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 혹은 미디어를 하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특이하게도 건설사들이 매체를 가지고 싶어 한다. (2019년에 기자협회보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역신문사 17곳 중 7곳, 지역방송 11곳 중 5곳의 대주주가 건설사라고 한다). 건설업의 특성상 각종 특혜나 비리 등의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기 때문에 일종의 안전판을 마련하고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편리하다는 계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통신사(흔히 텔코telco라고 부른다)들이 그렇게 미디어 회사를 가지고 싶어 한다. 전화회사는 아니지만 케이블 네트워크로 성장한 통신기업인 컴캐스트가 2009년 말, NBC 유니버설을 인수하면서 다른 통신기업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5년 후 이번에는 미국 1위의 통신사였던 버라이즌이 AOL과 야후를 차례로 인수하면서 미디어 기업으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만 보던 전통의 통신기업 AT&T는 2016년 말, 뒤늦게 미디어 인수에 뛰어들어 (현재는 워너미디어로 불리는) 타임워너를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그해 말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였다. 트럼프는 "거대기업의 독점을 용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사실은 (HBO와 함께 타임워너 그룹의 소유인) CNN이 포함된 딜이 싫었던 거다. 트럼프는 임기 내내 CNN을 뉴욕타임즈 이상으로 싫어했고, CNN 역시 트럼프의 실책과 비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AT&T는 법정 싸움까지 간 끝에 인수에 성공한다.

다른 한 문제는 인수자금이었다. AT&T의 타임워너 인수는 실리콘밸리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돈이 넘치는 빅테크가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것과는 달랐다. AT&T가 빅테크 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타임워너가 스타트업 처럼 몇십 억 달러에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려 850억 달러를 주고 사야 했기 때문에 결국 큰 빚을 지게 된다. 그 인수 이후로 AT&T는 비금융권 기업으로는 부채가 가장 많은 기업이 되어 "기업부채의 왕"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주주 자본주의의 작동방식

그렇다면 AT&T는 왜 이런 무리한 인수를 추진했을까? 흔히 '주주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영미권 자본주의의 작동방식 때문이다. 그냥 알차게 이윤을 내기보다 계속해서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기업의 가치를 높이고, 그를 통해서 주주들에게 보상해주어야 하는 시스템에서 AT&T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AT&T는 미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거대 통신사였지만, 스마트폰으로 인한 성장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시장에서 그만큼 돈을 잘 벌면 그만일 것 같지만 끊임없이 커지지 않으면 주식의 가치를 높일 수 없고, 그건 주주 자본주의에서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문제는 통신시장이라는 것이 국가별로 나뉘어 운영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한국의 SKT, KT처럼) 각 나라에서 대형 텔코들이 시장을 나눠 갖고 있다는 것. 따라서 해외로 진출해서 돈을 벌겠다는 게 불가능한 업종이다.

그런데 2010년대에 가장 핫하게 떠오른 산업이 있었다. 바로 스트리밍을 위시한 미디어 산업이다. 넷플릭스 같은 기업들은 전 세계에 확장된 초고속 인터넷을 기반으로 완전히 새롭게 시장을 재편하면서 세계로, 세계로 나가며 월스트리트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AT&T가 당장 스마트폰을 만들 거나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나마 시장을 좀 안다고 할 만한 새로운 업종은 미디어였던 거다. 게다가 경쟁자인 버라이즌, 컴캐스트가 모두 통신기업으로 시작해서 번듯한 미디어 기업이 되었으니 우리도 못할 게 있냐는 생각이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당장 버라이즌부터 미디어를 인수한 것을 후회하며 미디어 자산을 차례로 팔아치우는 중이다. 작년 말에 허프포스트를 팔기로 했고, 이번 달에 들어서는 야후와 AOL을 사모펀드에 넘긴다고 밝혔다. 통신기업은 결국 망을 관리하는 기술기업일 뿐 콘텐츠를 모른다. 따라서 미디어 기업을 인수해서 운영하려면 그 기업을 이끌던 경영진, 핵심 인재들이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하지만 트럼프 정권의 반대로 반독점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타임워너를 인수한 것도, 하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로 무려 20개월을 낭비하게 되었다. (법적으로 경영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에 타임워너의 미디어 인재들이 회사를 떠났고, 2018년에 인수가 끝나자 문제가 시작된 거다.

Happily Never After

AT&T는 결국 힘겹게 인수한 미디어 자산("워너미디어")을 3년 만에 떼어내서 (케이블 채널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디스커버리와 합병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돈으로 빚을 갚고 앞으로는 본업인 통신망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와 워너미디어는 각각 '디스커버리 플러스'와 'HBO 맥스'라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갖고 있지만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 서비스라는 고래들 사이에서 쉽지 않은 싸움을 하는 중이다. 따라서 외형상으로는 이 둘의 결합은 HBO 콘텐츠와 워너브라더스의 콘텐츠에 디스커버리가 가진 푸드네트워크, HGTV, 트래블 채널 등 전형적인 케이블 채널들을 합치는 빅딜로 보인다. 여기에는 워너미디어의 CNN, 카툰네트워크, TNT, TMZ, 씨네맥스, 어덜트스윔 같은 케이블 채널까지 포함되니 사실상 케이블 채널의 종합판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합친 거대한 하나의 스트리밍이 나올지 아니면, 따로 운영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워낙 미디어 시장이 격변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제 그 미디어가 어떻게 살아갈지는 AT&T의 고민이 아니다. 통신사 1, 2위인 AT&T와 버라이즌이 미디어에 홀려서 정신을 딴 데 두고 있는 동안 멀리 떨어진 3위였던 T-모빌이 빠르게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T-모빌도 작년에 대형 인수합병을 했지만, 그 상대는 같은 통신기업인 스프린트였다. 수평(같은 업종)적 합병이었기 때문에 독점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았지만, 허가가 난 후에는 한 회사가 되는 데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AT&T의 미디어 자산 매각을 두고 "AT&T의 헐리우드 엔딩이 결국 수 십억 달러의 가치를 날려버렸다"고 했다. 통신사와 미디어 기업의 결혼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해피엔딩처럼 보였지만 한 번도 행복한 순간이 없었던 짧은 결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