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터레터에 쓴 글 '그의 불길한 예감'에서 소개한 칼 세이건의 1985년 상원 청문회 영상을 보면 그가 기후변화의 문제를 "세대 간의 문제(inter-generational problem)"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우리 세대가 해결하지 않으면 다음에 오는 세대들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라는 얘기다.

세이건은 20대에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기 시작한 천재적인 학자이지만, 그가 당시 미국인들에게 유명해진 이유는 어려운 학문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이자 교육자로 기억한다. 세이건이 그렇게 소통과 교육에 열심이었던 이유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으면 사회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후세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다음 세대에 '횃불을 건네주는(passing the torch)' 것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도 그런 차원의 교육 활동이었다.

고대 그리스 수학자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크기를 계산한 방법을 설명하는 '코스모스'의 이 장면은 칼 세이건의 과학 소통 능력을 잘 보여준다.

그의 대중 교육 활동은 큰 효과가 있었다. 이전 글에 쓴 것처럼 많은 아이들이 그의 책과 다큐멘터리를 접하고 과학을 공부했고, 장래의 커리어로 삼았다. 그의 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 나온 후 PBS에서 진행한 인터뷰가 담긴 유튜브 영상(그의 마지막 영상이다)의 밑에는 아래와 같은 댓글이 있다. "내가 과학을 커리어로 삼게 된 이유는 100% 이 사람 때문이다. '코스모스' 시리즈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 내 인생을 바꿨다."

닐 디그래스 타이슨

칼 세이건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유명한 케이스가 바로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이다. 타이슨은 현재 미국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천체물리학자이자,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위치한 헤이든 플래니태리엄(Hayden Planetarium)의 관장으로 많은 교육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최고의 과학 인플루언서다. 재치 있는 말솜씨와 쉽고 정확한 설명으로 유명한 그의 영문 위키피디아 페이지에서 오른쪽 박스 아래쪽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Influences: Carl Sagan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칼 세이건이 가르친 코넬 대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influences)으로 칼 세이건을 들었을까? 그 역시 세이건의 책과 다큐멘터리를 접했겠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개인적인 경험이 있었다. 타이슨은 그 얘기를 종종 한다.

워낙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여러 버전이 존재하지만 추천하는 영상은 아래 두 개다. 짧은 버전은 방송 출연을 준비하는 동안 가볍게 이야기하는 "내가 칼 세이건을 처음 만났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칼 세이건 추모 행사에서 이야기한 조금 더 긴 버전, "칼 세이건에 대한 기억"이다.

"내가 칼 세이건을 처음 만났을 때"
"칼 세이건에 대한 기억"

위의 영상들을 추천하지만, 글로 읽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타이슨의 말을 글로 옮긴 기사를 통째로 옮겼다.


칼 세이건은 (제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의미의 '멘토'가 아니었습니다. 멘토란 우리가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일종의 도제처럼 전문 지식를 전수받는 대상입니다. 저는 칼 세이건을 아마도 평생 네 번 정도 직접 만난 것 같아요. 같이 술 마시는 사이도 아니었고요. 그렇게 멘토가 아닌 사람도 여러분에게 영향(influence)을 줄 수 있습니다. 본보기를 통해 영향을 줄 수 있죠. 그리고 어쩌면 그런 방식이 가장 최고의 영향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이 평소에 하던 대로 하는 거니까요. 여러분은 그 사람이 뭘 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면서 "나도 저렇게 행동했으면 좋겠다." 혹은 "나도 힘든 순간에도 저런 품위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은 "나도 저 분야에서 저런 지식을 갖고 싶다"라고 말하게 되는 거죠.

저는 칼 세이건을 만나기 전에 이미 우주에 관한 관심이 컸습니다. 칼 세이건이 제게 준 영향은 그분이 저를 만나줬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저는 그냥 브롱스에 사는 17살 짜리 고등학생이었을 뿐이니까요. (세이건이 가르치던) 코넬 대학교도 제가 원서를 낸 대학교 중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학교의 입학관리처에서 제 지원서를 세이건에게 전달하면서 "이 학생 관심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세이건은 직접 서명한 편지를 제게 보냈습니다. "학생이 코넬 대학교에 관심이 있고, 우주를 좋아하는 걸로 압니다. 혹시 코넬에 들러서 캠퍼스를 둘러보고 싶으면 우리 실험실을 보여줄게요." 칼 세이건이 말입니다! 세상에(Holy shit). 진짜 칼 세이건이었어요. 누가 시켜서 그 편지를 쓴 게 아니었어요. 그런 편지 쓰지 않아도 되는데도 한 거죠. 브롱스에 사는 17살짜리에게 누가 신경을 씁니까?

1975년, 칼 세이건이 고등학생 타이슨을 만날 약속을 기록한 캘린더

그래서 제가 코넬 대학교를 방문하게 되었죠. 칼 세이건은 건물 밖으로 나와서 저를 맞아주었어요.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가을학기가 끝나고 겨울 방학(연휴)이 시작한 시점이었어요. 세이건은 제게 실험실을 보여주고 자신이 쓴 책에 사인을 해서 제게 줬습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뒤에 있는 책꽂이에 손을 뻗어 한 권을 꺼냈는데 그게 그분이 쓴 책이었죠. 아, 멋지지 않나요(That was badass)–보지도 않고 자기 책을 뽑다니.

그렇게 얘기를 마칠 때 즈음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 때가 12월이었죠. 저는 버스를 타고 코넬까지 갔는데, 쉬운 여행이 아니었죠. 세이건은 제게 "버스가 올지 모르겠네"라면서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적어주었습니다. "만약 버스가 오지 않으면 내게 전화를 주게.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자면 되니까."

그날 세이건이 사인해서 준 책

저는 그때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내가 이분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라도 유명해진다면, 우주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을 이분이 내게 보여준 존중과 품위를 갖고 대할 의무가 있다"라고 말이죠. 그때 칼 세이건은 제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멘토가 아니었고, 그냥 평소 그분이 하던대로 행동했던 거죠. 그래서 그게 그분이 제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이 된 거죠.

또 다른 영향이 있어요. 저는 칼 세이건이 말할 때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어떤 표현을 사용하고, 대중문화를 어떻게 적절하게 가져다 사용하는지 봤습니다. 그건 과학과 일반 대중 사이에서 어떤 소통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증명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속으로 '사람들이 저런 방법을 통해서 저런 내용에 이렇게 반응하는 게 가능하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우주를 일반인들에게(down to Earth) 소개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면, 칼 세이건이 이미 해낸 일임을(즉, 가능한 일임을) 잊지 않겠다."


이런 인연 때문이었을까? 2014년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의 13부작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었을 때 제작사인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진행자로 닐 디그래스 타이슨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