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②
• 댓글 3개 보기뱀의 말에 따르면 그 흑암 속은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솔직했다. 뱀은 그때가 정말 좋았다고 했다. 흑암 속에서 뱀은 신에게 에덴의 정원을 어떻게 만들면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의 생각을 열심히 이야기했단다. 그런데 신이 고집을 부리며 도통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도, 논리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신에게 세상을 설탕으로 만들자고 했어. 벌에게 벌침을 주는 대신에 입술을 줘서 쏘는 대신 키스를 하게 하자고도 제안했지."
아담이 뱀의 생각에 항상 동의한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담은 뱀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뱀은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아담은 아주 특이한 기분에 빠졌다. 뱀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를 둘러싼 세상이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아담은 이브와 함께 있을 때도 가끔 뱀을 생각했다. 아담은 아무 말 없이 차갑게 앉아있는 이브를 보면서 뱀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얘기하면 뱀이 아담과 대화를 오래 하면서 점점 아담을 좋아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뱀은 아담과 이야기를 할수록 그가 더 싫어졌다. 뱀은 아담의 아내 이브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아담의 말에 따르면 이브는 아주 예쁘고 똑똑했다. 뱀은 종종 이브와 마주치게 되는 순간을 상상했다. 둘이 만나면 둘 사이에는 스파크가 일어날 게 분명했다. 뱀은 이브를 만나면 '아담이 네 다리가 길고 예쁘다는 말은 하지 않았네'라고 속삭이며 이브의 허벅지를 감쌀 생각이었다.
하지만 뱀은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몸에는 털이 하나도 없고, 윗니는 툭 튀어나오고, 10cm 정도의 굵기에, 말을 할 때는 이빨 사이로 발음이 샜다. 그에 비하면 아담은–비록 코코넛 덩어리 수준의 아이큐를 갖고 있다고 해도–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뱀은 그걸 인정할 수 없었고, 이브에 대한 상상에 빠졌다. 뱀은 이브에게 이렇게 말하는 상상을 했다. '때로는 네가 나를 지켜보는 걸 느껴. 리본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신선한 돼지 창자로 만든 리본. 나는 네가 나무 뒤에 숨어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아 고개를 돌리곤 하지. 하지만 그곳에는 고슴도치 한 마리가 나를 비웃고 있을 뿐.
사랑하는 이브, 내게로 와. 지혜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자.
이브가 세상에 나온 첫날,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신이 가르쳐준 그대로 전달했다. 그는 머리를 곧추 세우고, 마치 1940년대 라디오 뉴스 아나운서가 말하는 것처럼 엄격한 말투로 룰을 설명했다. 다른–이브보다 좀 더 부드러운–여자였다면 그렇게 말하는 아담이 멋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는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의 열매는 모두 먹어도 된다고 했다. 단, 지혜의 나무를 제외하고.
"나는 배가 좋더라고." 아담이 말했다. 신의 말을 잘 듣는 인간이 할 법한 말이었다. "지혜에 나무에 관해서 좀 더 얘기해 줘." 이브가 말했다. 이브는 "지혜의 나무"라는 말이 듣기 좋았다. 지혜의 나무. 참 시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아담의 대답은 간단했다.
"뭐, 별로 설명할 것도 없어.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죽는대."
그날 이후로 이브는 항상 지혜의 나무 얘기만 했다. 지혜의 나무가 어떻고 저떻고... 하루종일 지혜의 나무 타령이었다. 이브는 지혜의 나무를 마치 유명한 영화배우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나무 옆에 서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날도 있었다. 이브가 뱀을 만나게 된 날도 그렇게 지혜의 나무를 보고 있었다.
이브는 뱀을 처음 본 순간 놀라서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역겹게 생긴 동물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희한하게 생긴 부비새를 보고 토할 뻔한 적도 있고, 딩고를 보고 어떻게 저런 동물이 태어났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고, 수염벌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있었다. 그런데 뱀은 달랐다. 이브는 뱀을 본 순간, 세상에는 기름기가 상상했던 것보다 60~80% 정도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하고 뱀이 인사했다. "지혜의 열매를 맛볼 생각이 있어? 달고 맛있어." 그 말에 이브는 "그 나무에서 나는 열매는 먹으면 안 된다고 들었어. 먹으면 죽는대"라고 대답했다.
"죽는다고? 그런 무식한 말이 어딨어." 뱀은 한 쪽 입으로 풀을 씹으며 말했다. "천국에 탈출구가 있으면 그게 과연 천국일까?" 그 말을 들은 이브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뱀의 주장은 그럴듯했다.
그런 이브를 보면서 뱀은 자신의 계획대로 이브의 생각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말은, 그냥 한 입 먹어보라는 거야. 일단 먹어보면 세상의 많은 것들이 분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해. 그걸 내가 말로 하루 종일 설명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한번 먹어볼 권리는 있잖아, 안 그래? 하나를 다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조금 잘라서 씹어보라는 거야. 좀 씹는 걸 가지고 '먹었다'라고 하지는 않잖아?"
