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의 이스라엘 장악 ② 발단
• 댓글 1개 보기현대 이스라엘이 탄생한 1948년 직후부터 주변의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땅에 있던 아랍 사람들을 밀어내고 만들어진 국가였기 때문이다. 건국 직후부터 주변국들은 이스라엘과의 국경에 병력을 배치해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켰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끊임없이 막아내며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UN은 이 지역에 평화유지군을 보내서 사태가 악화되는 걸 막았다.
그런데 1967년 봄,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시나이반도에 병력을 집결하고 UN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 후 홍해로 들어가는 티란(Tiran) 해협을 봉쇄하면서 이스라엘의 경제를 위협했고, 5월에는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와 동맹을 맺었고, 이스라엘과의 접경지대에 병력을 증강하면서 이스라엘 침공을 암시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스라엘은 이들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 전쟁이 '6일 전쟁'으로도 불리는 3차 중동 전쟁이다.
이스라엘은 기습 공격으로 주변국의 공군을 궤멸한 후, 지상전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오히려 세 나라의 영토를 빼앗았다.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빼앗겼고 (1982년에 이스라엘이 반환했다) 지금까지 문제가 되는 가자(Gaza) 지구, 요르단 서안(West Bank) 지구, 골란고원(Golan Heights)이 모두 이때 획득한 땅이다. 단 6일 동안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2배가 되었다. 이스라엘로서는 자축할 일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빼앗아 차지한 새로운 영토에는 1백만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새로운 영토를 보는 이스라엘 국민의 시각은 일치하지 않았고,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되었다는 게 로넨 버그먼 기자의 설명이다.
세 가지 다른 시각
이스라엘에는 그렇게 뺏은 땅은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주변국들에게 땅을 되돌려주는 대가로 평화를 보장받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국가를 만들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반환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로넨 버그먼 기자에 따르면 1967년에 확대된 영토와 관련해서는 반환하자는 주장과 반환하지 말자는 주장으로 크게 갈리지만, 이 영토를 보는 시각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1967년에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자는 사람들은 1948년 현대 이스라엘을 건립한 주축 세력들과 정치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이다. 대체로 비종교적(secular)이고, 진보적인 이들은 이스라엘이 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고 믿을 뿐 아니라,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이렇게 커진 영토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국가가 없으면 중동 지역의 정세는 항상 불안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협상에 열려있었다. 가장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보(security)였지만, 이들에게 안보는 단순히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법치주의 민주국가를 의미하기도 했다.
둘째, 비종교적인 우익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국가 설립에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지만, 안보적인 측면에서는 요르단 서안 지구는 이스라엘이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변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종교적인 우익이다. 이들은 앞의 두 그룹과는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새로 빼앗은 영토를 이스라엘이 지배함으로써 메시아가 세상에 찾아오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기독교의 예수가 아니다.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가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그의 재림(다시 세상에 오는 것)을 기다리지만,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모두 예전 땅에 돌아오고, 과거의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메시아가 온다(초림)고 믿는다. 재미있는 건, 기독교인 중에도 이렇게 과거의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면 예수가 재림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은—비슷하지만 다른 이유에서—이스라엘이 빼앗은 영토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그런 종교적인 이유로 미국 내 친이스라엘 정책을 지지하고, 이스라엘의 우익도 이유야 어떻든 이들의 지지를 반긴다.
특히 세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롭게 얻은 땅으로 가서 집을 짓고 정착하는 운동을 벌인다. 이때부터 이들은 요르단 서안을 중심으로 꾸준히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켜 왔지만, 살 곳이 없어서 생계형으로 만든 정착촌이 아니다. 이들의 정착촌 만들기는 중요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을 통해 획득한 땅은 엄밀하게 말하면 점령지(occupied territory)에 해당한다. 국제법에 따르면 점령지에 사는 사람들은 군법과 군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새로 얻은 땅을 지키고 싶은 극우 민족주의 종교인들은 이런 법적 지위에서 문제를 발견했다. 군은 상부(정치 지도자)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만약 이스라엘 정부가 다른 나라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해서 이들 지역을 내어주기로 한다면 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모든 게 무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 정착촌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하면? 거주민을 몰아내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정부의 결정과 무관하게 민간 차원에서 그 땅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보험, 혹은 협상 카드로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한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법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 지역들을 지배하는 군은 법에 따라 그곳에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군법을 무시하기로 결정한다. 대표적인 단체가 구쉬 에무님으로, 이들은 1975년부터 가자 지구와 요르단 서안, 골란고원에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어 왔다. 그들이 이를 처음으로 행동에 옮긴 것은 1975년, 요르단 서안 지구에 위치한 (요르단 군이 후퇴하면서 버리고 간) 군부대를 차지하고 자기들의 소유라고 선언했을 때다.
이들이 보란 듯 법을 어기는 것을 본 이스라엘군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당시 이스라엘군(IDF)의 총사령관은—훗날 이스라엘의 총리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될—시몬 페레스였고, 이스라엘이 점령한 요르단 서안은 그의 지휘 아래 있었다. 페레스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정착촌 건설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민족주의자들과 정면 대결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묵인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불법을 용인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구쉬 에무님이 만든 건 정착촌이 아닌 '노동 캠프'라고 부르며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만들었다. 로넨 버그먼 기자는 이스라엘군의 이런 결정이 극우 민족주의자들을 키워주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한다. 이들은 그때를 계기로 '명백하게 불법적인 행동을 해도 끝까지 버티면 이긴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군을 꺾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을 얻은 이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는 요르단 서안에 정착촌 확장에 박차를 가한다.
게다가 1977년에는 이스라엘의 건국 이래 처음으로 우익 정당인 리쿠드당이 집권했기 때문에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운신의 폭이 더 넓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집권한 우익 리쿠드당의 지도자 메나헴 베긴이 총리가 된 후에 느닷없이 이웃 국가들과 평화 협상을 시작한 거다.
'극우의 이스라엘 장악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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