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이 막강하게 버티고 있는 한국에서는 그 인기를 온전히 실감하기 힘들지만, 요즘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는 미국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인기 가수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들어 시작한 에라스 투어(Eras Tour)의 폭발적인 인기가 그렇습니다. 콘서트가 열리는 곳에서는 주와 도시 차원에서 테일러 스위프트와 팬들을 환영하는 대형 빌보드를 고속도로에 세우고,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팬 수천 명이 콘서트가 열리는 스타디움 주위에 모여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근래 들어 이만한 인기를 누린 가수가 있을까 싶습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팬들은 대부분 20~40대 초의 젊은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스위프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죠. 가령 최근 뉴요커가 발행한 조 가르시아(Joe Garcia)라는 사람의 에세이는 스위프트의 팬덤이 얼마나 다양한지 보여줍니다. 글쓴이는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재소자이고, 글의 제목은 "Listening to Taylor Swift in Prison (교도소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를 듣다)"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고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는지 보여주는 글이라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도 얼마나 큰 공감을 주는지 한 번 같이 느껴보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전문을 최대한 느낌을 살려 번역했지만, 원문을 찾아 읽고 싶으신 분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구치소에 있을 때였다. 나는 살인죄로 형을 살게 될 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구치소에서는 LA 타임즈 신문을 나눠주곤 했는데, 워낙 몇 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감자들이 신문을 돌려가며 읽었다. 그 당시 나는 프린스(Prince)가 내 인생 최고의 가수이자 작곡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스위프트 같은 십 대 가수가 인기를 끄는 건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신문의 캘린더 섹션에서 눈이 커다란 스위프트의 얼굴에서 눈을 들면 내 앞에는 교도소 내 갱단들 간의 싸움과 인종 폭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치소는 직접 랩 음악을 쓰고 부르는 유색인종의 남자들로 가득했다. 이들의 가사를 들어보면 돈을 벌고 유명해지겠다는 내용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말로 돈을 벌고 유명해지던 사람은 구치소 밖에 있는 테일러 스위프트였다.

하지만 그렇게 작고 가녀린 금발의 여자애가 "Fearless(두려움 없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대단하겠나 싶었다.

캘리패트리아 교도소 (이미지 출처: Los Angeles Times)

나는 2009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선고 후 어느 날 아침 일찍, 나는 일회용 (죄수용) 점프수트를 입고 발에 족쇄를 찬 채 버스에 올라 캘리패트리아(Calipatria)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캘리포니아주 남쪽 끝에 위치한 이 주립 교도소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성채 같은 곳이다. 섭씨 40도가 넘는 기온에, 오렌지색이 나는 흙바닥은 바짝 말라 갈라졌고, 인근 솔튼호(Salton Sea)에서 날아오는 지독한 냄새까지 더해져, 마치 내가 화성에 유배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형이 확정될 때까지 무려 6년 동안 대혼돈의 카운티 구치소(jail) 생활을 겪고 나서 교도소(prison)에 오게 되니 나만의 TV를 가질 수 있는 작은 사치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교도소(재소자들은 "캘리팻"이라 불렀다) 건물의 벽이 워낙 두터워서 전파는 잘 잡히지 않았고, 대신 교도소 내에 설치된 안테나를 통해 "액세스 헐리우드," "엔터테인먼트 투나잇," "TMZ" 같은 연예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유명인들의 가십 기사는 짜증났지만, 그래도 그게 나와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 테일러 스위프트의 공연을 짧게 나마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나는 "엘렌(Ellen DeGeneres)"이나 "지미 팰런(Jimmy Fallon)" 같은 토크쇼에 출연한 스위프트가 자신의 작곡 과정을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테일러 스위프트가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은 아직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2013년이 되자, 모범적인 행동으로 나의 위험도(security level)가 내려갔다. 나는 3등급 시설을 갖춘 솔라노(Solano) 주립 교도소로 옮겨달라는 요청서를 냈다. 북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교도소로, 내 가족이 사는 곳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내가 이송되는 과정에서 캘리팻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TV, CD 플레이어, 비누, 치약, 로션, 음식물–이 분실되었다.