이브는 뱀의 조리 있는 말이 참 좋았다. 나무를 바라보니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아름다웠다. 이 모든 것들이 이브에게 과일의 맛을 보라고 권하는 듯했다. 그때 뱀이 말했다. "생각해 봐. 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과 있고 싶을까, 아니면 그저 말 잘 듣는 예스맨들과 같이 있고 싶을까? 아무리 신이라도 가끔은 깜짝 놀라게 해줄 사람을 원하지 않겠어?"
뱀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신이 저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한 이유가 네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한 게 아닌가 싶어. 신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그런 사람인지 알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저 과일을 맛보는 순간, 신은 더 이상 외로운 존재가 아닌 거야. 그러니 살짝 핥아보기라도 해." 이브는 과일을 보고, 고개를 돌려 뱀을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고 혀를 내밀었다. 이브의 혀는 젖어있었고, 따뜻했고, 망설였다.
이브는 혀끝으로 과일의 부드러운 표면을 훑었다. "봐, 아무도 안 죽었지?" 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이제 조금만 깨물어 봐. 아주 조금만.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봐." 그 과일은 말랑말랑했고 새콤했다. 이브는 과일을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느껴봤다. 이브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새로운 안경을 써보는 느낌이었고, 마약을 복용한 것처럼 살짝 뜨는 기분도 들었다. 허락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하게 된 깊고 젖은 키스처럼 아찔했다. 천 개의 작은 아기 발이 이브의 자궁벽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이브는 자신과 아담이 벌거벗은 것에 대해서도 예전에는 그냥 남녀가 같이 들어가는 핀란드의 건강용 찜질방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과일을 먹은 후에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카니발에 나체로 참가한 느낌이었다. 이브의 가슴은 마치 블루베리 잼과 작은 새들이 가득 들어간 물풍선처럼 느껴졌고, 젖꼭지는 불붙은 성냥꼭지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두 다리가 서로 스칠 때마다 마치 벨로아천을 가위로 자르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입술이 과즙이 아직 촉촉하게 남아있는 동안 이브는 아담에게 달려갔다. 뱀은 풀을 씹으면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저 멀리 사라지는 이브를 보면서 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지.'
"키스해 줘." 이브가 말했다. "내 입술을 맛봐." 멍청이들이 그렇듯, 아담도 지혜의 흔적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금단의 열매를 맛보는 일을 피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브는 한 번도 대낮에 아담에게 키스해달라고 달려온 적이 없었다. 아담은 이게 웬 떡이냐 생각했다. 아담은 이브를 두 팔로 안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브의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이브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후 아담과 이브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그들이 낳은 자식이 친동생을 죽이는 일도 끔찍한 일도 겪었다. 아담은 살면서 짧았던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종종 회상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그 시절 얘기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는 시도도 한두 번 해봤지만 길만 잃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돌아가려고 작정하고 열심히 찾은 건 아니다. 신을 더는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당신도 에덴 동산에 있어야 했는데 말이죠..."라고 말하곤 했다. 자기 같은 사람이 에덴동산을 경험했다는 건 공평하지 않은 듯 느껴졌다.
"오늘 저녁 노을도 나쁘지는 않네요." 아담은 해가 넘어가는 하늘을 보며 말하곤 했다. "하지만 에덴에서 보는 노을은 엄청났어요. 얼마나 붉게 타오르는지, 콧속의 털이 타고,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어요." 아담은 묘사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에덴동산의 과일들을 먹으면 신을 먹는 것 같았죠. 신은 아주 맛있었거든요. 과일을 먹고 싶으면 힘들게 딸 필요도 없이 손만 뻗으면 되었고요."
이제 아담은 과일을 먹을 때마다 뭔가 빠진 듯한 아쉬움을 떨칠 수 없다.
그렇다고 다 나쁜 건 아니었다. 에덴동산 이후로 이브는 아담에게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자기 때문에 함께 쫓겨나게 된 이후로 이브는 최선을 다해 아담을 사랑하기로 했다. 최소한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브는 애초에 신이 자신에게 뱀을 보낸 이유가 이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담이 자기 손주와 증손주, 고손주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랜 옛날에는 아름다운 동산에서 발가벗고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웩–"하는 소리를 낸다.
어린아이들은 마치 개미 떼처럼 우르르 집으로 몰려들어 오곤 했다. 그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아이들은 아담에게 달려와 셔츠를 들고 배꼽이 있는지 항상 확인한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매끈한 할아버지의 배를 만지면서 "할아버지 배꼽은 어디있 어?" 하고 묻는다. 아담은 그런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모두 그에게서 나온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아담의 배를 만지는 동안, 아담은 어린 시절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