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미래였다 ①
• 댓글 남기기아래는 BBC의 루퍼트 윙필드 헤이즈(Rupert Wingfield-Hayes)기자가 10년 동안의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일본을 떠나면서 쓴 글이다. 일본이 처한 경제와 인구 위기는 그동안 언론을 통해서 익히 알려졌지만, 비슷한 상황에 있는 (그러나 조금은 다른) 한국에서 보는 것과 일본에서 10년 동안 살았던 영국인의 눈을 통해 보는 건 조금 다를 수 있다. 거창한 통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나고 취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라서 훨씬 흥미롭게 읽혔고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글 전체를 번역해서 소개한다.
일본에서 집의 가치는 자동차와 같다. 집을 사서 이사 들어오는 즉시 부동산 가치는 내가 지불한 금액 이하로 떨어진다. 40년에 걸쳐 주택융자금을 모두 갚고 나면 집의 가치는 거의 남지 않는다. 나는 BBC의 특파원으로 일본에 부임하면서 이 사실을 처음 알고 놀랐는데, 이제 10년이 지나 떠나게 된 지금, 상황은 그때와 똑같다.
일본은 세계 3위 규모의 경제를 가진 나라다. 평화롭고, 풍요하고, 국민의 기대수명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 살인율은 가장 낮고, 정치적인 갈등도 별로 없고,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여권을 가졌고, 환상적인 신칸센은 세계 최고의 고속철도망이다.
지금 세계가 중국의 경제의 빠른 성장을 겁내는 것처럼 미국과 유럽은 한때 빠르게 성장하는 일본의 경제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가 세계를 호령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1980년대만 해도 일본인들은 미국인들보다 돈이 많았다. 지금은? 영국인들보다도 돈을 적게 번다.
일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침체된 경제와 씨름해왔다. 변화에 대한 강한 저항, 과거에 대한 고집스러운 애착이 일본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제 일본은 고령화 사회에 들어섰고,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일본은 꼼짝 못 하고 있다.
미래는 일본에 있었다
내가 일본을 난생처음 방문했을 때가 1993년이다. 그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네온 불빛이 가득한 긴자나 신주쿠가 아니라 하라주쿠 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성들의 '강구로' 패션이었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 어디보다 풍요롭게 느껴졌다. 아시아의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도쿄는 놀라울 만큼 깨끗했고 질서정연했다. 그에 비하면 홍콩은 모든 감각기관을 공격하는 듯했다. 시끄럽고 냄새가 가득한–빅토리아 파크의 화려한 저택들부터 가우룽 북쪽 끝에 있는 "어둡고 사악한" 저임금 공장까지 모두 모인–극단적인 도시였다.
내가 중국어를 배우던 타이페이의 거리는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2기통짜리 스쿠터의 소음으로 가득했고, 스모그로 두 블록 앞을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만약 홍콩과 타이페이가 아시아의 떠들썩한 십 대 아이들이었다면 일본은 어른이었다. 물론 도쿄는 콘크리트 정글이었지만, 아름답게 잘 가꿔진 콘크리트 정글이었다.
도쿄의 왕궁 앞 스카이라인은 미쓰비시, 미쓰이, 히타치, 소니 같은 일본 대기업의 매끈한 유리 빌딩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뉴욕부터 시드니까지 야심에 찬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배우라고 했고, 나는 중국어를 배우기로 한 나의 결정이 실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의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제조업을 점령했다. 해외에서 돈이 쏟아져 들어왔고,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부동산을–심지어 임야까지–사들이면서 부동산 붐이 일어났다. 1980년대 중반에는 도쿄의 왕궁이 들어선 땅의 가격이 캘리포니아주 전체의 부동산 가치와 맞먹는다는 농담까지 나왔다. 일본에서는 이 시기를 "바브루 지다이 (バブル時代, 버블 시대)"라 부른다.
그러다가 1991년에 그 버블(거품)이 터졌다. 도쿄의 주식시장은 무너졌고, 부동산 가격은 폭락했다. 그렇게 떨어진 부동산 가격은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다. 최근 한 친구가 임야 몇 헥타르를 사려고 흥정 중인데, 땅 주인은 제곱미터당 20달러를 부르고 있단다. "내가 주인에게 그 땅은 제곱미터 당 2달러밖에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지만, 주인은 20달러를 고집하고 있어. 그분이 1970년대에 그만큼을 주고 샀거든."
