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력
• 댓글 3개 보기미국인들은 지난 9년 동안 도널드 트럼프라는 이름을 거의 매일 들어야 했다. 오늘의 선거는 과연 트럼프를 기억의 저편으로 보낼 수 있을까? 미국의 한 정치학자는 "미국 정치는 패자를 싫어한다(American politics doesn't like losers)"라며, 이번에도 트럼프가 패하면 더 이상 정치판에 나오기 힘들 것으로 예측했다. 트럼프가 2020년 선거에서 패한 사실을 지금껏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정확하게 그거다. 트럼프가 선거에 세 번째 나올 수 있으려면 미국 유권자들—적어도 그의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패하지 않았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뜻밖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였을 뿐 아니라, 아웃라이어(outlier, 표본 중 다른 대상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통계적 관측치)였고, 블랙스완(black swan)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끌어들인 권위주의를 좋아하는 극우 성향의 유권자층은 미국 역사에 항상 존재했지만, 그들이 지지한 정치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달랐다. 워싱턴의 정치 시스템 자체를 공격하고, 그 안에서 일하기를 거부("Drain the swamp!")하면서 인기를 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선에 성공하는 것과 통치에 성공하는 것은 다르다. 트럼프는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훌륭한 대통령이었을까? 트럼프 집권 기간 내각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은 절반에 불과하다. 그뿐 아니라, 몇몇 고위직 인사들—비서실장, 합참의장, 안보 수석 보좌관, 국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은 트럼프가 대통령직에 적절하지 못한(unfit) 인물이라며 내놓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선출직이 아니라, 트럼프가 직접 뽑아서 함께 일한 사람들이다. 대통령의 선택을 받아 함께 일했던 측근들이 나서서 "이 사람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던 사례를 들어 본 기억이 없다. 그들은 왜 트럼프의 재선을 바라지 않는 걸까?
그들의 말을 정리한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유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 부도덕, 불법 행위 등 7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면 이들이 트럼프에 실망한 것을 넘어,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를 좋아하는 미국인, 심지어 한국인들도 그의 부도덕성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모르는 게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가 가진 성격적 결함이나 문제점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대통령이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미 4년 동안 대통령을 하면서 만들어 낸 성과가 적은 것은 야당의 반대, 혹은 팬데믹으로 인한 제약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그들의 생각은 맞을까? 트럼프는 이번에는 정말로 능력 있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세 명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시카고 대학교의 법학과 교수인 에릭 포즈너(Eric Posner), 뉴요커의 편집장 애덤 고프닉(Adam Gopnik), 그리고 뉴욕타임즈에서 사실상 트럼프를 전담하다시피 하는 매기 헤이버먼(Maggie Haberman)이 그 세 사람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에서 듣거나 읽을 수 있다.) 트럼프 정권을 오래 취재하고 들여다본 세 명의 진단은 "트럼프는 무능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트럼프가 단순히 성과가 없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무능력의 근원이 그의 작동 방식에 있다고 설명한다.
트럼프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그런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령 그의 수석 안보 보좌관을 지낸 H.R. 맥매스터(MacMaster)는 "트럼프는 정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을 뿐 아니라, 너무 조급해서 고위 관료들의 역할이나 결정을 내리는 다른 방법에 관해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더로서의 능력이 제한되었다. 그는 갈등이 발생하면 그걸 회피하거나, 때로는 그런 갈등을 오히려 부추겼다"고 했다. (아래 밑줄)
평생을 사업가, 엔터테이너로 살았기 때문에 정부의 작동 방식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배우려 하지 않거나 조직 내 갈등을 조장했다는 건 무슨 말일까?
트럼프가 좋아하는 것
매기 헤이버먼에 따르면 트럼프가 좋아하는 건 두 가지, 권력(power)와 찬사(praise)다. 그가 정치를 하기로 한 이유는 단순하다. 정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는 그가 가진 승부욕까지 자극한다. (그의 첫 번째 집권 때와 달리 이번에는 다른 목표도 있다. 2020년에 대선에 패배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 자기를 배신하거나 공격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이다.)
