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이 "쓰레기 TV(Trash TV)"라고 부르는 장르가 있다. 1960년대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냥 "타블로이드 토크쇼"라 불렸고, 대중의 단순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을 데리고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시청률을 뽑아내는 정도였지만, 1990년대에 이르면 TV 카메라 앞에서 여성들이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고, 그걸 지켜보는 방청객이 환호하는 진정한 '쓰레기 TV'가 탄생하게 된다.

지금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졌지만, 그 기원을 물으면 누구나 제리 스프링어(Jerry Springer) 쇼를 이야기한다.

제리 스프링어 쇼에서는 이런 장면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고 보면 된다. (이미지 출처: The Today Show)

1991년에 방송을 시작해서 2018년에 종영한 제리 스프링어 쇼는 미국의 케이블 방송의 질을 최악으로 떨어뜨린 주범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 쇼가 큰 성공을 거둔 후 많은 비슷한 포맷의–그러나 더 질이 낮은–쇼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기 때문이다. 타이틀이 진행자 본인의 이름이니 제리 스프링어는 쓰레기 TV의 대명사가 되었다.

제리 스프링어는 지난 4월에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기사들은 하나같이 그가 요란스러운 토크쇼의 진행자였다고 소개한다. 자신의 생애가 이렇게 요약되는 것에 대해 스프링어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사람은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힌트가 있다. 아래 뉴욕타임즈 기사를 잘 보면 흥미로운 문장(붉은색 하일라이트)이 등장한다:

"Mr. Springer also had a career in politics. (스프링어 씨는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영국의 가디언과 미국의 뉴욕타임즈에 실린 부고 기사

나는 오래전에 라디오에서 스프링어의 정치 경력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미국인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나 기억하는 과거의 일이라 그 이야기를 신기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제리 스프링어 쇼를 통해 갖게 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진보적인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스프링어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유망한 정치인이었다고 한다.

1968년에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 암살당한 미국 진보의 상징 RFK. 그보다 뛰어났다는 말은 믿어지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1968년 선거 유세 모습 (이미지 출처: Time)

제리 스프링어는 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4년, 런던의 지하철역에서 태어났다. 그를 임신한 어머니가 나치의 공습을 피해 당시 방공호로 활용하던 지하철역에 머물다가 그를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영국인이 아니라 지금의 폴란드 지역에 살다가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피난한 유대계였다. 그렇게 태어난 스프링어가 4살 때 가족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온다.

그가 처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2살 때이던 1956년 존 F. 케네디(JFK, 로버트 케네디의 형)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는 것을 봤을 때라고 한다. 그는 루이지애나 튤레인 대학교를 졸업하고, 노스웨스턴 대학교 법학대학원을 마친 후 정치에 뛰어든다. 그때가 1968년이었고, 스프링어는 로버트 케네디 선거운동에 참여해 자원봉사를 한다.

아래의 내용은 앞서 언급한 라디오 방송의 내용을 문어 투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2004년에 처음 방송된 것으로, 여기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

절은 시절의 제리 스프링어 (이미지 출처: Reddit)

사람은 간단하지 않다. 한 사람 안에는 상반된 면이 존재한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남을 돕는 사람이 어느 순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주위 사람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도 한다.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매일, 매 순간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하루는 좋은 사람이었다가, 다음날은 아주 거슬리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우리 대다수는 착한 면과 나쁜 면을 모두 갖고 있다.

제리 스프링어가 그런 사람이다. 그에게는 제리 스프링어 쇼로 대표되는 것과 상반된 면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존 F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와 같은 이상주의자였다. 나이가 들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젊은 시절의 정체성을 포기하기 힘들어했다.

