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재산권의 풍경 ②
• 댓글 남기기지난 22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막내아들인 덱스터 스캇 킹(Dexter Scott King)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킹 목사에게는 훗날 목사가 된 막내딸 버니스(Bernice)를 포함해 네 명의 자녀가 있었고, 네 명이 모두 아버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활동가로 일했다. 그런데, 이번에 덱스터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 "아버지가 남긴 정신적 유산과 지식재산권을 지키는 데 평생을 바쳤다"라는 내용이다.
킹 목사가 남긴 각종 지식재산권(IP) 관리가 그의 주업이었던 거다.
벨로스와 몬터규는—덱스터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온 책에서—그가 하던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한다. 킹 목사의 음성과 모습이 담긴 녹음, 영상에 대한 판권은 유족이 세운 재단과 EMI가 함께 소유하고 있고, 덱스터가 가족을 대표해서 그 재단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CBS 방송이 킹 목사와 관련한 영상 내용을 제작하면서 유명한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의 일부를 사용한 일이 있었다. 덱스터는 재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사용이라며 CBS를 고소했다. 덱스터는 "CBS가 그걸로 돈을 번다면 수익의 일부는 나에게 와야 한다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CBS가 이겼지만, 항소심에서 결정이 뒤집어졌고, 결국 CBS가 킹 목사의 가족이 운영하는 재단에 기부금을 내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라이선스 비용이 아니라 기부금으로 할 경우 기업이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CBS 규모의 기업이나 재판이라도 해볼 수 있는 거고, 개인이나 작은 기업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재판 비용이 두려우니 이런 자료, 창작물은 아무도 이용하지 못하고 창고에 갇혀있게 된다. 수많은 책과 음악(특히 모타운 음악이 그렇다)이 적법하게 사용할 방법이 없어 그렇게 사장된다.
나는 그런 상황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이 있다. 2022년에 책을 펴냈는데, 주제가 미술이어서 책에 삽입되는 그림이 많았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출판사가 저작권 소유자에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는데, 누가 저작권을 가졌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고, 아무리 연락을 시도해도 답이 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한 출판사와 함께 고민하던 끝에 온라인에 있는 그림으로 가는 QR를 만들어 독자가 스마트폰을 통해 직접 확인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지식재산권을 가진 기업들은 이를 사용해 최대한 이익을 뽑아내려 한다. 벨로스와 몬터규의 책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렇다. 한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노동자들이 방에 모여 쉬고 있는 장면을 찍었다.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보드게임을 하는 모습이었는데, 마침 그들 뒤에는 TV가 켜져 있었고 TV에서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 가족(The Simpsons)'이 방영되고 있었다. 제작자가 4초 분량의 그 장면의 사용을 허락해 달라고 폭스에 문의했더니 1만 달러(약 1,300만 원)를 내라는 답이 왔다고 한다.
기업들은 이렇게 배경(background)에 등장하니 돈을 내거나 콘텐츠를 내리라는 요구를 하고, 소송도 불사한다. 유명한 사례가 '춤추는 아기(Dancing Baby)' 유튜브 영상이다. 어린 아기가 프린스(Prince)의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영상으로, 2007년도에 나온 거라 화질도, 음질도 아주 떨어진다. 하지만 30초도 되지 않는 이 영상이 바이럴되자 프린스 음악의 저작권을 소유한 유니버설이 저작권 위반이라며 영상을 내리라고 요구했고, 부모가 이를 거부하자 소송을 걸었다. 결국 부모가 이겼지만 무려 10년이 걸렸다.
이런 지독한 지대추구(地代追求, rent-seeking, 기존의 부에서 자신의 몫을 늘리는 방법을 찾으면서도 새로운 부를 창출하지는 않는 활동)로 인해 사진 속 배경에 다른 작품이 등장하면 사진작가뿐 아니라 그림의 저작권자까지 찾아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기는 거다. 어처구니없는 건, 똑같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수십억 명이 아무런 돈을 내지 않고 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잘해야 1, 2만 부 팔릴 책에 같은 이미지를 넣고 싶은 저자는 수백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창작의 본질
벨로스와 몬터규가 책에서 거듭 주장하는 건 모든 창작은 이미 존재하는 창작물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시나 영화를 만들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시와 영화를 생각하게 되고, 철학자는 과거 철학자들의 저작을 생각하게 되고, 역사학자들은 기존의 역사 연구를 살핀다. 똑같은 원칙이 틱톡 영상에도 적용되고, 심지어 생명체의 탄생도 그렇다. 산다는 것 자체가 집단이 함께 하는 작업이다.