솔라노 교도소의 3등급 감방의 모습 (이미지 출처: KPBS)

새로운 교도소에서 나는 다른 재소자 하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 친구도 이감되면서 비슷한 일을 겪는 바람에 우리는 몇 달 동안 다른 재소자들의 선의에 기대어 살아야 했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방에서 빌린 휴대용 라디오로, 구내매점에서 3달러를 주고 산 이어폰을 꽂아서 들었다. 밤에는 이어폰을 방 안 책상 위에 올려놓고 볼륨을 최대한 키워서 들었다. 그 작은 이어폰에서 내는 쟁쟁거리는 소리로 빌보드 톱40 곡들을 들었다.

그즈음 나는 스위프트의 네 번째 앨범 '레드(Red)'에 들어간 노래들을 거의 매 시간 듣게 되었고, 그러면서 스위프트의 곡을 즐기기 시작했다. 나는 위층 침대에 누워 밑에서 자는 감방 동료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40개의 곡이 한 바퀴 돌아 스위프트의 "We Are Never Ever Getting Back Together(우리는 절대, 절대 다시 만나지 않을 거야)"가 다시 나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렸던 그 노래 나오면 그걸 들으며 내가 감옥에 오기 전 7년 동안 함께 살았던 여자친구를 생각했다. 내가 아직 카운티 구치소에 있을 때 나를 면회하러 왔던 씁쓸하면서 달콤한 기억을 되씹었다. 우리는 철사로 보강된 두꺼운 강화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봤다. 그녀가 나를 기다리기를 기대하는 건 너무한 일이었기에 나는 그녀와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네버(never)"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우리가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항상 바랐다. 나는 스위프트의 노래 "Everything Has Changed(모든 게 변했어)"를 들으며 행복감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눈물이 흐르는 걸 참아야 했다. "All I knew this morning when I woke / Is I know something now / Know something now I didn’t before(오늘 아침 잠을 깨면서 / 무언가를 알게 되었어 / 전에는 모르던 걸)."

나는 우리의 첫 데이트를 생각했다. 우리는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하며 함께 웃었고, 해가 뜨기 전에 조금이라도 자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눈을 붙여야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캘리팻에서 오면서 분실되었던 내 소지품들이 도착했다. CD 플레이어가 도착한 게 가장 기뻤다. 나는 교도소에서 승인한 CD 리스트에서 테일러 스위프트의 '레드' 앨범을 사려던 참에 캘리포니아 교정국(CDCR)에서 나를 또 다른 교도소로 이감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도 이송 중에 물건이 분실될 게 두려워 앨범을 사지 않고, 대신 스위프트의 곡을 꾸준하게 틀어주는 컨트리뮤직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그 방송국에서 틀어주는 남부 발음이 들어간 홍키통크(honky-tonk) 메들리를 듣고 있자면 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그 방송국이 스위프트의 노래를 "Tim McGraw(팀 맥그로)"부터 "I Knew You Were Trouble(네가 문제 있는 애인 걸 알았는데)"까지 가장 다양하게 틀어줬기 때문이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목소리에는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즐거움과 진정성, 그리고 참 좋은 뭔가가 있다. 그건 행복에 대한 암시, 혹은 적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나는 아직도 내가 떠나온 바깥세상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지 출처: Medium)

새로운 교도소–이번에는 캘리포니아 멘즈 콜로니(CMC)라는 교도소였다–로 이감된다는 건 새로운 친구, 새로운 그룹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교도소에 존재하는 폭력조직과 인종 그룹들은 각각 식사하는 테이블도 다르고, 운동하는 구역도 다르다. 나는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의 혼혈이었고, 시멘트 바닥으로 만들어진 운동장에서 아시아계와 어울렸다.

