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티키스를 찾아서 ②
• 댓글 남기기고대 로마인들이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공화정 말기의 시인 호라티우스(호레이스, 65~8 BCE)의 풍자글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젊은 남자들이 성관계만이 목적이라면 좋은 집안의 여성이나 결혼한 여성을 쫓아다니는 것보다 성매매 여성을 고르는 게 낫다고 이야기한다. 적어도 자기 뭘 "사는지" 알 수 있고, 돈이 적게 든다는 게 그 이유였다. 2,000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적어도 일부–남자들의 생각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당시 성매매 여성들은 지금과 다를까? 앞의 글에서 인용한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Satyricon)에 이들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남성 저자의 입장에서 가볍게 쓴 글을 통해서만 그 여성들을 파악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남자들이 쓴 글과 폼페이에 남아 있는 성매매 업소의 모습만 봐도 그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 어땠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자기 몸을 드러내고 가격표를 들고 서서 손님을 구하고, 부스 수준의 작은 공간에서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여성 중에서도 가난 때문에 성매매에 뛰어든 경우가 있었지만 (약 1/5 정도가 노예가 아니면서 성매매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매매 여성 중 대부분은 노예였기 때문에 애초에 선택권이 없었다. 로마 제국 시기에는 합법적으로 노예제도가 유지되었고, 이들 노예는 농업이나 광산 노동, 가사, 심지어 교사처럼 특화된 노동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는 성매매도 포함되었다. 노예 중에는 상대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면서 일과 생활에서 상당한 수준의 자유를 누리기도 했고, 일부에게는 노예 신분을 벗어날 기회도 주어졌다.
하지만 비참한 처지에서 사는 노예가 많았다. 끊임없는 감시를 받거나 아예 족쇄를 차고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여자 노예들은 (미국 역사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새로운 노예를 "생산"하려는 주인들에게 학대와 강간을 당하는 일이 흔했지만, 남자 노예 역시 성폭력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였고, 미성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얼마나 흔한 일이었는지는 호라티우스의 글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네 물건이 뻣뻣해졌는데 마침 옆에 집에서 일하는 하녀나 남자애가 있다고 하자. 그들을 붙잡아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서 너라면 어떻게 하겠나?" 호라티우스는 노예를 사랑하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라면서, 아킬레스나 다른 영웅들도 그랬다고 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뱀 모양의 금팔찌가 있다. 이 팔찌의 안쪽에는 "주인이 노예 소녀에게"라는 문구가 씌어져 있다. 이 장신구가 정말로 사랑해서 준 선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둘 사이의 관계에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소유물인지 분명하게 알려주는 물건이기도 하다.
어쩌면 노예들의 삶을 텍스트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고고학적 유물일지 모른다. 고대 로마 귀족들의 집을 보면 노예들이 사는 공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방을 차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집 한구석에 있는 가구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기껏해야 계단 밑이나 어둡고 습한 지하창고처럼 주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잠을 잔 것 같다.
