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콘스탄스 우(Constance Wu)의 책 'Making a Scene'에 등장하는 한 대목으로, 배너티 페어에 게재된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여기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다.


타이(Ty)와 데이트하러 나갔을 때 나는 학교에서 인기 있는 아이들이 모인 테이블에 앉게 된 기분이었다. 타이는 36살이었고 진짜 뉴요커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딱 벌어진 그는 직접 보지 않아도 어깨에 주근깨가 있을 것 같은 피부를 갖고 있었다.

첫 데이트 때 타이는 멋졌다. 함께 건물에 들어갈 때는 문을 잡아주었고 테이블에 앉을 때는 나를 위해 의자를 빼 주었다. 우리는 의레 하는 가벼운 대화(small talk)를 생략하고 예술과 문화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타이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소설가를 꿈꾸고 있었다. 나 역시 예술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포부를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의 뻔한 삶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서로에게 멋진 인상을 남겼다. 대화를 하는 중에 그의 눈과 마주치면 열기가 밀려드는 듯했다. 그의 열기는 나를 압도했다.

(이미지 출처: DALL-E 2)

저녁 식사 후 우리는 길을 걷다가 키스를 나눴다. 그는 나를 택시에 태워줬고 그렇게 집으로 오는 동안 나는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는 내게 텍스트를 보냈고, 우리는 다음 데이트 계획을 세웠다.

두 번째 데이트 때는 그가 사는 아파트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에 그는 내게 줄 선물이 있다고 했다. 선물이 집에 있으니 잠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내 머리를 아주 살짝 스쳤지만 무시했다. 그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음흉한 구석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때 그 장소에 나와 함께 있었다면 내 생각에 동의했을 거다. 게다가 나는 친절한 초대에 내가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그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계단을 올라 그의 아파트에 갔다. 타이는 정말로 내게 줄 선물이 있었다. 갈색 종이와 비단 리본으로 아름답게 포장된 소파 쿠션 크기의 박스였다. 그는 아직 박스를 열지 말고 집에 돌아가서 열라고 했다. 따뜻한 태도였고 나는 고맙다며 그에게 키스를 했다.

그렇게 시작한 키스는 다음 단계로 진전되었다. 타이는 내가 입고 있던 겉옷을 몇 개 벗겼고 나는 그걸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 몸을 만지는 것도 허용했다. 그가 내 다리 사이에 손을 넣자 나는 부끄러워하며 손을 밀쳤다. 하지만 타이는 내가 흥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침대 옆 서랍에서 콘돔을 꺼냈다. 그리고 바지를 벗었고 콘돔을 착용했다. 섹스를 하겠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하지만 나는 섹스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 이런, 미안해. 너랑 섹스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

나는 이 말을 분명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싱긋 웃기만 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나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는 표정이었고, 내 성기가 젖어있다는 사실이 내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더 솔직한 나의 생각이라는 태도였다. 그는 부드럽게 내 위에 올라타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붙들었다. 그는 내 입술과 이마에 키스를 했고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의 행동은 참 부드러웠다. 나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반복해 말했다. "진짜로. 나는 섹스할 준비가 되지 않았어." 내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나를 마치 새끼 고양이 보듯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나를 꼭 안고 키스했다. 뒤이어 그는 부드럽게 내 다리를 벌렸고, 그러고 나서.. (내 의사와) 상관없이 해버렸다.

나는 싸우지 않았다. 나는 그냥... 포기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섹스가 이상적이고 로맨틱한 것으로 생각했다. 섹스는 의미가 있고, 특별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나는 (성관계 상대의) "숫자"를 적게 유지해야 했다. 모든 일에 쿨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이려 애쓰던 내 뉴욕 생활 초기에 심각한 감정이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쿨한 여자가 되고 싶다. 쿨한 여자는 요란을 떨지 않는다.