거기에 있던 누군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는 말에 나는 솔직하게 테일러 스위프트의 새 앨범을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폭소가 터졌다. 그들 중 커다란 근육을 가진 램(Lam)이 "오 맙소사, 우리 교도소에 스위프티(Swiftie, 스위프트의 팬을 가리키는 표현–옮긴이)가 왔어!"라고 하더니, "원래 감상적인 데가 있는 거냐, 아니면 게이냐?"고 물었다. 램은 유독 자기 친구인 헝(Hung) 앞에서 나를 놀렸다. 헝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램이 나를 놀리면 조용히 웃기만 했다.

(이미지 출처: Lost Coast Outpost)

'레드' 앨범 CD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테일러 스위프트가 201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All Too Well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어)"을 부르는 걸 봤다. 나는 CD를 받아 포장을 뜯자마자 제일 먼저 그 노래부터 들었다. 그 후로 나는 그 앨범을 틀 때마다 그 곡이 나오면 반복해서 들었다. (같은 곡의 10분짜리 버전은 더 좋다.) 그 곡에서 스위프트가 사랑할 때 느끼는 신비로운 순간을 우리가 어떻게 발견하고 어떻게 잃는지를 노래하는 걸 들으며 나는 감옥에 오기 전 사랑하는 사람과 잠시 헤어졌던 때를 떠올렸다. 내 티셔츠를 돌려주러 온 그녀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조용히 문 손잡이에 셔츠를 걸어놓고 갔다. 나는 밖에 누가 있는 걸 눈치채고 문을 열었지만, 그녀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램이 왜 꼭 자기 친구 헝 앞에서 나를 놀렸는지를 알게 된 건 '레드' CD가 도착한 후였다. 알고 보니 헝은 '레드'만 빼고 테일러 스위프트의 앨범을 모두 갖고 있는 팬이었다. 그가 '레드'를 사지 않은 이유는 'Fearless,' 'Speak Now(지금 말하세요)'처럼 뛰어난 컨트리뮤직을 부른 스위프트가 팝으로 전향한 건 실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를 놀리던 램 역시 사실은 자기도 스위프트의 팬이라며 커밍아웃했다. 그 후 6개월 동안 우리 셋은 함께 체력단련을 하며 어느 앨범이 스위프트 최고의 앨범인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그랬던 헝이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면서 자기가 갖고 있던 CD를 모두 갖고 떠났다.

(이미지 출처: Stable Diffusion)

테일러 스위프트가 '1989' 앨범을 발표할 무렵(이 앨범은 2014년에 나왔다–옮긴이), 나는 구식 붐박스를 하나 장만할 수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재소자들이 소유물을 교환하거나 개조하는 건 캘리포니아 교도소의 규칙에 어긋나지만, 모든 교도소에는 자기 방에 라디오, TV, 스피커를 잔뜩 채워놓고 팔거나 수리해 주는 재소자가 반드시 있다. 내가 있던 곳에는 GL이라 불리던 친구가 그랬고, 나는 그를 수소문해서 만났다.

GL은 내가 만나 본 최고의 전자제품 수리 기술자였다.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스피커를 조합해서 최고의 음향을 찾아내는 걸 좋아하는 GL은 외부 단자(aux)를 이용해 개조한 붐박스를 내게 줬다. CMC에서 나는 방을 혼자 쓰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음악을 크게 틀곤 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스위프트의 노래가 바로 그런 "시끄러운" 소리였다. 복도를 통해 "X발 왜 하필 테일러 스위프트야?"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이, 'Style(스타일)' 좀 틀어봐. 그거 좋더만"하고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틀어준 곡이 끝나면 또 다른 누군가 "걔 노래 좀 할 줄 아네"하고 스위프트의 실력을 인정했다.

2015년, 나는 다시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이번에는 폴섬(Folsom) 교도소였다. 재소자가 이송될 때는 소유물로 정식 등록되지 않은 물건은 가져갈 수 없기 때문에 붐박스를 다시 GL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다시 일 년 후 산퀜틴(San Quentin) 교도소로 옮겨가게 되었다.


'테일러 스위프트를 듣다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