문제는 정치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권력, 찬사, 승부는 결국 통치(governing)를 위한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하지만 트럼프는 정작 통치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헤이버먼 기자는 미국 정치를 오래 취재하면서 기업인들이 출마해서 정치를 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봤기 때문에 그들이 정부,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몰라서 실수하는 것을 잘 알지만 트럼프 경우 완전히 차원이 달라서, 아예 관심이 없다는 거다. 민주주의 제도나 워싱턴의 프로세스, 투명성 등의 모든 룰이 그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그럼 이런 의문이 든다. 트럼프는 대기업의 총수 아니었나? 엄청난 부동산 재벌에 다양한 사업을 해온 사람인데 조직이나 인재 관리, 업무 프로세스에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 트럼프 시절 백악관 보좌관을 지낸 사람의 말에 따르면 트럼프의 백악관은 모든 사람이 대통령에게서 직접 명령을 받는 '바퀴살(hub and spoke)' 모델로 작동했다고 한다. 그 결과, 비서실장 같은 직책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트럼프는 왜 이런 식으로 조직을 운영했을까?
트럼프의 사업을 총괄하는 회사 '트럼프 기업(The Trump Organization)'이 그렇게 작동하는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자산이 많아서 규모가 커 보일 뿐, 실제로는 가족 기업이나 다름없이 운영되는 작은 회사다. 그런데 이런 조직을 운영하면서도 트럼프는 측근 A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B에게는 얘기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 B가 알아야 할 정보인데도 말이다. 그 바람에 부하직원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경쟁하게 되는데, 트럼프는 그렇게 부하들이 자기 앞에서 싸우며 충성 경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거다.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권력 작동 방식이다.
하지만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그가 조직을 잘 운영하는 경영의 천재라고 믿는다. 헤이버먼 기자는 그런 이미지가 트럼프가 (대필 작가를 고용해) 쓴 책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 1987)'과 인기 리얼리티 TV 쇼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속 이미지가 만들어 낸 "유능한 관리자"라는 착시 현상이라고 말한다. 헤이버먼은 2012년 버락 오바마와 대선 경쟁을 벌였던 공화당 후보 밋 롬니(Mitt Romney)야 말로 진정으로 조직 운영에 익숙한 관리자/경영자 출신 정치인이고, 트럼프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업가라고 단언한다.
독재자는 관리자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하루만 독재를 하겠다"는 말을 해서 미국 국민을 경악시켰다. 지지자들은 농담에 불과하다고 의미를 축소했고, 반대편에서는 그동안 트럼프의 언행은 이미 독재자와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에릭 포즈너 교수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해도 독재자가 되기는 힘들다고 주장한다.
"우선 독재자가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영리하거나 최소한 교활해야 하고, 터프해야 하고, 대담해야 합니다. 트럼프는 그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아요. 그가 원하는 건 권력이고, 그걸 손에서 놓고 싶어 하지 않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작업을 진짜 독재자들이 하듯 교활하고 치밀하게 하지 않고, 대충대충 해버립니다."
포즈너 교수에 따르면 트럼프가 4년 동안 해놓은 일이 없는 이유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의회, 프로세스 등—을 사용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참모들이 남긴 회고록을 보면 트럼프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일 외는 집중력이 극히 떨어지고(=주의 집중 시간이 짧고), 주위에서 찬사를 늘어놓거나 설득하면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라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책을 추진할 기본적 자질이 부족하다.
이번 선거에서 큰 논쟁거리였던 정책집 '프로젝트 2025'의 경우를 보자. 보수 씽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에서 작성한 이 문서는 트럼프의 측근들이 대거 참여해서 만들었다. 거의 독재에 가까운 인권침해를 계획하고 있어 논란이 일었는데, 문제가 되자 트럼프는 자기와는 무관한 문서이며 자기는 읽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 길고 지루한 문서의 일부를 살펴본 포즈너 교수는 "트럼프가 그걸 읽었을 리 없다"며 웃는다. 그래도 보수 대법관을 임명한 것처럼 보수층에서 바라는 정책들이면 추진하지 않을까? 포즈너는 "트럼프는 남의 말을 듣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남이 건네준 문서를 충실히 이행하는 건 트럼프의 작동 방식이 아니라는 거다.
헤이버먼 기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일하기 싫어하는 트럼프가 '명목상의 수반(figurehead)' 역할에 만족할 수 있다는 추측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가 통치를 싫어한다는 것이 부하가 맡아서 정치를 하게 하고 자기를 뒷짐지고 있겠다는 걸 의미하지 않고, 무엇보다 트럼프는 뭔가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가령 멕시코 국경 장벽이나 FBI 본부 이전, 에어포스원 교체 같은—일에 직접 관여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항상 말하는 중요한 정책—예를 들어 이민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의회를 포함해서 워싱턴이 작동하는 방식을 알아야 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트럼프는 그걸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바마케어(Obamacare)'라고 알려진 부담적정보험법(Affordable Care Act, ACA) 개정 약속이다.
