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위한 변론
• 댓글 33개 보기내가 김원영 작가의 이름을 처음 본 건 페이스북의 알고리듬 덕분이었다. 내 지인 중에 장애인 접근성과 관련한 일을 하시는 몇 분이 계셨고, 그들과 페북에서 가깝다는 걸 안 페이스북이 내게 그의 포스팅을 보여주었고, 그렇게 몇 번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르다가 어느덧 페친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관심이 갔던 이유는 장애인 접근성 운동과는 거리가 좀 있다. 그가 무대에서 춤을 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책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의 저자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이보그가 되다'와 같은 책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나는 그의 다른 책들을 읽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접한 건 그가 장애인이자 변호사라는 사실과 아주 멋진 그의 무대 사진들뿐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박자 감각과 안무 암기 능력이 남들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게 있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모습, 재능과 오랜 연습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펜이나 붓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모습을 볼 때 감탄하게 되는 것처럼,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정확하게 써서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자세를 볼 때, 그리고 그걸 연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그들의 몸을 볼 때 감탄이 나온다.
하지만 김원영 작가에 대한 나의 관심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가 추는 '춤'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 나는 장애인으로서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왜냐하면 나는 오래 전부터 공옥진의 '병신춤'과 그 춤을 예술로 받아주는 한국 문화에 큰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오래된 풍습이 모두 전통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네덜란드에서 백인들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 흉내를 내는 즈바르터 핏(Zwarte Piet, 검은 피트) 축제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용인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공옥진의 춤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될 수는 없다는 게 예전부터 변함없는 나의 생각이다.
그런 내게 김원영의 춤은 충격이었다. 공옥진은 장애인 흉내를 내는 춤을 추지만, 김원영의 춤은 장애인이 추는 춤이기 때문이다. 그 춤을 보는 나(관객)는 그걸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춤을 추는 그(춤꾼)는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 그의 춤은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인식의 확장일까? 그는 공옥진의 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를 만나면 이런 질문들을 모두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만날 기회도 없었지만, 만나자마자 초면에 그걸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 나온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은 내가 묻고 싶었던 그 질문들에 대해 모두 답해주는 책이다.
저자 김원영은 사람들이 "공옥진의 '병신춤'이 억압을 벗어나 다 같이 신명에 이르고 해방과 화합의 장을 만들기 때문에 장애를 그저 조롱하는 춤은 아니"라고 해도, "병신춤 안에 '병신'의 존재가 없다면" 그들의 좋은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의 병신춤 역사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없다면—공옥진도 비장애인이다—그 춤은 비장애인이 장애인 흉내를 내고, 그걸 다른 비장애인 관객이 보고 즐기는 유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장애인인 저자가 추는 춤은 비장애인이 편견이나 비하 없이 즐길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춤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이 책은 그 얘기를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 영국에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여주인공 줄리엣을 흑인 여배우가 연기하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 결정에 분노한 사람들이 많았다.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많았지만, 줄리엣은 이탈리아 여성인데 왜 흑인을 쓰느냐는 주장도 있었고 (하지만 이들은 로미오 역을 영국인인 톰 홀랜드가 하는 데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내 불만은 여배우가 흑인이라는 게 아니라, 예쁘지 않다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마지막 주장은 꽤 흥미롭고, 쉽게 무시하기 힘들다. 대개 남성인 이들은 영화를 보며 줄리엣과 사랑에 빠지고 싶은데 여배우의 얼굴이 자기의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싫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한 답은 "당신이 싫으면 안 보면 된다"이다. 1997년,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했을 때 사람들은 "뚱뚱하고 예쁘지도 않은" 무명의 여배우가 여주인공을 맡았다고 말이 많았지만, 그 영화는 기록적인 수익을 올렸고, 케이트 윈슬릿은 엄청난 팬덤을 거느린 스타가 되었다. 제작자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관객은 지갑으로 답한다.
