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행 비행기 ①
• 댓글 2개 보기작년 말, 한국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외국 기관과 언론에서는 그 사태를 '헌법적 위기(constitutional crisis)'라는 말로 표현했다. 무섭게 들리지만 다소 생소한 이 표현은 합의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지만, 대략 "헌법이 규정한 기관이 붕괴하거나, 그런 기관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상황"을 의미한다. 계엄령이라는 것 자체는 헌법적 위기가 아닐 수 있지만, 윤 대통령이 한 것처럼 국회가 계엄령을 해제하는 것을 군을 동원해서 막으려 했던 시도는 헌법적 위기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헌법이 보장한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뉴스였지만, 그 소식을 전하는 나라들 중에서 미국만큼은 한국의 소식을 단순히 강 건너 불구경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트럼프가 당선된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고, 미국인들은 온라인에서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이야기하며 "트럼프가 취임하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라며 걱정했다. 미국에서는 기술적인 이유로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건 쉽지 않지만, 특정 대도시를 중심으로 국지적인 계엄령은 선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트럼프의 2차 집권 후 계획('프로젝트 2025')을 살펴본 사람들은 계엄령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헌법적 위기를 걱정하고 이를 경고했다. 왜냐하면 트럼프가 취임 후에 하겠다는 일들 중에는 삼권분립이 지켜지는 한 불가능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상하원을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법원이 법과 제도에 어긋나는 시도를 순순히 허용할 리 없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트럼프는 의회에서 법을 만들어 정책을 시행하는 대신 행정명령(executive order)을 사용할 것이었고, 현행법이 허용하지 않는 일을 대통령이 명령해서 행정부가 실행할 경우, ACLU 같은 단체에서 피해자를 대표해서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할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판사가 트럼프의 행정명령을 막을 경우 트럼프가 그 말을 들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게 미국에서 우려하던 헌법적 위기다.
그리고 그 우려는 지난 주말을 지나며 현실이 되었다. 멕시코 국경에서 멀지 않은 텍사스주 최남단의 할린젠(Harlingen) 공항을 출발한 세 편의 전세기를 둘러싼 트럼프 행정부와 워싱턴 DC 연방법원 판사 사이에 벌어진 날 선 대결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성격과 의도를 잘 보여줬을 뿐 아니라, 미국의 앞날을 보여주는 어두운 서막처럼 느껴진다.
이 일의 발단부터 간략하게 살펴보자.
미국의 이민자 문제
트럼프는 민주당과 바이든 행정부가 국경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불법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밀려든다고 꾸준히 비난해 왔다.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이 비난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불법 이민자(illegal immigrants)'라는 표현은 정치적 논쟁을 피하기 힘들다. 이 단어를 들으면 사람들은 주로 멕시코와의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와 미국에 머무는 남미계 사람들을 떠올린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들을 불법 이민자라고 부르지만, 민주당 사람들은 서류가 없는 이민자(undocumented immigrants)라 부른다. 법적으로 비자 등의 적법한 서류가 없이 미국에 머무르는 것은 불법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죄자를 연상시키는 '불법 이민자'라는 이름을 붙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근래 들어 급격하게 증가한 남미계 이주자들은 과거처럼 국경을 무단으로 침입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전쟁과 마약갱단의 납치, 살해 위협을 피해 미국에 난민 지위를 신청해서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미국은 다른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난민 신청을 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판사에게 호소할 기회를 준다. 그렇게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미국에 머무는 동안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다. 문제는 그렇게 들어오는 사람들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미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생각에 이 문제에 불만을 가진 미국인이 많아지면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에게 유리한 유권자 집단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남미에서 들어온 이민자들이 정말로 미국인의 일자리를 뺏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많다. 중국과 동남아 노동자가 없으면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미국의 대형 농장과 건설 현장처럼 값싼 노동력이 필수적인 곳은 남미계가 없으면 작동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민자의 수(아래 도표의 파란 선)는 크게 늘었지만, 미국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이민자의 비율(오렌지 선)을 보면 20세기 중반에 크게 줄었다가 20세기 초의 수준을 회복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현재의 불만은 엄밀하게는 일자리의 문제라기보다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민이 증가했을 때 미국에 흔했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민자들을 향한) 반이민 정서가 다시 분출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