오바마케어를 폐지하고 더 좋은 법으로 바꾸겠다는 건 트럼프의 2016년 공약이었지만, 임기 4년 내내 개정안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심지어 지난 8월 카멀라 해리스와의 토론회에서 그 개정안은 마련되었느냐는 질문에 트럼프는 "개정안에 대한 아이디어는 있다"고 대답했다. 2015년부터 외쳐온 일인데 9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본안도 작성하지 않는 게 트럼프의 짧은 주의 집중력, 혹은 정책 추진 능력의 부재를 보여준다.
뉴욕이 낳은 인물
포즈너는 트럼프가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에서 데마고그(demagogue, 선동가)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데마고그는 국민을 갈라서 권력을 얻으려는 정치인입니다. 대개는 적(enemy)를 설정해서 여론을 가르죠. 데마고그가 지목하는 적은 외세일 수도 있고, 국내의 소수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포즈너는 현재 세계에서 전형적인 데마고그로 트럼프를 비롯해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를 꼽는다. (데마고그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러시아의 푸틴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서 데마고그는 흔히 상류층에 속하지만 권력을 가진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 중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트럼프와 닮았지만, 유사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데마고그들은 거버넌스(통치)에 재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데마고그를 좋아해서 그들을 선출했다. 거짓말을 하는 나쁜 사람인 걸 모르지 않지만, 다른 쪽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뉴요커인 고프닉과 헤이버먼은 트럼프를 오래된 뉴욕 문화가 낳은 전형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스테이튼 아일랜드 정도를 제외하면 뉴욕 유권자들은 트럼프를 싫어하지만 이들의 눈에 트럼프는 1970년대 뉴욕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몇몇 부류와 똑같다는 것이다. 가령 뉴욕의 대표적인 마피아 가문(갬비노 패밀리)의 보스 존 고티(John Gotti)와 뉴욕 양키즈의 전설적인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George Steinbrenner)의 말과 행동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트럼프를 구성하는 요소가 뭔지 분명하게 보인다.
스타인브레너는 항상 과장되고 요란한 언행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거침없이 직원을 해고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사 온 선수들을 조롱하는 모습까지 트럼프와 똑같았다. 무엇보다 즉흥적인 결정을 내려서 그가 이끄는 조직은 항상 혼란스러웠다. (그가 구단주가 된 후 첫 17년간 17번 감독을 교체했다.) 농담과 진지한 말을 구분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봐야 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권력을 과시했다는 것. 이런 조직 운영은 마피아 보스 존 고티 역시 똑같았고, 다큐멘터리를 보면 트럼프와 스타일까지 닮았다.
헤이버먼은 여기에 한 그룹을 추가한다. 1970년대 뉴욕 민주당의 "정당 보스(party boss)"다.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정치, 특히 대도시의 정치는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지역의 권력을 잡고 있던 이런 보스들이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공천권을 쥐고 있는 셈이어서 대통령 후보가 되려는 정치인은 이들을 만나 지지를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도시는 민주당의 아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민주당 정치는 이들의 손에 달려있었다. (지금은 트럼프를 탄생시켰다고 비판을 받는 당내 경선은 이런 보스가 쥐고 있던 결정 과정을 민주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뉴욕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며 성장한 트럼프는 이런 정당 보스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트럼프는 한 때 클린턴을 지지하는 민주당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서 정치를 배운 사람이라는 게 헤이버먼의 설명이다. 조직을 완전하게 장악해야 하고, 명령을 내리면 모두가 이행해야 하는 스몰볼(small ball) 조직 운영이 트럼프가 배운 정치였던 것이다.
이런 문화를 흡수해서 성장하고, 평생 같은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다가 이제 노인이 된 트럼프가 오늘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다른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국가 규모의 민주주의라는 거대 조직의 작동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새로 배우기에는 너무 늦었을 뿐 아니라, 배울 의지도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미국은 중요한 정책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매번 담당자를 교체하며 작고 시끄러운 이슈에만 매달리는 스몰볼 정치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걸 우리는 무능력이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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