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을 숨기는 방법 ②
• 댓글 2개 보기아래의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미국은 독립 이후로 꾸준히 영토를 확장해 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지금은 "미국 본토"라고 불리는—북아메리카의 서로 연결된(contiguous) 땅덩어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19세기 미국은 영토 뿐 아니라, 인구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은 식량도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삼포제(three-field system) 농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매년 같은 땅에서 작물을 재배할 경우 영양분의 부족으로 산출물이 줄어들기 때문에 3년에 한 번은 밭을 쉬게 해야 한다. 1800년대 미국의 농업이 그 문제를 겪고 있었다. 지금은 화학적으로 제조된 질소 비료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그 방법이 발명되기 전에는 많은 나라가 이를 분뇨로 해결했다. 물론 이는 더럽고, (기생충 등의 문제로) 건강에 해로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식량을 대량 생산하기에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 고민을 하던 미국이 기발한 비료의 원천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구아노(guano)라는 물질이다.
구아노는 강우량이 적은 건조한 지역에서 새들의 배설물이 퇴적, 응고되어 화석화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 주변은 물론이고, 카리브해와 태평양 곳곳에는 수많은 새가 머무는 무인도가 많이 흩어져 있는데, 수백, 수천 년 동안 새들이 머무르며 쌓인 새똥이 지표면을 하얗게 덮고 있다. 사람이나 짐승의 배설물이나 새의 배설물이나 똑같이 질소 성분을 많이 품고 있기 때문에, 돌처럼 굳은 이걸 채굴해서 밭에 뿌리면 그야말로 천연 비료가 되어 작물 생산을 크게 늘릴 수 있다. 19세기 미국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새들이 많이 모여 사는 태평양 무인도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다.
하지만 구아노가 많이 퇴적된 곳들이 무인도인 이유가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그늘이 될 만한 나무도 없으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들이다. 그런 곳에서 돌처럼 딱딱한 구아노를 캐내는 일은 보통 고역이 아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구아노를 캘 때 퍼지는 먼지로 폐병에 걸렸고, 소화기에도 문제가 생겨 몸을 상하게 된다. 항상 그랬듯, 미국의 백인들은 흑인을 보내서 문제를 해결했다.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1861~65)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북부에는 이미 자유롭게 사는 흑인들이 있었다. 구아노를 캐내려는 백인들은 이들 흑인을 속여 무인도로 보냈다. 현대 한국에서 종종 불거졌던 섬 노예 사건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겠지만, 교육받지 않은 흑인들을 거짓말로 꾀어 섬에 떨구고, 거기까지 가는 비용을 갚아야 나갈 수 있다는 식으로 이들을 위협해 사실상의 강제, 노예 노동을 시켰다.
그렇게 인권 유린이 일어나던 카리브해의 작은 섬, 나바사(Navass)에서 1889년 흑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백인 감독관 다섯 명을 살해한 혐의로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런데 19세기에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 사건은 미국의 대외 정책을 바꾸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살인을 저지르는 흑인들이 변호사를 통해 미국법의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나바사섬에서 일하던 흑인과 백인 감독관들은 모두 미국인이었지만, 그 섬은 미국 연방이 아니었다. 미국의 땅이 아닌 곳에서 일어난 일에 미국법을 적용할 수 있느냐는 건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었고, 이 사건은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논쟁의 핵심에는 "미국 헌법에 의거, 미국의 영토가 바다 너머로(overseas) 확장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바다 밖의 영토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은 미국이 구아노를 채취하기 위해 들어간 섬들은 미국 영토라고 판결했다. 이는 달리 말해, "미국은 바다 밖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바사섬이 미국 영토라면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도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에 폭동을 일으킨 흑인들은 사형을 면했지만, 종신 노동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연방대법원 판결에 고무된 미국은 본격적인 해외 영토 확장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미국의 가장 큰 해외 영토 확장은 1898년에 일어난다. 바로 미국-스페인 전쟁이다. 카리브해의 섬 쿠바를 두고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으로 미국이 필리핀을 손에 넣은 것이다. 미국 남쪽에서 생긴 일로 태평양 너머의 필리핀을 갖게 된 건 조금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우선 필리핀은 1571년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필리핀이라는 이름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898년 당시 국방부 해군담당 차관보였던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 1901년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가 장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미국 태평양 함대에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스페인 영토인)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려버린 것이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고, 미 해군은 마닐라를 공격한다.
루즈벨트 본인은 차관보에서 사퇴하고는 민병대를 조직해 쿠바로 건너가 스페인군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게 된다. 이런 저돌적인 성격의 루즈벨트는 뒤이어 뉴욕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임기 2년을 채우지 않은 채 연방 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대통령(윌리엄 매킨리, William McKinley)이 암살되는 일이 벌어져 그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다. 미국의 해외 영토 확장은 루즈벨트의 성격과 관련이 깊다.
미국과의 전쟁에 패한 스페인은 1898년 파리조약을 통해 2,000만 달러를 받고 필리핀을 양도했다. 하지만, 미국은 필리핀을 쉽게 손에 넣은 게 아니다. 애초에 미국은—20세기에도 자주 그랬던 것처럼—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필리핀의 저항군과 연합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 제도에서 스페인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한 미국이 스페인에 돈을 주고 필리핀을 손에 넣으려 하자 분노한 필리핀 사람들은 미국에 맞서 싸우게 된다. 이게 미국-스페인 전쟁 직후에 일어난 필리핀-미국 전쟁(1899~1902)이다. 미국은 이 떳떳하지 않은 역사를 감추려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세하게 역사책에서 언급하지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식민 통치에 반대해 저항하는 필리핀 사람을 무려 60만 명이나 잔혹하게 학살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이 벌인 일은 서구의 제국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외 식민지 개척은 미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나라일 뿐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열강과 다른 공화국(republic)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식민 통치를 거부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모순을 미국은 어떻게 설명했을까?
여기에—우리에게는 '정글북'으로 유명한—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이 등장한다. 그는 1899년에 발표한 유명한 시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 원문과 번역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을 통해 미개한 인종, 즉 비백인을 교화시키는 것이 백인이 져야 할 의무(=짐)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이 시를 쓴 목적이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해서 "반은 악마이고 반은 어린애"이 필리핀 사람들을 지배, 교화하라고 부추기기 위함이었다. 키플링은 이 시가 출간되기 전에 루즈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정치인들에게 먼저 보내어 읽게 했다.
결국 미국은 영국, 프랑스와 다를 바 없는 식민제국이 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은 식민주의자 키플링의 그럴듯한 시로 달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만약 필리핀이 미국의 영토라면, 필리핀 사람들은 미국의 국민이어야 했다. 그런데 국민이 되는 순간 그들은 투표권을 갖게 된다. 쉽게 말하면, 미국령 필리핀 사람들이 미국의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인 미국은 그건 절대로 허용할 수 없었다. 여기에 미국의 갈등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필리핀 제도를 손에 넣었음에도 자국민에게 "필리핀은 미국의 영토"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많은 미국인이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한 날짜(1941년 12월 7일)를 똑똑하게 기억하면서도, 같은 날 일본이 미국령인 괌(Guam)과 필리핀을 동시에 공격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미국이 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이를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 기원은 진주만 공격 직후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먼 조카)이 했던 유명한 연설문에 있다.
마지막 편, '제국을 숨기는 방법 ③'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