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에 시작해서 10년 넘게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성인 애니메이션 '킹 오브 더 힐(King of the Hill)'는 텍사스주의 한 도시에 사는 가족을 중심으로 이웃,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일종의 시트콤이다. 배경이 텍사스이다 보니—미국 대중 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은 아닌—미국 남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품인데, 그중 한 에피소드에서 이 가족이 같은 남부이지만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Phoenix)를 방문한다.

우리 생각에는 텍사스주나 애리조나주나 비슷한 위도에 있어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한여름 대구 기온과 경주 기온이 다르듯, 도시마다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극 중에서 가족이 피닉스를 방문했을 때 기온이 화씨 111도(약 44℃도)였다. 이 온도는 텍사스 주민에게도—적어도 20년 전에는—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에어컨이 켜진 차 안에서 바깥 온도를 확인한 아이가 '설마...'하다가 밖으로 나가서 111도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 "태양 표면에 서 있는 것 같다"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엄마가 한마디 한다.

"이건 존재해서는 안 될 도시야. 피닉스는 인간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기념비다(It is a monument to man's arrogance)."

텍사스 사람들이 애리조나를 놀리는 듯한 말이기도 하지만, 뜨겁기로 유명한 미국 남부의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이렇게 뜨거운 곳에 정착해서 도시를 만든 건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있다는 오만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그런 지역에서 한여름에 전기 공급이 중단되어 에어컨이 작동을 멈추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위험한 지역에 많이 모여 사는 것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빠르게 일어나는 기후 변화는 그런 믿음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는 위의 영상 속 아이처럼 '설마 그렇게 뜨겁겠어?' '설마 그렇게 위험하겠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정말로 그렇게 뜨겁고, 그렇게 위험한 환경에 들어와 버린 거다.

새로 나온 책 '폭염 살인'의 제목을 보면 너무 선정적인 번역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원제는 더 충격적이다. 'The Heat Will Kill You First: Life and Death on a Scorched Planet(더위는 당신부터 죽일 것이다: 타버린 행성에서의 삶과 죽음).' 책을 읽어 보면 이 제목에 과장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후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선진국에 사는 내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그거고, 우리가 노력하면 지구의 기온을 떨어뜨리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그거다. '폭염 살인'은 그 믿음에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서도 가장 부유한 캘리포니아에서 경치 좋은 숲 한 가운데 집을 짓고 살 만큼 풍요로운 삶을 살던 한 가족의 참변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편은 영국에서 태어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실리콘밸리 구글에 입사한 사람이었고, 아내는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서 태어나 자라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인도의 한 도시에서 에어컨 없이 사는 빈민들(이 책에는 이들의 이야기도 나온다)과는 사회적인 대척점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들이 어린아이와 반려견을 데리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하이킹을 나섰다가 생각하지 못한 열기에 쓰러져 모두 사망한 것이다.

기후와 환경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해 온 전문 기자인 저자 제프 구델(Jeff Goodell)이 '폭염 살인'에서 그 가족의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는 이유는 "당신은 열기(heat)가 당신의 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구델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기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혹은 알기는 했어도 그게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가족이 하이킹을 했던 때보다 훨씬 낮은 기온(32.2℃도)에서 하이킹을 하다가 몸에 이상이 생기는 걸 체험하고서야 이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다.


구델은 열기에 대한 이해—정확하게는 우리의 무지—를 이야기한 후 세계 곳곳에서 인류가 처한 위험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허리케인과 식량 위기처럼 인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도 있지만, 바다와 같은 환경에 대한 위협도 있다. 가령 우리는 폭염과 그 피해에 대해서는 항상 뉴스로 전해 듣지만, 바다의 수온 증가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한다. 책에서 인용하는 해양학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생태계 전체의 붕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단지 그 일이 바다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평소보다 수온이 6℃도 상승한 건 “바닷속의 산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다의 동물상과 식물군이 불에 탄 것처럼 그대로 죽어 나갔으니까요.”

'폭염 살인'은 우리가 몰랐던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는 동시에, 우리가 알거나 짐작하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들도 지적한다. 가령 2022년, 중동 국가 카타르에서 열린 월드컵 축구 경기를 생각해 보자. 2010년에 카타르가 개최지로 선정되었을 때 사람들은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게 더운 곳에서 경기가 가능할까? 경기 자체는 가장 덜 더운 11월, 12월에 한다고 해도 많은 경기장과 관련 시설의 공사는 일 년 내내 진행되어야 할 텐데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아야 할까? 이런 걱정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중동의 산유국에서는 뜨거운 야외 공사 같은 일은 해외 노동자들을 데려다 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그렇게 중동을 찾아온 노동자들은 사실상의 노예 노동을 하며 살기 때문이다.

카타르의 월드컵 경기장 건설에 투입된 해외 노동자의 모습 (이미지 출처: Pulitzer Center)

하지만 월드컵 조직위는 카타르에 개최권을 주었고, 카타르는 우려대로 해외 노동자들을 들여와 한여름 기온이 45℃도까지 치솟는 바깥에서 공사를 강행했다. 그리고 우려대로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 공식적인 발표로는 "수백 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탐사 취재한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는 수천 명의 해외 노동자들이 죽었다고 한다. 물론 카타르 정부에서는 이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밝히지도, 조사하지도 않는다. 부유한 선진국 사람들로 가득한 월드컵 조직위에서 여기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 같지도 않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에서 온 노동자 수천 명의 죽음은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12년 만에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한 쾌거를 즐거워하는 자리에서 분위기를 깨는 뉴스일 뿐이다. 하지만 카타르의 공사장에서 죽어간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한국인들이라면 우리는 카타르 월드컵을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을까?

이건 이중의 비극이다. 하나는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을 돕기 위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죽어가는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외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고, '폭염 살인'은 그 착각을 깨우쳐 주는 책이다.

좋은 책이 나온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쓴 이 책의 추천사에서도 말했지만, 불행하게도 이 책이 전달하는 건 더 이상 '경고'가 아니다. '살아남는 법'이다. 🦦


'폭염 살인'을 출간한 웅진 지식하우스에서 오터레터 구독자 여러분께 10권을 선물하시기로 했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로 의사를 알려주세요. 제가 수요일 오전에 추첨해서 발표하겠습니다. 이메일을 꼭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