이 문제가 표를 모을 기회임을 발견한 트럼프는 2016년 대선 때부터 남미에서 오는 이민자들을 범죄자로 묘사했다. 오바마와 바이든이 불법 이민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아 이들이 미국인을 상대로 살인과 강간, 절도를 저지른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 때도 이민자의 수는 계속 증가했다. 게다가 그렇게 들어온 이민자들이 트럼프의 표현처럼 범죄자들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민자들의 범죄율은 미국인 평균 범죄율을 훨씬 밑돈다. 그도 그럴 것이, 궁극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아 정착하는 것이 목표인 이들은 집단 전체로 봤을 때 미국에서 태어나 출생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보다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더 애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이민 정서를 부추겨야 표를 모을 수 있는 트럼프와 공화당은 이민자들, 특히 불법 이민자들이 저지른 범죄를 크게 부각시켜 그들 전체가 범죄자처럼 보여야 한다. 그래서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입만 열면 언급하던 범죄 조직인 'MS-13'이었다. 1980년대 캘리포니아 LA를 중심으로 결성된 이 조직은 엘살바도르 출신 이민자들이 다른 범죄 조직들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라살바투리차(Mara Salvaturicha)'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MS-13과 함께 트럼프가 주목한 범죄 조직은 베네수엘라에서 온 사람들로 결성된 '트렌데아라구아(Tren de Aragua)'다.
이들 범죄 조직은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꾸준히 단속했지만, 트럼프는 선거운동 내내 "불법 이민자는 범죄자이기 때문에 사상 최대의 단속을 통해 국외 추방하겠다"는 공약을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들을 일종의 '시범 케이스'로 추방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걸림돌이 있었다. 미국은 법치국가라는 사실이다.

국가가 범죄자들을 체포해서 처벌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진행해야 한다. 사법당국은 이들을 체포할 수 있지만, 그들이 정말로 범죄를 저질렀는지 기소와 소송을 통해 법원에서 증명해야 한다. 그 절차를 생략한 채 그들을 구금하거나 추방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절차를 모두 밟게 되면 오랜 시일이 걸리게 되고, 약속을 화끈하게 이행하는 "강력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트럼프 행정부는 이 절차를 생략할 수 있는 오래된 법조문을 찾아냈다.
무려 1798년에 만들어진 외적법(Alien Enemies Act)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프랑스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고, 프랑스에서 오는 이민자들 중에 프랑스 정부를 위해 일하는 첩자들이 있을 것을 걱정했다. 비록 프랑스와의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하지는 않았지만, 미국 의회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대통령의 직권으로 적국에서 온—아직 미국 시민이 아닌—사람들을 추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제정된 이후로 세 번 사용되었다. 영국이 침략해 온 1812년 전쟁 때 영국인,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인,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 일본, 이탈리아인들을 구금한 것. 중요한 것은 세 번 모두 전쟁 때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법은 "다른 나라나 정부와 미국 사이에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혹은 "다른 나라나 정부가 미국의 영토를 침범하거나 침범하려는 시도, 위협이 있을 때" 미국의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제정된 지 200년이 넘은 이 법을 전쟁이 없는 평시에 갱단을 상대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베네수엘라의 정세가 불안하다고 해도 이 나라는 미국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 나라 출신의 갱단이 미국에 들어왔다고 해도 그건 개인이나 조직의 차원에서 들어온 것이지 베네수엘라 정부가 보낸 게 아니다. 따라서 이 법을 아무리 넓은 의미에서 해석한다고 해도 적용에 동의할 판사는 찾기 힘들 것이었다. 물론 정부가 잘못된 법 적용을 한다고 해서 법원이 나서서 중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법 적용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들이 (대개는 변호사를 통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판사가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는 트럼프가 이런 시도를 할 것에 대비해 소송을 준비해 둔 사람들이 있었다. 몇 주 전 '가장 사나운 로펌'에서 소개한 비영리 인권 단체, 미국 시민 자유 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이다. ACLU는 미국의 사법당국이 체포한 베네수엘라인들을 아무런 재판 절차 없이 전격적으로 추방하려 한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곧바로 워싱턴 D.C.의 연방법원에 정지명령을 신청했다.
'엘살바도르행 비행기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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