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가수
• 댓글 남기기1970, 8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팝가수이자 배우 올리비아 뉴턴 존(Olivia Newton-John)이 세상을 떠났다. 80대의 나이에 워낙 오래전에 활동하던 사람이라 특정 연령대 이상에서나 잘 알려진 이름이지만, 그래미상을 네 번이나 받았고 빌보드 차트 1위만 다섯 번, 톱 10에는 열 번이나 올랐던 스타이니 만큼 많은 언론에서 뉴턴 존의 죽음을 알리는 오비추어리(obituary, 부고 기사)를 발행했다.
사실 오비추어리를 '부고 기사'로 번역하는 건 좀 무리다. 단순히 사망 사실과 유족 관계, 장례 일정 등을 알리는 한국 언론의 부고와 달리 오비추어리는 그 인물을 소개하는 짧은 전기(biography)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책의 형태로 발간되는 전기와는 그 길이와 정보의 양이 비교가 되지 않지만, 세상을 떠난 인물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람도 약간 긴 기사 하나를 통해 그의 인생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사형 전기'라고 할 만하다.
유명 인물의 오비추어리는 대개 언론사에서 미리 준비해두고 있다가 사망이 확인되는 순간 발행한다. 중요한 기사이니 만큼 성의 있게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인물과 그 인물이 활동한 영역을 잘 아는 사람이 작성한다. 뉴욕타임즈에 발행된 올리비아 뉴턴 존(인기 있던 시절 한국에서는 '뉴튼존'이라고 적었다)의 오비추어리는 유명한 대중음악 평론가인 짐 파버(Jim Farber)가 썼다. (원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이 나간 후에 기사 아래에는 수백 개의 댓글이 쏟아졌다. 많은 경우 뉴턴 존을 그리워하는 팬들의 추모 글이었지만, 사람들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최상위 댓글은 오비추어리와 이를 쓴 파버에 대한 강한 항의였다. 뉴욕타임즈 기사의 논조에 대해서 항의하는 댓글이 달리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항의성 댓글이 독자들의 호응을 크게 받는 일은 흔치 않다.
이들은 왜 화가 났을까? 댓글을 쓴 사람들은 글쓴이가 악의에 찬(mean-spirited, 비열한, 옹졸한) 오비추어리를 작성했으며, 더 좋은 말을 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버의 글이 뉴턴 존에 대한 공격은 아니다. 그 가수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는데 세상을 떠난 이를 기억하는 글에서 그를 공격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뉴턴 존에 대해서 좋게 썼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뉴턴 존은 음악성에서 그다지 대단했던 가수는 아니다'라는 톤이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가령 아래 문장이 그렇다:
"뉴턴 존이 꾸준하게 만들어낸 무해한 음악–평론가들은 그를 좋아한 적이 없다–과 예쁘지만 아무런 흠없이 깨끗한 이미지의 결합되면서 평론가들은 뉴턴 존을 지난 시절의 도리스 데이나 샌드라 디와 같은 금발의 청순한 스타들과 비교했다. (The combination of Ms. Newton-John’s consistently benign music — she was never a favorite of critics — and comely but squeaky-clean image caused many writers to compare her to earlier blond ingénues like Doris Day and Sandra Dee.)"
"평론가들은 그를 좋아한 적이 없다"는 말은 (비록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평론가인 자신은 뉴턴 존의 음악을 한 번도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말을 돌려서 말한 것뿐이다. 그리고 글 전체에서 이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크게 분노한 표현은 따로 있다. "다른 어떤 것(재능)보다도 뉴턴 존은 호감 가는(likable) 사람이었다 (More than anything else, she was likable...)"라는 말이다. 이 문장은 그냥 오비추어리의 한 구석에 등장하는 게 아니라, 이 글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제목 아래에 크게 따로 뽑았을 정도로 뉴턴 존에 대한 글쓴이의 평가를 종합한다.