스프링어는 1969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로 이사한다. 법대를 졸업하고 신시내티에 있는 로펌에 취직한 것이다. 하지만 반년 만에 연방 하원에 도전하며 정치에 뛰어든다. 그의 상대는 현역 공화당 의원이었다. 법대를 갓 졸업한 25살의 젊은이, 그것도 다른 주에서 온 스프링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는 로버트 케네디가 외쳤던 진보적인 이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이었고, 스프링어는 월남전에 반대하고 민권운동을 지지했다. 이런 이상주의적인 정치 신인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반했다. 신시내티 정치판에서 오래 활동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리 스프링어는 제가 만나 본 정치인 중 가장 재능있는, 타고난 정치인이었어요. 할머니들도, 어머니들도, 남자도, 여자도 다들 스프링어를 좋아했죠." "스프링어는 (대중이 반한 정치인들로 유명한) 로널드 레이건, 로버트 케네디, 빌 클린턴급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신시내티 사람들만 반한 게 아니었다. 빌 클린턴, 지미 카터, 마이클 듀카키스 같은 정치인들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한 선거 전문가는 자신이 함께 일했던 정치인들 중 최고는 단연 제리 스프링어였다고 단언한다.

젊은 시절의 그를 만난 사람들은 다들 케네디 같았다고 말한다. 당시 그의 말투를 들어보면 실제로 케네디 형제들과 같은 보스턴-하버드 억양이 있다. 나중에는 전혀 다른 말투로 바뀌었지만, 당시만 해도 그는 로버트 케네디가 되살아 나온 것 같은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말투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당시 그의 선거 유세를 들어보면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에 했던 주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령 "GNP는 국민의 삶의 질을 반영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그렇다.

하지만 스프링어는 백인 유권자로 가득한 미국 중서부의 보수적인 도시에서 진보 후보로 5선 의원을 상대로 싸워야 했고, 이런 생애 첫 선거에서 패한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신시내티 시의원으로 출마해 승리한다. 시의원이던 당시 그의 참모였던 팀 버크는 스프링어의 인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VFW(Veterans of Foreign Wars, 해외 참전군인) 홀에 모인 청중을 대상으로 자신이 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지를 설명하는 건 정치인에게 유리한 전략이 아니었죠.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쟁에 반대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유세를 마치고 나면 청중은 제리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바뀌어 있었어요."

스프링어는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유권자들은 "당신이 말하는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스타일은 마음에 든다. (그런 주장을 우리에게 하는) 당신의 배짱이 좋다"라고 했다. (이건 로버트 케네디가 1968년 선거 운동에서 보수 백인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킨 비결이기도 하다–옮긴이) 그렇게 해서 1971년에 시의원에 당선된 스프링어는 대형 스타디움을 짓는 데 세금이 사용되는 것을 반대하는 등 눈에 띄는 의정활동을 하며 관심을 모았고, 1974년 재선에 성공했을 때는 시에서 최다 득표를 한 의원이었다.

(이미지 출처: Diply)

멍청한 정치인

하지만 재선에 성공한 스프링어는 6개월 만에 의원직을 내려놓는다. 성매매 혐의 때문이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는 강(켄터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켄터키주와 접하고 있는데, 이 강 건너 편에서 불법 마사지 영업소가 있었다. 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FBI가 수사를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에 시의원인 스프링어가 이곳을 이용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정치인의 성매매는 그 자체로도 뉴스감이지만, 이 사건이 큰 화제가 된 건 그가 성매매를 한 후 자신의 이름이 적힌 개인 수표로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라는 상황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사람들은 그가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보다 그의 멍청함에 더 놀랐다고 한다. "세상에 어떤 멍청이가 성매매를 하고 개인 수표를 사용하느냐"라는 것이다.

스프링어는 자신의 행동이 드러난 즉시 시의회에서 사퇴했다. 너무나 즉각적인 사퇴여서 동료 정치인들이 놀랐다고 한다. 정치적 인생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한 스프링어는 신시내티를 떠나 먼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생각을 바꾸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자초지종을 밝히며 자기 잘못을 인정했고, 유권자들에게 사과했다. 구차한 핑계나 변명이 없는 솔직한 사과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의 편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신시내티의 가톨릭 수녀들은 우편으로 신시내티 시의회에 돌덩이를 보내서 "죄가 없는 사람만 (스프링어에) 돌을 던지라"라고 했다. 이 말은 기독교 성경에 예수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비난하던 군중에게 한 말이다. 솔직한 사과 때문에 그에게 날아오던 돌이 다른 정치인들을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끝난 줄 알았던 그의 정치생명이 기적처럼 연장되었다.


'제리 스프링어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