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반한 뮤지션
• 댓글 75개 보기사진을 확인해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는 폰에 찍힌 사진을 찾는 게 가장 빠르다) 정확하게 3년 전 이맘때 일이다. 내게 이런저런 전시와 공연 정보를 전해주던 친구가 누군가와 함께 가려고 예매해 둔 좋은 공연이 있는데, 같이 가기로 했던 사람이 급한 사정이 생겨 표가 한 장 남았다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내가 원래 그런 땜빵이 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 "당연히"라고 대답했다. 판소리 공연이라고 하는 바람에 약간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평소 내게 이런 정보를 전해주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신뢰하는 친구라서 믿고 가기로 했다.
나는 '이자람'이라는 예술인이 어떤 사람인지 공연장 입구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많은 공연들이 그렇겠지만 이태원에 있는 크고 화려한 그 공연장 입구에는 정말 열성팬들이 모인 듯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유명한 분이냐는 나의 무식한 소리에 친구는 "어휴, 내가 이 표를 얼마나 어렵게 구했는지 형이 알아야 하는데.."라며 혀를 찼다.
분명히 '소리꾼'의 공연인데 무대는 록 콘서트 같았고, 무대에 나온 이자람은 홍대 주변 인디밴드 리드싱어 같은 분위기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공연에 급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술적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모르는 장르나 분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소개해주는 전시회나 공연에 무작정 가보는 거다. 생각해보면 유명 미술관의 전시가 그렇게 작동한다. 인상파 거장들의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 들여와서 돈을 벌려는 전시 말고, 고집과 취향이 강한 큐레이터가 자신만의 시각으로 발굴한 아티스트들을 소개하는 거 말이다.
물론 이자람은 유명한 뮤지션이다. 다만 한국을 오래 떠나 있던 내게는 전혀 낯선 사람이었고, X세대 이상만 알아듣는 설명("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하던 그 노래 속 아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듣고서야 가느다란 연결점이 생겼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연결점은 전혀 필요 없었다. 나는 공연이 시작된 직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자람의 공연을 들어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판소리가 원래 이런 예술이었나?' 할 만큼 깜짝 놀랄 공연이었다. 과거와 현대를 마구 오가면서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흐려지고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노래, 보고 있는 공연이 도대체 무슨 장르인지 헷갈리는데, 그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너무나 재미있었고, 공연 말미에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야 했다. 얼마 전에 읽은 '아무튼, 무대'라는 책에서 글쓴이가 이자람의 공연을 본 얘기를 하면서 "자지러지게 웃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웃다가 난데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크게 공감했던 이유가 그게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날의 공연을 '현대적인 판소리' '퓨전 판소리'라고 설명하는 건 적절한 것 같지 않다. 그 설명이 틀려서가 아니라, 이자람이라는 아티스트가 아니면 만들어지기 힘든 무대일 거라서 그렇다. 공연 내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머리를 맴돌았다. "최연소 춘향가 8시간 완창 기록"이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 '억척어멈과 자식들'을 판소리로 만들어 세계를 누빈" 소리꾼 같은 설명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객석 가득한 관객과 저 정도로 자연스럽게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공연장을 나왔다.
'예솔아~' 속 아이와 30, 40대 뮤지션 사이를 연결하는 선이 궁금했고, 이 궁금증은 인터넷 검색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자람 님이 책을 쓰셨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출판사의 편집자 한 분이 이메일로 내게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내가 오터레터 RT와 페이스북에 '아무튼, 무대'에 관해 글을 쓰면서 이자람의 공연 이야기를 한 것을 읽고 반가워서 연락을 하셨단다. 왜냐하면 이 출판사(창비)에서 최근 이자람의 에세이를 펴냈기 때문.
미국으로 책을 보내주시겠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고, 전자책을 구매하려 했는데 내가 가진 리더기의 '캐시충전'에 자꾸 문제가 생겨서 결국 출판사에서 선물로 보내주신 전자책으로 읽었다. 내가 3년 전에 가졌던 궁금증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해소시켜주는 책이었다. 1부는 이자람이라는 아티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일기장 같다면 (가령, 평소 집에서 연습을 할 때는 '옷방'에서 하고, 자신의 성량 때문에 귀마개를 한다) 2부는 내가 궁금했던 '예솔이 이후, 지금의 뮤지션이 되기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성장기이고 (인디밴드 리드 싱어와 소리꾼이라는 서로 다른 이미지가 한 사람 안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듣게 된다) 3부는 자신의 인생관을 솔직하게 (진짜로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읽는 내내 내 주변에서 이 책을 정말 좋아할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나라를 구할 듯 거창한 목표를 향해 달리는 종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잘 살피는 사람들, 하루 종일 나의 생각과 그 생각에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피는 사람들이다. "굳이 밥 안 먹을 건데도 '나중에 밥 한번 먹읍시다'라고 안 해도 되는" 걸 깨닫고 "말값을 지키려 하다보면 순간순간의 작은 약속과 지나가는 말들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라고 다짐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이 책을 소중하게 읽을 거다.
책에 대한 소개는 길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누구나 자기만의 해석을 할 텐데 미리 자세한 감상을 적어서 스포일러를 만들거나 프라이밍(priming)을 하고 싶지 않다. 친구의 추천을 믿고 공연장에 따라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감사하게도 출판사에서 오터레터 독자분들께 이 책 20권을 선물해주시겠다고 합니다. 항상 하던 방식대로 원하시는 분은 아래 대화 버튼을 눌러서 의사를 표해주시면 제가 무작위 추첨을 해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시간으로 월요일 자정까지 적어주시는 분들 중에서 추첨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첨에 응하시는 분들은 꼭! 이메일을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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