사람들이 파버가 likable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한 것을 두고 그의 글이 "(뉴턴 존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그리고 "성차별적(sexist)"이고, "여성혐오적(misogynistic)"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말한 것이 이 정도로 큰 비난을 들을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쏟아지는 뉴욕타임즈 독자들의 분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을 살필 필요가 있다.
Likable이라는 단어를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찾으면 용례로 "a very likable young woman"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미리엄-웹스터 영어사전에는 "She seems like a friendly, likable young woman"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단어가 여성에게만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호감 가는' 만큼 중성적이지는 않다. 특히 과거에는 (두 사전의 예에서 보듯) 젊은 여성에게 많이 사용되었다.
물론 이 단어는 좋은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얼마나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단어도 마찬가지다. 뜻 자체는 칭찬의 표현으로 사용되지만 그 칭찬은 방향성을 갖고 있다. 학생이 선생님을 "칭찬"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칭찬"하지 않는 것처럼,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젊은 여성을 likable 하다고 기술할 때 그 여성은 평가의 대상이고, 그 평가는 동등한 위치에서 나오는 평가가 아니다.
인류사회는 꾸준히 여성을 평가해왔고, 특히 젊은 여성은 각종 훈계와 평가의 대상이 되어왔다. 남성 예술가는 사회 규범을 파괴해도, 아니 파괴할수록 인기를 끌지만 여성에게는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대표적인 것이 likabilty, 즉 호감이 가는 사람이냐이다. 이는 경우에 따라 얼굴/외모일 수도 있고,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를 '측정'하는 것은 사회의 시각이고, 그 사회는 예외 없이 남성 중심의 사회다.
짐 파버는 이런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별생각 없이 이 단어를 사용한 거다.
짐 파버의 평가
"남성에게도 likable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남성을 상대로도 같은 표현을 쓴다. 하지만 남성을 상대로도 쓰는 표현이라고 해서 그 단어가 여성에게도 똑같은 값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버락 오바마가 대선후보로 출마했던 2007년에 그와 경쟁하던 조 바이든은 오바마를 가리켜 "주류 흑인 정치인 중에서 처음으로 말도 정확하게 하고 똑똑하고 깨끗하고 잘 생긴 사람(the first mainstream African-American who is articulate and bright and clean and a nice-looking guy)"이라고 말을 했다가 호된 비난을 받았다.
바이든이 워낙 말실수가 많은 사람이라 인종차별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오바마도 알았기에 별 문제를 삼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러닝메이트로 삼았기 때문에 잊혀졌지만, 그 일은 같은 단어라도 차별의 대상이 되는 집단에 사용되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잘 알려주었다. 백인 남성에게 사용했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말이겠지만 "말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가난하고 더럽다"는 편견을 받아온 집단에 속한 사람에게 하면 "다른 흑인들과는 달리" 혹은 "흑인 치고는" 같은 표현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 연예인을 두고 "likable"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호감 가는 인물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특별한 재능은 보이지 않지만 외모로 승부를 봤다, 혹은 외모 때문에 좋아했다는 의미가 깔려있다고 보는 게 맞다. "평론가들은 뉴턴 존을 좋아한 적이 없다"는 말을 굳이 넣은 것도 이를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고 해서 오비추어리를 쓴 짐 파버가 여성을 차별할 목적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쓴 다른 평론들을 보면 여성 음악인들에 대해 "여성혐오적"인 표현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뉴욕타임즈가 그런 사람에게 지면을 내어줄 것 같지도 않다. 파버는 자신만의 분명하고 엄격한 취향이 있고, 올리비아 뉴턴 존의 음악은 그런 그의 기준에 못 미쳤다고 보는 게 맞다.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건 뉴턴 존의 음악성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게 그의 오비추어리가 하려는 말이다.