일본의 멋진 고속열차를 떠올리거나, 토요타 생산 라인의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 방식을 생각한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효율성의 대명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일본은 무시무시한 관료주의의 나라이고, 공적 자금은 그 효용이 의심스러운 곳에 사용된다. 지난해 나는 일본 알프스의 한 도시에서 아름다운 맨홀 뚜껑을 만든 사연을 알게 되었다. 1924년, 고대 코끼리의 뼈 화석이 도시 인근 호수에서 발견되었고, 이게 그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몇 해 전, 누군가 현재 도시에 있는 맨홀 뚜껑을 코끼리의 이미지가 들어간 새 걸로 전부 교체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 이후로 똑같은 일이 일본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이렇게 서로 다른 6,000여 개의 맨홀 뚜껑 디자인을 연구하는 '일본 맨홀 뚜껑 학회'라는 것도 생겨났다. 이들 맨홀 뚜껑은 예술작품처럼 아름답다. 따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개당 가격이 900달러(약 117만 원)까지 나간다.
일본이 어쩌다가 세계에서 가장 큰 공공부채를 안고 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면 여기에 실마리가 있다. 게다가 인구가 고령화하면서 부채 문제의 해결도 쉽지 않다. 일본 사회의 건강보험과 연금에 대한 부담 때문에 일본인들은 나이가 들어도 은퇴를 못 하고 있다.
내가 일본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러 갔을 때 겪은 일이다. 나를 시력검사와 증명사진 촬영, 수수료 납부 창구로 안내하던 극도로 예의 바른 직원이 내게 "28호 강의실"로 가서 "안전"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교통 법규 위반 사항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단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의기소침한 사람들이 모여서 처벌(=강의)을 기다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들어오더니 10분 후에 "강의"가 시작되며, 강의 시간은 2시간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굳이 강의를 이해해야 할 의무도 없다. 나는 강의의 대부분을 귓등으로 들었다. 강의가 한 시간을 넘어가면서 듣던 사람 중 몇몇이 잠을 자기 시작했고, 내 옆에 앉은 사람은 노트에 도쿄 타워를 멋지게 그리고 있었다. 나는 지루해졌고, 화가 났다. 벽에 걸린 시계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끝나고 사무실에 돌아온 나는 일본인 동료에게 물었다. "이런 강의를 하는 의도가 도대체 뭐예요? 그냥 벌을 주려는 거 맞죠?" 내 말을 들은 동료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했다. "그거, 은퇴한 경찰관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에요."
하지만 일본에 오래 살면 살수록 짜증 나는 것들이 익숙해지고, 심지어 귀엽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령 주유소에서 네 명의 직원이 나와서 기름을 넣는 동안 자동차의 모든 유리를 닦아주고 떠날 때 일제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희한한 장면도 나름 친근하게 느껴진다.
일본은 여전히 일본이고, 미국의 재현이 아니다. 세계인들이 가루눈에서부터 패션까지, 일본적인 것들에 열광하는 이유다. 도쿄는 최고급 레스토랑들이 모인 곳이고, (디즈니에는 미안한 얘기지만) 스튜디오 지브리는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다. 솔직히 J팝은 들어주기 힘들어도 어쨌거나 일본이 소프트 파워의 강대국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상의 온갖 괴짜들이 일본과 일본이 가진 놀랍도록 이상한 면을 사랑한다. 하지만 일본에는 이민에 반대하고 가부장제를 수호하려는 극우 세력을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죽했으면 일본은 고대의 것을 버리지 않고 현대화하는 데 성공한 나라라 부르겠는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일본에 존재하는 '현대'는 그저 껍데기에 가깝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들이닥치자 일본은 국경을 닫아버렸다. 심지어 일본에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들도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을 금했다. 나는 일본 외교부에 전화해서 일본에서 수십 년을 살았고, 그곳에 집도, 사업체도 있는 사람들이 왜 일본에 들어갈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전부 외지인들(foreigners)입니다"라는 직설적인 답이 돌아왔다.
강제로 문호를 개방당한 지 150년이 지났지만 일본은 여전히 외부 세계에 회의적이고, 심지어 두려워한다.
나는 도쿄만 건너편 보소반도에 있는 한 마을에 갔던 일을 기억한다. 내가 그곳에 갔던 이유는 그 마을은 일본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 900개의 마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곳 마을회관에 모여있던 노년의 남성들은 마을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로 마을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는 걸 봐왔다. 마을에 남은 60명 중에서 십 대는 한 명뿐이고 어린이는 없었다.
"우리가 죽고 나면 누가 우리 무덤을 돌보겠나요?" 한 노인이 한탄했다. 일본인들은 세상을 떠난 사람의 혼을 돌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 이런 마을이 사라진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어 보였다. 마치 그림엽서에서 볼 듯한 논과 나무가 빽빽한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마을은 도쿄에서 2시간만 운전하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나는 "마을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여기에 살겠다고 찾아올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가족들과 이곳에 와서 산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라고 물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멈춘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본은 미래였다 ②'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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