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사청문회 ①
• 댓글 1개 보기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탄생하면서 각 부처 장관의 인사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트럼프가 워낙 파격적인 인물들을 지명하는 바람에 많은 논란이 일어나지만, 모든 인물이 그런 건 아니다. '달러 전쟁'에서 소개한 적 있는 스캇 베센트(Scott Bessent)의 경우 트럼프가 재무장관으로 지명한 직후에 모든 사람들이 무난한 통과를 예상했고, 실제로 무난하게 (찬성 68, 반대 29표) 상원의 인준을 통과했다.
하지만 베센트 보다 더 확실하게 인준을 받은 인물이 있다. 플로리다 출신 연방 상원의원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다. 루비오의 국무장관 인준안은 일주일 전에 만장일치로 상원을 통과했다. 같은 상원에서 활동하던 동료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는 루비오는 트럼프가 지명했든, 다른 대통령이 지명했든 상관없이 제대로 고른 인사라고 평가한다.
그뿐 아니다. 루비오의 상원 청문회는 인사청문회의 정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훌륭해서 양당 의원들은 물론, 언론의 칭찬을 받았다. 사람들이 왜 좋아했을까? 질문과 답변이 상식적으로 오고 갔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이 서로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아니라, 현재 미국의 외교 문제(국무장관, 즉 Secretary of the State는 다른 나라의 외무장관에 해당한다)와 국익에 관한 실질적 논의였기 때문이다.
'제국을 숨기는 방법'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 트럼프는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를 미국의 손에 넣기 위해 파나마와 덴마크를 압박하고 있다. 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이 유지해 온 외교의 방향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다. 트럼프의 많은 정책이 비난을 받고 있지만, 비난의 종류와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특히 파나마 운하, 그린란드의 문제는 트럼프가 사용하는 거칠고 위압적인 방법의 문제일 뿐,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는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미국인들이 많다.
그렇다면, 미국의 국무장관이 될 루비오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당연한 얘기지만, 마르코 루비오는 트럼프의 의견을 따른다. 대통령은 자기가 원하는 정책을 추진할 사람을 장관으로 뽑기 때문이다. 그가 기본적으로 공화당의 정치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루비오는 트럼프가 공화당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까지는 조지 W. 부시–딕 체니가 상징하는 '전통적 공화당'에 속한 인물이다. (양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은 이유도 사실 그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2016년,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언론의 관심을 모조리 빨아들이면서 전통적 공화당 정치인들을 위협했을 때 트럼프를 맹렬하게 공격하며 "공화당 최후의 희망"이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전통적인 보수는 그 지지기반을 트럼프에게 완전히 뺏겼고, 미국은 루비오 같은 정치인도 트럼프를 끌어안지 않으면 보수 정치인으로 살아남기 힘든 정치 환경으로 변했다. 루비오도 다른 많은 공화당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트럼프에 무릎을 꿇고 그의 세상이 되었음을 받아들였다.
트럼프는 2016년 경선 당시 루비오가 "최악의 상원의원"이라고 공격했지만, 루비오는 플로리다에서 단단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 승자를 좋아하는 트럼프는 1기 행정부 때 그런 루비오의 효용성을 깨닫게 되었고,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아졌고, 루비오는 트럼프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영향력을 인정한다. 일종의 상호 존중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사람들은 트럼프가 루비오를 국무장관으로 지명했을 때 그가 국무부를—재무부와 마찬가지로—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루비오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이란, 베네수엘라와 같은 나라에 강경한 입장(hawks, 매파)이지만, 전통적인 공화당의 외교 기조에 따라 미국이 국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이 직접적인 국익이 아니면 다른 나라를 돕거나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고립주의적 입장이기 때문에 루비오를 좋아할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루비오를 선택했다. 그만큼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고—트럼프는 1기 내각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한다—자기가 "딜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과격한 말을 해도 뒤에서 국무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줄, 외교에 경험이 많은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비오는 2011년부터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상원 외교 위원회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인물이라 국무부도 반갑게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상원 인사청문회의 배경이다.
파나마 운하
아래 영상은 청문회를 진행하던 상원의원 중에서 루비오와 함께 상원 외교 위원회에서 일했던 공화당의 마이크 리(Mike Lee) 의원이 트럼프의 파나마 운하 되찾기에 관한 질문을 하는 장면이다. 같은 공화당이고, 서로 친하기 때문에 가벼운 농담 ("저와 나이는 같은데 어떻게 머리카락이 하나도 안 빠지고 흰머리도 없습니까?") 섞인 인삿말을 한 마이크 리는 곧바로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자기 돈을 들여 1914년에 완성한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에 넘긴 배경과 조건을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역사가 있다.
