교내에서 성차별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 법을 성소수자(LGBTQ) 학생들이 학교에서 동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석했고, 급식 등으로 농무부의 지원을 받는 학교들에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 하지만 플로리다를 비롯한 20개의 레드 스테이트에서는 이 가이드라인이 법적 근거가 없다며 법원에 제소한 것이다.
이 싸움은 현재 진행 중이지만 흥미로운 게 있다. 문제의 핵심이 되는 ‘타이틀 나인’은 원래 여학생들이 학교에서 체육활동을 할 때 남학생들과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아니, 정확하게는 이 법이 만들어진 1970년대에도) 여학생들의 교내 운동은 권장되지 않았다. 체육시간에 하는 활동이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미식축구와 야구, 하키 등의 스포츠가 활성화된 미국에서 이런 종목들은 남학생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고, 여학생들은 기껏해야 치어리더 정도의 활동에 그치는 경우가 흔했다.
그 결과 여학생들의 교내 운동경기 참여율은 아주 저조했고, 이는 각종 체육활동에 관한 관심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에 이어 1970년대에는 여성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고, 이 문제가 지적되면서 연방 정부가 타이틀 나인을 통과시켜 각급 학교에서 운영하는 스포츠 팀에서 여학생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게 한 것이다. 법조문 자체는 짧지만 그 효력은 컸다. 가령 어떤 학교가 남학생들만 참여하는 미식축구팀에만 학교의 체육예산을 쓰고 있으면 여학생들이 할 수 있는 스포츠에도 동일한 예산을 쓰도록 했고, 주말 저녁처럼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볼 수 있는 황금시간대를 남학생들만 참여하는 스포츠팀의 경기가 독차지할 경우 이를 시정해야 했다.
하지만 많은 진보적인 법들이 그렇듯, 이 법도 보수적인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지역에 따라서는 이에 저항하는 일도 흔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요즘 공화당 우세주에서 이 법을 성소수자 학생들의 권리 확보에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곳에서 이 법을 지지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우리에게는 ‘스누피’로 더 잘 알려진 만화 피너츠(Peanuts)를 그린 찰스 슐츠(Charles Schulz)였다.
이를 자세하게 소개한 미국 공영라디오(NPR)의 기사에 따르면, 슐츠는 여학생과 여성들의 스포츠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고 한다. 그는 왜 그런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슐츠의 아내에 따르면, 테니스 선수로 당시 최고의 여성 스포츠 스타였던 빌리 진 킹을 만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고 한다. 당시 킹은 여성 스포츠 재단(Women’s Sports Foundation)을 세우고 여학생들의 스포츠 참여를 북돋우려고 노력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킹은 슐츠를 만나서 자신의 재단에 이사로 활동하기를 권했는데, 슐츠는 뛸 듯이 기뻐하며 수락했다. 피너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이 만화에 등장하는 아이 중 운동을 제일 잘하는 건 페퍼민트 패티라는 여자아이다. 이 아이는 직접 동네 야구팀을 꾸려서 운영할 뿐 아니라 하키, 모터사이클까지 하는 스포츠광이다. 슐츠는 이 캐릭터뿐 아니라 다른 여자아이들 캐릭터들도 각종 스포츠 활동을 좋아하는 걸로 묘사해서 여학생이 운동하는 것은 당연하고 긍정적이라는 인식을 퍼뜨렸다. 미국의 대중이 아직 ‘스포츠는 남자아이들의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슐츠의 만화 속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스포츠를 즐겼다.
지난 글에서 캐서린 스위처가 1967년에 보스턴 마라톤에 참여해서 완주한 첫 여성이 되었고 그런 그를 도운 남성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찰스 슐츠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여성들의 스포츠 활동을 돕는 조력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려 50년 동안 신문에 실리면서 미국 대중문화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슐츠의 만화가 미친 영향력은 크다. 워낙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만화였기 때문에 여성의 스포츠 활동에 부정적이었던 사람들도 슐츠의 만화는 아무런 반감 없이 받아들이면서 생각이 바뀐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아동용 TV 프로그램 '미스터 로저스의 이웃(Mister Rogers' Neighborhood)'이 했던 것과 비슷하다. 백인인 로저스는 인종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에 흑인 경찰관과 함께 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이는 당시 흑인이 백인과 함께 공공 수영장을 함께 사용하는 문제로 반발하는 백인들의 인종차별적 사고 방식을 깨고 어린 아이들에게 서로 다른 인종이 함께 지낼 수 있음을 가르친 것이다. 미스터 로저스는 분명히 진보적인 어젠다를 전달했지만 그를 싫어하는 미국인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남성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여성은 남성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라는 말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상식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백마 탄 기사’가 아니다. 이를 강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슐츠의 아내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세상을 떠난 남편의 활동을 이야기하면서, “하지만 이 법을 통과시키고, 이의를 제기하고, 이 어젠다를 살려낸 것은 여성들”이라며 공이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 분명히 했다.
이 글의 다른 버전이 세계일보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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