그런데 지하창고는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폼페이 유적 중 유명한 저택인 '모자이크 기둥의 빌라(Villa of the Mosaic Columns)' 지하에서는 다리뼈에 족쇄가 채워진 노예의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그 족쇄는 땅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지하실을 당시 노예를 가두던 '노예 감옥'으로 추정한다. 폼페이의 다른 저택에서는 이런 족쇄가 찬장에 태연히 놓여 있었다. 이렇게 쉽게 눈에 띄는 곳에 놓인 족쇄는 노예들에게 그들의 위치를 일깨워 주고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어떤 위험이 기다리는지 알려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채찍질과 폭행, 그리고 포행에 대한 위협은 노예주가 노예들을 다루는 데 흔히 사용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한 건 물리적인 폭력만이 아니었다. 노예들은 인격적 모욕과 강압 등의 심리적, 정서적 폭력을 피할 수 없었다. 루파나르 같은 성매매에 업소에서는 이런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노예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당하고만 산 것은 아니다. 탈출한 사람들도 있다. 북부 아프리카 불라 레지아(Bulla Regia)에 살던 한 노예 여성은 금속으로 된 목줄을 차고 있었는데, 그 목줄에는 "바람을 피운 창녀. 불라 레지아에서 달아난 노예이니 체포할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이 목줄은 유골과 함께 한 신전에서 발견되었다. (이 문구의 의미는 우리가 반려동물에 채우는 인식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항상 채워놓고 있다가 달아날 경우 다른 사람들이 보고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달라는 얘기다–옮긴이)
하지만 정작 이걸 차고 있던 노예, 즉 유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노예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달아나서 신전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까? 이 목줄은 그가 첫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후에 채워졌던 걸까?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로마 시대의 노예 목줄만 45개에 달하지만, 그중 어떤 목줄에도 노예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에우티키스의 정체
그렇다면 이 글 서두에 언급한 (베티 하우스 벽에 적힌 이름) 에우티키스는 누구일까? 성매매 여성이었을까? 노예였을까? 둘 다였을까? 혹시 성매매 여성도, 노예도 아닌데 그렇게 낙서에 등장한 건 아닐까? 몸을 팔 수밖에 없는 강압을 받았을까?
먼저 낙서에 등장하는 에우티키스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자. 이 이름은 (로마가 아닌) 그리스 이름이고, 대략 '행운의(fortunate)'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자주 사용되던 이름. 낙서에 따르면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실제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 이름이 이 여성의 실제 이름인지, 노예주가 붙인 이름인지, 아니면 그냥 이 일을 할 때 사용하던 이름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이 여성이 자유의 몸으로 성매매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 이름은 그의 가명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 여성이 노예였다면, 그의 주인이 붙여준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에게 긍정적인 이름, 그리스식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 흔했다.
노예가 된 사람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일은 당사자에게 다양한 영향을 준다.
노예의 이름을 바꿔 붙일 경우, 그가 갖고 있던 자신만의 정체성을 빼앗고, 하나의 소유물로 취급하게 된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흑인 노예를 일종의 가축으로 취급했다– 옮긴이) 그리고 때로는 잔인하게 느껴질 이름을 주었다. 노예가 된 사람에게 '행운' 따위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잔인한 장난이다. 베티 하우스에 있던 또 다른 노예(남성)는 에로스(욕망)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 집 벽에 있는 낙서는 "에로스는 성적으로 수동적인 역할을 좋아한다"라고 설명하는데, "수동적인.. 좋아한다"라는 부분은 나중에 긁어 지운 흔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노예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주인이 하는 강압적인 통제, 폭력, 모욕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어쩌면 노예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노예 본인이 자기의 내적 정체성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노예'는 자기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되었을 수 있다. 다만 에우티키스라는 인물의 정체를 알고 싶은 우리에게는 노예주가 주었을 이 이름 때문에 이 여성의 실제 정체성은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부분, "그리스녀(Greek lass)"라는 설명은 단순한 팩트를 기술한 것일까, 아니면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만약 이 문구가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포주나 노예주가 적은 거라면, 이국적인 이름과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고객들 사이에 에우티키스의 상품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폼페이는 이미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도시였지만 말이다. 폼페이 남자들은 그리스 여성에 대한 페티쉬가 있었을까? 특정 문화, 인종 집단의 여성(과 남성)에 대해 페티쉬를 갖고 그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일은 지금도 흔한 일이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그랬다고 해도 놀라울 일은 아니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그리스녀'라는 표현은 폼페이를 여행하는 그리스인들, 혹은 폼페이에 거주하는 그리스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였을지 모른다. 실제로 폼페이에는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 이름이 적힌 낙서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이런 이들이 에우티키스의 "고객"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고 해도 "그리스녀"라는 표현은 이 여성의 신상보다는 성매매라는 장사를 위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에우티키스를 찾아서 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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