운하를 파나마에 넘기기로 한 것은 1977년, 최근 세상을 떠난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이다. 그때 시작한 인수 절차가 완전히 끝난 건 1999년. 그러니까 파나마가 운하를 소유하고 직접 운영한 지 25년이 된다. 그런데 카터는 파나마에서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이 운하를 내어줬다. 왜 그랬을까? 파나마 운하가 만들어지던 20세기 초의 세계와 20세기 후반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잇는 가는 땅에 운하를 파면 해상 교역의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건 세계 지도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그걸 하겠냐는 것이었다. 1880년,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람은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였다. 그는 그보다 몇 해 전 (미래의) 파나마 운하보다 더 긴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완성했다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운하 건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평지에 수로를 낸 수에즈 운하와 달리, 파나마는 산지였다. 드 레셉스는 파나마의 지형에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설계를 해야 한다는 다른 엔지니어들의 말을 무시하고 일을 추진하다가 하루 40-50명이 사망할 만큼 엄청난 인명피해와 예산 부족, 그리고 각종 부패 스캔들로 9년 만에 사업을 포기한다.
그렇게 프랑스가 포기한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게 미국이었다. '제국을 숨기는 방법'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국의 영토 확장에 열심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그 장본인이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승리로 끝낸 후 필리핀과 괌, 푸에르토리코, 하와이 등을 손에 넣은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운하를 건설해 자기 통제 아래 두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드 레셉스가 도전했다가 실패한 사업이었고, 미국은 파나마보다 북쪽에 있는 니카라과를 통과하는 운하를 만들 생각이었다. 미국의 관심을 발견하고 기회를 본 사람이 있다. 또 다른 프랑스 엔지니어 필리페 쟌 뷔노 바리야(Philippe Jean Bunau-Varilla)로, 그는 드 레셉스의 설계에 반대해 파나마 운하는 수에즈 운하처럼 만들면 안 되고 배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방식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는 미국 정부가 계획하는 니카라과 운하는 활화산과 가까워 위험하니, 프랑스가 포기한 파나마 운하를 만들라고 설득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파나마는 독립 국가가 아니라, 남미 국가 콜롬비아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엔지니어들과 미국 정부는 다른 나라 영토를 두고 운하 프로젝트를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뷔노 바리야에게 파나마가 속한 콜롬비아에게서 허락을 구하는 것을 전제로 프랑스에서 실패한 파나마 운하 프로젝트를 인수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파나마 운하는 만들어지기 전부터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적 태도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현재 미국이 덴마크에서 그린란드를 뺏으려는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사례다. 콜롬비아는 멀쩡한 자기 땅에 미국이 운하를 파서 사용하게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뷔노 바리야는 파나마 사람들에게 "콜롬비아에서 독립하지 않겠느냐"고 부추겼다. 미국의 도움으로 콜롬비아에서 분리되어 독립 국가가 되게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 제안에 솔깃했던 파나마인들은 프랑스인 뷔노 바리야를 파나마 지역의 대표로 미국에 보낸다. 그와 상의하던 당시의 미국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즈벨트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필리핀과 하와이, 푸에르토리코를 미국 영토로 만든, 미국 역사상 가장 식민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대통령이었다. 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뷔노 바리야의 중개로 파나마 주민들과 미국이 세운 계획은 이랬다. 1903년 11월, 파나마인들이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시작하고, 여기에 맞춰 미국은 군함을 파나마 근해에 보내어 콜롬비아가 파나마 분리주의자의 시위를 진압하면 콜롬비아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한다. 물론 콜롬비아는 스페인을 무찌른 미국을 상대할 수 없었고, 파나마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파나마 사람들은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해서 가지려는 계획을 잘 알고 있었을까? 아니다. 뷔노 바리야는 파나마의 대표 자격으로 운하가 건설될 부분을 미국에 양도하는 조약에 서명했지만, 그 자리에 파나마 사람은 없었고, 그가 파나마에 불리한 조약에 서명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구한말 일본과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우리에게는 꽤 익숙한 장면이기도 하다.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라, 미국이 이런 식민주의적 과거와 결별하려는 시도였다. 트럼프는 미국의 시계를 125년 전으로 돌리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또 다른 영토 경쟁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중국의 등장이다.
'어느 인사청문회 ②'로 이어집니다.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