문제는 그렇게 기존의 작품을 공정하게 이용하는 것과 도둑질하는 것의 구분이 모호할 때가 있다는 것이고, 이 지점에서 많은 법적 분쟁이 발생한다. 미국 법원은 기존 창작물의 변형적 이용(transformative use)을 기준으로 그 둘을 판단한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 저작권법에는 변형적 이용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고, 어느 판사가 판결문에서 사용한 기준일 뿐이다. 그러니 명백한 기준선이 존재하지 않고, 주관적인 판단에 그치게 된다.
변형적 이용과 관련해서는 한국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고려대학교 박경신 교수의 '공정이용의 새로운 정의'라는 글을 추천한다. 이 글에서 박경신은 이 개념의 모호성을 인정하면서 변형적 이용을 "원저자물과 완전히 다른 감흥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존 창작물의 변형적 이용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누구나 알고 있는 기존의 상업적 이미지를 새롭게 변형해서 내놓곤 했던 팝아트다. 작년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는 앤디 워홀이 자신의 작품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사진작가 린 골드스미스(Lynn Goldsmith)와 워홀의 작품은 골드스미스의 사진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즉 변형되었기 때문에 정당한 사용이라고 주장하는 앤디 워홀 재단 측의 주장을 모두 듣고 사진작가 골드스미스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문을 쓴 소냐 소토마요르(Sonia Sotomayor) 대법관은 이 문제를 워홀 재단이 잡지에 라이선스를 줄 권리가 있느냐에만 집중해서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식적일 것 같지만, 같은 문제가 팝아트에서 팝 뮤직, 즉 대중음악으로 가면 훨씬 더 기괴한 논리로 변한다.
먼저,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대부분 엄격하게 정해진 공식을 따르기 때문에 서로를 베끼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12마디 블루스 음악은 똑같은 세 개의 화음으로 만들어지고, 재즈곡의 대부분은 "리듬 변화(rhythm changes)"라 불리는 화음 진행을 따르고, 포크송과 록 음악, 컨트리뮤직은 각각 특정한 사운드를 철저하게 따른다. 각 장르가 똑같은 룰을 따르는 이유는 뭘까? 순수 예술과 달리 대중 예술은 모방—정확하게는 약간의 변형이 들어간 모방—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좋아하던 걸 좋아한다. 영화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제작사들은 이미 인기를 끈 작품의 후속편을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재미있는 대목은 음악(미국 대중 음악)의 경우 A라는 가수의 노래를 B가 불러 녹음을 할 때 아무런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새롭게 녹음한 노래로 돈을 벌 경우, 한 번 팔릴 때마다 37센트를 저작권자에게 주면 된다. 흔히 "커버(cover)"라고 부르는 이런 녹음은 자연스럽게 대중 음악계를 채우게 되고, 유명한 곡을 검색하면 다른 가수가 부른 버전이 가득 등장한다. 그런데 만약 A가 부른 노래에서 일부를 가져다 부르면? 소송을 당하게 된다.
대중음악은 기본적으로 모방에서 출발하는데, 특정 요소를 가져다 사용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게 현실이다.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대중 음악계에 표절 시비가 끊이지 않는 이유, 언론에서 이를 "정답 없는 싸움"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패럴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가 로빈 시크(Robin Thinke)와 함께 부른 "Blurred Lines"는 마빈 게이(Marvin Gaye)의 "Got To Give It Up"을 표절했다는 판결을 받았지만, 역시 마빈 게이의 곡("Let’s Get It On")을 표절했다고 소송을 당한 에드 시런(Ed Sheeran)은 승소했다. 그 재판 과정서 시런은 배심원들을 상대로 직접 노래를 부르면서 똑같은 코드 진행을 가진 곡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마빈 게이의 곡 하나가 그 원저자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나쁜 주장인지를 설득했다.