게다가... 타이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내 말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그가 부드럽게 행동했지만 내가 반항했으면 그가 화를 내거나 폭력을 사용할 위험이 존재했다. 내가 나보다 덩치가 두 배나 되고 나이는 10년이나 위인 사람과 정말로 싸울 수 있을까? 그것도 그의 아파트에서? 그게 아니라 그냥 내게 화를 낸다면? 나보고 미쳤다고 하면? 소리 내어 웃으면서 "진정해. 너랑 하고 싶지도 않았어. 네가 그렇게 핫한 애줄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타이는 쿨한 남자가 되는 거고, 나는 자기가 핫한 줄 아는 주제를 모르는 여자애가 되는 거였다. 상상만 해도 벌써 창피스러웠다. 내 몸이, 내 흥분이, 그가 무시한 나의 호소가 창피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비록 그 방 안에는 그와 나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란을 일으키고 (make a scene, 소란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쳐다보게 되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콘돔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나를 수치스럽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내가 빠르게 오르가즘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누군가와 처음으로 성관계를 하면서 그렇게 빠르게 오르가즘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싫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내가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는 끝냈고, 다시 내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나를 꼭 껴안았다. 나를 안고 내 귀를 만졌다. 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 애썼다. 그리고 내 공포와 불편함을 감추기 위해 키득거렸다. 그는 내가 그날 밤을 그의 집에서 머물기 원했지만 나는 매일 밤 하는 스킨케어를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충 둘러댔다. 그리고 "미안해"라는 말을 백만 번쯤 했다.  

그는 내가 옷을 입는 걸 도와줬고 선물이 든 상자를 건네줬다. 내게 키스를 하면서 빨리 또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상자를 받아 들고 그에게 키스를 했다. 나는 "고마워"라고 말했다.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상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무력이 사용되지 않아서 그랬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 일 이후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공격을 받았다거나 폭행을 당했다거나, 강압을 받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I certainly didn’t feel raped). 나는 단지 그가 내 말을 듣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미지 출처: DALL-E 2)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돌아온 나는 선물 상자를 열지 않고 식탁에 놔둔 채 침대에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룸메이트가 저 상자는 뭐냐고 물었다. 나는 "아, 저걸 받은 걸 깜빡 잊었네"라고 말하며 친구와 함께 상자를 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긴장할 필요 없다. 잘린 사람의 머리나 딜도(dildo, 남근 모양의 성인용품) 같은 게 들어있지는 않았으니까. 상자는 장미꽃잎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꽃잎 속에 20페이지 짜리 원고가 있었다. 그가 쓴 단편소설이었다. 제목은 "The Beating Heart of the Forest(숲의 뛰는 심장)"이었다. 원고는 방금 인쇄한 듯한 냄새가 났다. 금색의 비단 끈으로 정성껏 묶여 있었다. 나는 끈을 풀고 첫 페이지를 읽었다. "아비안델라의 보랏빛 언덕을 넘어 비옥한 계곡의 안개를 지나 어두운 마법의 숲 깊숙이 들어가면... 그곳에서 발견할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를 발견할 것이다. 아름다운 공주 전사(Princess Warrior) 콘스탄스 우."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는 데이트 두 번 만에 내게 내가 주인공인 20페이지짜리 중세 판타지 단편 소설을 선물한 거다.

딱 한 번의 데이트 후에 이 판타지를 쓴 거다.  

그 원고 아래, 장미꽃잎 속에는 섬세하게 세공한 보석상자(pewter box)가 하나 숨어 있었다. 그 안에는 진주 귀걸이 한쌍이 들어있었다.

나는 내 룸메이트를 쳐다봤다. 이건 뭐하자는 거지...?! 나는 "이 귀걸이는 그 인간의 불알을 상징하는 건가?"하고 농담을 했고 우리는 함께 깔깔 웃었다. 그 웃음은 내게 일종의 위안이 되었다. 뭐라도 느낄 수 있는 건 좋았다.

"혹시 그 남자랑 잤어?" 룸메이트가 물었다.

"오 마이 갓, 노!" 나는 거짓말을 했다.

"미친놈이지!!!" 우리 둘이 함께 말했다. 그를 미쳤다고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일종의 파워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자 나의 거짓말은 사실이 되었다. 그날 밤의 내러티브는 섹스가 아닌 공주 전사 스토리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그날 이후 몇 주 동안 내게 텍스트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텍스트를 룸메이트에게 보여주며 신나게 웃었다.

나는 그의 단편소설을 내 파일함에 넣어두고 친구들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꺼내어 보여줬다. 나는 집에 물건을 많이 보관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그 원고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나 스스로에게는 그 원고가 너무나 어처구니없기 때문에 보관하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삶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모이면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멈추게 되었다.

나는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잊었다.  


반항하지 않은 여자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