특정 음악인과 그의 음악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지 않는 평론가에게 굳이 오비추어리를 맡길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할 수는 있지만 그런 결정은 매체가 판단할 영역이다. (아마도 많은 매체가 이미 써두었을) 트럼프의 오비추어리를 반드시 트럼프를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이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중 가수라고 해도 다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 파버의 평가에 팬/독자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에는 올리비아 뉴턴 존이 생전에 그런 종류의 평가에 시달렸다는 사실도 한몫을 한다. 뉴욕타임즈의 댓글 중에는 "LA 타임즈가 쓴 뛰어난 오비추어리"와 파버의 글을 비교하는 얘기가 있다. LA타임즈에 실린 뉴턴 존 오비추어리는 대중문화 전문기자(Christie D’Zurilla)가 썼는데, 그 오비추어리가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그 얘기를 다루고 있다.
LA 타임즈의 글을 쓴 크리스티 드주릴라는 여성이다. 그는 뉴턴 존이 외모 때문에 받은 평가를 에둘러 가지 않고 오비추어리의 중심에서 언급한다. "올리비아 뉴턴 존은 아름다웠다. 눈길을 끌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의 성공과 열렬한 팬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비평가들은 그의 가창력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성역(声域)이 좁은, '흔히 보는 예쁜 목소리(another pretty voice)'라고 평가했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드주릴라는 1976년 LA 타임즈에 실린 한 평론가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 "올리비아 뉴턴 존은 성량이 부족하고, 오로지 미모만이 자산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레코드를 통해 들으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콘서트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 그런 주장을 하기 힘들다." 뉴턴 존이 음악성이 떨어졌다는 짐 파버의 생각은 하나의 견해로 존중받아야 하겠지만, 그런 그가 모든 평론가를 대표할 수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평론가라고 해도 자신의 취향이 올리비아 뉴턴 존을 좋아하고 그를 빌보드 차트 1위로 여러 번 올려놓은 대중의 취향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뻐서 성공한 가수"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그룹이 있었다. 그 그룹은 대개 백인 남성 평론가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취향은 다른 사람들의 취향보다 우월하고, "좋은 취향(good taste)"을 대표해서 아티스트와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남들보다 더 많은 곡을 듣고 더 많은 작품을 접하는데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쏟은 사람들의 평가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특정 인종, 특정 젠더가 평론가 집단의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다면? 그럼 얘기가 달라진다. 평가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특정 집단의 편견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인기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가 올해 초에 겪은 일이 좋은 예다. 록밴드 '블러(Blur)'에서 작곡도 하고 노래도 부르는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은 LA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음악(modern music)은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라 "사운드와 태도(attitude)" 때문에 인기를 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아닌 사람(인기가수)이 있으면 이름을 대보라"고 물었다. 기자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당신의 취향은 아닐 수 있어도 뛰어난 작곡가 아니냐"라고 했다. 그 말에 알반은 "스위프트가 부르는 노래들은 자신이 작곡한 게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른다. 작곡을 해야만 훌륭한 뮤지션이라는 것도 편견이지만, 스위프트가 자신의 노래를 작곡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런 근거가 없는 알반의 (편견에 기반한) 추측에 불과하다. 이를 전해 들은 스위프트는 트위터를 통해 "이 기사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당신의 팬이었다"라고 하면서 "내 노래는 전부 내가 작곡한다. 당신의 근거 없는 주장은 틀렸을 뿐 아니라 아주 해롭다(damaging). 당신이 내 노래를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내 작곡 능력을 의심하는 건 정말 나쁘다"라고 항의했다.
이 말에 알반은 바로 사과했다. 그러나 이 일은 남성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는 그의 창작이고 예술성의 발현이지만 여성 가수, 특히 외모가 뛰어난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는 남이 써준 곡으로 앵무새처럼 부를 뿐이라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테일러 스위프트가 직접 작곡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혹은 올리비아 뉴턴 존이 가창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런 평가를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얼마나 다양한가이다. 짐 파버는 훌륭한 평론가일 거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단어 선택이 자신과 다른 인구집단에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고민과 긴장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뉴욕타임즈의 댓글들이 그걸 잘 보여주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변화하느냐, 아니면 '발언의 자유'를 외치며 항거하느냐가 글쓴이의 진짜 실력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걸 평가하는 건 독자들의 취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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