시런이 법정에서 노래까지 하면서 설명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시런 정도의 인기 가수이니 배심원들이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고, 그만큼 판사나 배심원처럼 음악을 모르는 비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새로운 전선, 인공지능
예술에 대해 무지한 비전문가들이 문제를 판단하는 게 문제라면, 이 문제는 앞으로 더욱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AI)이 창작의 영역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AI는 저작권 관리를 어렵게 만들었던 많은 기술 중 가장 최신판에 불과하다. 가령,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이를 창작물로 생각하지 않았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사진작가의 저작권이 인정되었다. 라디오가 등장해서 음악을 송출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의 작곡가 협회는 자신들의 곡을 중계하는 방송국에서 로열티를 받기 위해 싸워야 했다. 복사기가 등장해서 책 내용을 복사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무엇보다 CD의 등장 이후인 1999년에 나타난 냅스터(Napster)는 음악을 개인들 간에(peer-to-peer) 주고받을 수 있게 해줬다. 음악을 개인 사이에 주고 받는 것은 합법이라는 것을 이용해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껏 파일을 전송하게 해준 냅스터의 기술은 법원이 불법이라고 판결했지만, 결국 음반 업계를 무너뜨렸다. 판결이 나왔을 때는 이미 대중이 불법 다운로드에 익숙해져서 CD를 구매하는 것을 꺼리게 된 후였고, 냅스터를 단속한다고 해도 다른 P2P 서비스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애플이 아이튠즈를 들고 음반 업계의 구원자가 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스트리밍이 대세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AI의 위협은 역사의 반복이지만, AI가 저작권을 위협하는 '방식'은 다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생성형 AI는 다른 사람이 만든 창작물을 그대로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학습'한 후에 생성하는, 일종의 새로운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들이 AI 학습에 동원한 콘텐츠가 라이브러리 제네시스나 Z-라이브러리처럼 법의 회색지대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사람이 책을 읽고 학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책을 읽고 학습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는 기업들의 주장에 전혀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미국 법원은 구글이나 빙 같은 검색 엔진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가져와 보여주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변형적 이용"에 해당한다는 거고, 그렇다면 AI가 만들어 내는 콘텐츠도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뉴욕타임즈가 자사의 콘텐츠를 무단으로 가져가 학습에 사용한 오픈AI와 소송을 시작했지만, 이 소송의 경우 뉴욕타임즈의 제품 리뷰 서비스 와이어커터(Wirecutter)의 콘텐츠를 사실상 그대로 가져가 보여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사례를 가져왔다.
전문가들은 결국 AI기업들이 뉴욕타임즈 같은 대형 언론사들과는 라이선스 계약을 맺게 될 거라고 전망하지만, 그게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AI가 만들어 낸 콘텐츠에 저작권을 부여할 수 있느냐는 이슈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미드저니와 같은 AI를 사용해서 만든 그림의 저작권은 내게 있을까, 아니면 미드저니에 있을까? 일단 지난여름, 미국 연방 법원은 기계가 만든 작품에는 저작권을 부여할 수 없다고 판결했지만, 이 판결이 유지될지는 알 수 없다. 사진도 기계를 사용한 저작물이라면 인간이 AI를 이용해서 만든 게 다르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AI를 이용해 조니 캐시(Johnny Cash)의 목소리로 부른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나 사이먼 앤드 가펑클(Simon and Garfukel)의 곡을 좋아한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이 노래나 아래 노래를 들어보라. 조니 캐시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AI 조니 캐시는 신이 내린 선물이다.
하지만 이 노래의 음원은 누구의 소유일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커버이기 때문에 조니 캐시 재단이나 테일러 스위프트가 소유를 주장할 법적인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AI가 만든 창작물은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공유 자원(commons)은 아닐까?
AI가 시를 쓸 때는 내가 시를 쓰는 것과 똑같은 작업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시를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거다. 차이가 있다면 AI는 나보다 더 훨씬 더 많은 시를 읽고, 기억한다는 점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시를 읽을 권리가 있다면 챗GPT도 같은 권리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쓴 시가 진부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세상의 많은 시도 그렇게 진부하다.
앞으로 AI가 인류를 위협한다면 그 문제는 저작권법을 통해 해결되지는 않을 거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건 그저 돈을 두고 싸우는 모습이다. 라이선스 합의, 저작권 보호, 고용 계약...모든 것들이 어느 한 쪽에 더 많은 돈을 벌어주는 기괴하고 복잡한 규제라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AI의 세상에서 변호사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변호사 본인들이 AI로 대체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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