하지만 공연자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저자 김원영은 그 문제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다음은, 공연자와 관객에게 달렸다. 어떤 배우/무용수의 몸이 보기 불편하다면, 어떤 몸으로 무대에 설 자신이 도무지 없다면, 그것은 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당신과 내 몸이 '합법적'으로 무대에 오를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당신이나 내가 스스로 춤을 추는 일이 '정당하다'고 믿는 건 다른 문제다. 당신은(나는) 무슨 자격으로 그 무대에 있는가?" 저자는 춤이 좋아 춤을 추면서도,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무대에 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서 추는 것과 달리, 무대에 설 때는 관객이 돈과 시간을 들여서 볼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 문제를 절대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아니, 이 책의 많은 부분이 결국 이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차별과 평등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겠(고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이 책은 춤의 역사, 특히 현대 무용의 역사를 꽤 꼼꼼하게 이야기한다. 단순히 저자가 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현대 무용이 발전하는 역사에 "장애가 있는 몸들이 진입"한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기존의 전통적인 안무에 저항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춤이 나오기 위해서는 '다른 몸들'이 입력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쉬운 설명은 아니지만, 열심히 따라가다 보면 현대 무용의 역사에 관해 몰랐던 많은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나저나 저자는 왜 춤을 선택했을까? 나는 내 주위에 춤을 좋아하는—장르도 한국 전통무용, 스윙(swing) 댄스, 폴(pole)까지 다양하다—지인들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자기 직업과 무관하게 순전히 춤이 좋아서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저자 김원영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춤의 강한 매력에 끌렸을 거다. 하지만 그는—적어도 춤을 추기 전까지는—자기의 몸이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아주 민감했던 사람이다. 자기 몸을 살피는 외부의 시선을 피하려는 마음과 멋진 춤으로 남들 앞에 나서고 싶은 마음은 마치 '수줍음이 많은 외향적인 사람'처럼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신체적 장애와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부의 시선이다. 공연하는 저자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관객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는 전혀 다른 얘기다. 책 전체에 걸쳐 고민하지만, 특히 3장 '시선의 안과 밖'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 문제는 '프릭쇼(freak show)'와 '장애 무용' 사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요약된다. 장애인이 오랜 훈련과 연습을 통해 아름다운 무용을 선보이는데 관객이 (과거에 장애인을 구경거리로 만든 서커스에서와 같이) 그저 신기한 볼거리로 생각하고 보고 있다면 어떨까?
저자는 프릭쇼와 장애 무용을 가르는 명확한 선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한계'로 인식하지 않는다. "달리 본다면, 모든 소수자의 춤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 자체로 기예(art)의 본질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포획하고 매매하고 조롱하고 착취하고 혐오하고 동정하고 욕망하는 '시선' 앞에서 기묘하고 창조적으로 예상치 못한 어떤 순간을 만들어낼 때, 즉 도저히 포획, 매매, 조롱, 착취, 혐호, 동정, 욕망 할 수만은 없는 어떤 몸으로서 그것이 발견될 때, 우리 모두는 이전까지 상상한 적 없는 세상을 향한 문을 연다." 저자는 장애가 넘어서기 힘든 사회적 인식을 예술로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장애에서 출발하고, 장애를 이야기하지만 궁극의 예술 서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동시에 아주, 아주 개인적인 고백이다. 저자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평등하다고 믿으면서도 비장애인의 신체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그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민첩하고, 효과적이고, 생산적"으로 보였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자기의 다리가 남들보다 짧고 가는 것을 가리기 위해 종이 폴더를 말아 감싸고, 큰 바지를 입고, 엉덩이 밑에 두꺼운 책을 깔고 앉았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 사이에 있던 나의 비장애인 친구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그랬던 그가 휠체어에서 내려와 기어서 무대를 가로지르는 행위를 '용기'라 부르기에는 용기라는 단어가 너무 작게 느껴진다.
"몸을 온전히 드러내고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춤을 추기로 한 것은, 말하자면 정면승부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춤을 춘다는 건 인권, 평등, 교양, 문화 등의 이름으로 구조화된 삶의 밑바닥을 가장 노골적으로 들춰내는 것이다. 나는 장애를 주제로 삼아 (지금처럼) 꽤 그럴듯한 글을 쓰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강의를 할 수도 있다. (...) 춤을 춘다면 장애를 숨기거나 가릴 방법이 없다. 파멸의 위험을 감수하고 삶의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고 믿었고, 두려웠다."
그리고 그 결과, 관객은 그가 드러내는 장애—공옥진과 같은 비장애인이 흉내 낸 장애가 아닌, 실재하는 신체에 깃든 장애—를 목격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의 신체를 이해하게 되고, 그들에게 익숙해진다. 저자의 말처럼 "장애인의 신체는 공공장소 어디에서나 크고 작은 소란의 진원지"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 낯설고 어색함을 줄여줄 거라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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